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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Feb 10. 2024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보성 편]

맑은 영혼을 여행하다



















정확한 출처는 모르겠다만 전라남도에는 이런 유명한 말이 전해져 내려온다. "순천에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 돈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땅이 넓은 순천에는 그만큼 땅부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순천의 천석꾼만 10명이나 되었다. 여유로운 지주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보니 좋은 옷을 입거나 스스로를 잘 꾸미는 사람들이 유난히 순천에 많아 순천에선 인물 자랑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수는 여수항을 비롯해 여러 항구들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어업과 무역업, 선박업이 더 활성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벼락부자가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며, 부두에 나가기만 하면 일자리가 있어 굶어죽지는 않았다고 해서 여수에선 돈 자랑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벌교에서는 왕년에 싸움을 좀 했어도 주먹자랑을 해서는 안 된다. 그만큼 벌교에는 강자들이 많다는 뜻일진대, 어쩌다 벌교는 이런 이미지를 갖게 되었을까? 일제강점기 때 어느 집안의 머슴 '안규홍'이 길을 가던 중 힘없는 식민지 조선인에게 채찍질을 하고 희롱하던 일본 순사를 보고 참지 못해 일본 순사를 때려눕혔다는 일화가 있다. 벌교도 어업과 수산업이 발달해있고, 전라남도의 다른 도시들로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덕에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해 있었다. 그렇다보니 우리 조선인이 식민지 피지배 국민으로 일본인이나 일본 순사들에게 억울하게 당하던 일이 이외에도 더 많았으리라. 어쩌면 알려지지 않았지만 못된 일본 순사놈들을 주먹으로 교육시켜준 사례가 더 많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벌교의 주먹은 의로운 주먹이다.


그 의로운 주먹만큼 벌교라는 곳도 여행지로서 강력한 한 방을 가지고 있다. 벌교는 현재 보성군으로 편입되어 있다. 원래 벌교는 조선시대까지는 낙안군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보성군으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보성군은 기존의 '보성'과 새로 합쳐진 '벌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두 지역이 서로 다른 역사를 살아왔던 만큼 보성군 한 곳만 여행해도 마치 두 곳을 여행한 듯한 가성비 좋은 코스다. 이 기행문은 우선 벌교로 시작해본다!



벌교허믄 꼬막 아니냐

벌교의 주먹이 유명하다지만 역시 벌교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을 뽑자면 '꼬막'일 것이다. 산업도시로서 벌교는 일제강점기 때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잇는 경전선이 벌교를 지나치면서 벌교의 물산을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처음 도시적 형태가 잡혀갔고, 그 이전까지 벌교는 갯벌이 넓게 펼쳐진 곳이었다. 갯벌이 많은 어촌이었기에 조선시대에는 이 마을에 뗏목(筏)으로 만든 다리(橋)를 놓아 마을 사람들이 이용했다는데, 여기서 지명 '벌교(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유래했다. 갯벌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마을인 만큼 벌교 사람들은 갯벌에 나는 해산물로 생계를 유지했다. 대표적인 해산물이 '꼬막'이었다. 꼬막은 벌교뿐 아니라 순천과 고흥에서도 자주 캤지만 유난히 벌교가 꼬막의 고장으로 퍼져있다. 순천과 고흥에 비해서 벌교 어민들의 꼬막 의존도가 높은 이유도 있다. 그리고 벌교 꼬막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한 소설 <태백산맥>의 흥행도 큰 몫을 했다.


꼬막의 원명칭은 '고막'이었다. '꼬막'은 고막의 전남 사투리였을 뿐이다. 그러나 소설 <태백산맥>에서 고막의 명칭을 구수한 사투리를 살린 '꼬막'이란 표기법을 고집했고, 소설 <태백산맥>이 유명해지면서 꼬막도 '고막'보다는 '꼬막'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서 언젠가 '꼬막'이 표준말이 되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는 꼬막을 한자어로 감(蚶)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민간에서는 '고막합'이라고 부른다고 나와 있다.


크기는 밤과 같고 껍데기는 합과 비슷하며 둥글다. 색깔은 흰색이다. 기와지붕처럼 세로무늬가 줄지어 골을 이룬다. 양쪽으로 나뉘어 있는 껍데기가 들쑥날쑥 어긋나며 딱 들어맞는다. 살은 누렇고 맛이 달다. (중략) 민간에서는 "이것은 참새가 물에 들어가 변한 것이다"라고 한다.

 - 정약전 <자산어보>


맞다. 꼬막은 달다. 내가 알고 있는 해산물 중에서는 꼬막이 가장 달다. 꼬막의 단맛은 갯벌 향내에서 비롯한다. 비린 갯벌 향내가 아니라 달콤구수한 갯벌 향내다. 꼬막은 유난히 국물이 많은데, 그 국물 속에 갯벌의 달콤구수한 향과 맛이 밀도 있게 배어 있다. 단점이 있다면 살이 너무 작아 그 맛을 풍부하게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살이 작지만 그 와중에 순간적인 쫄깃한 식감이 꼬막의 묘미가 아닐까 한다. 꼬막의 쫄깃함은 찬바람을 쐬면 극대화된다. 그래서 꼬막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시기는 11월~3월, 그중에서도 절정은 1~2월이다. 벌교에 가면 꼬막식당으로 '거시기 꼬막식당'이 가장 유명하다. 꼬막정식을 주문하면 꼬막찜, 꼬막구이, 꼬막탕수육, 꼬막전, 꼬막무침, 꼬막비빔밥 등 꼬막으로 요리할 수 있는 모든 요리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여행의 여유, 보성여관


여행을 가면 시간을 꽉꽉 채워서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나에겐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느긋이 여유를 부리는 것이 일종의 사치라면 사치다. 그런데 가끔 이런 사치를 즐기는 것도 여행의 좋은 인상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해주더라. 거시기꼬막식당에서 딱 소화시킬 정도로 걸을 수 있는 거리에 문화재로 지정된 카페가 있다. 바로 보성여관이다. 보성여관은 카페면서 숙박도 가능한 숙소이다. 말그대로 원래는 여관이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5년에 일본식 적산가옥으로 지어진 여관이었다. 당대에는 나름 벌교에서 유명했던 여관으로 보이며, 소설 <태백산맥>에서 '남도여관'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면서 그 인지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지난 2004년 거금의 예산을 투입한 복원과정을 거쳐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보성여관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도 진행 중이며, 일제강점기 시기의 일본식 적산가옥의 형태를 제대로 고증해두었다. 비록 소설 속의 이야기지만 소설 <태백산맥>에서 토벌군이 머물렀던 장면을 상상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여유를 즐기니, 그때 내가 했던 상상과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보성여관'의 이미지가 함께 기억되니 보성여행도, 또 소설 <태백산맥>도 더 강렬하게 내 추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태백산맥 문학기행

보성의 벌교여행을 꼬막미식여행 혹은 태백산맥 문학기행이라고도 한다. 80년대 불후의 대작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는 곳이 보성의 벌교다. 소설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은 아닌 나에게 주관적인 최고의 소설을 꼽으라면 <토지>와 <태백산맥>을 꼽곤 한다. 두 대하소설들을 꼽으면 우리 같은 세대들은 그걸 다 읽었느냐고 하며 다들 놀라더라. 나도 활자보다는 디지털이 더 익숙한 세대이기에 두 대하소설을 완독하는 일은 처음에 대단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그 부담을 깨뜨려준 소설이 <태백산맥>이었다. 전역을 얼마 안 놔둔 병장 시절, 시간이 워낙 가질 않아서 시간이나 떼우고자 <태백산맥>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이 책에 단숨히 매려됐고, 방대한 양이 부담스럽다기보다는 도저히 이 다음 어떻게 됐는지 그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어 다음 편을 바로 빌려야만 했다. 오죽하면 후임들이 날 '태백산맥 병장님'이라 불렀다. 제대하기 전 <태백산맥>을 완독하였고, 대하소설에 대한 부담감을 확 줄일 수 있었다. 그 덕에 제대 후 <토지>에 도전할 수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태백산맥>에 매료되었을까? 조정래 작가님의 신들린 문체야 말할 것도 없다. <태백산맥>의 시대적 배경은 해방 직후, 더 구체적으로는 여순사건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를 다루고 있다. 나에게 역사는 교과서에서 기술되어 그것을 무미건조하게 달달 외우던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로 내가 건조하게 알고 있는 지식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픽션을 볼 때 때론 지식에 숨결이 부여돼 지식을 넘어 정서적 울림으로 바뀌는 순간들이 있다. 영상매체를 자주 보는 나이지만 소설은 영상매체와 또 다른 울림을 준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게 해준 작품이 <태백산맥>이었다. 이 다음에 어떤 역사적 사건이 벌어질지 알고 있으니 소설 속 인물들이 그 역사의 풍랑을 또 어떻게 극복해내갈런지 마음 조리며 읽은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감수성의 감격은 아는 자들의 특권이다.


특히나 <태백산맥>을 애정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 개인적인 취향을 떠나서 이 대하소설의 의의도 있을 것이다. 미군정 말기에서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그 험난했던 과정을 거쳐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한국전쟁은 어떨지 몰라도,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창작물들은 적어도 나의 문학적 범주 내에선 별로 없었다. 나의 문학적 범주를 떠나서라도, 실제로 <태백산맥>은 여순사건과 빨치산을 다룬 한국 최초의 소설이기도 하다. 그 전의 다른 작가들이 여순사건과 빨치산을 다루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루지 못했다. 서슬퍼런 독재의 검열 속에서 반공주의적인 작품이라면 몰라도 이념의 잣대에서 벗어난 관점은 결코 허용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조정래 작가님은 80년대 5공화국의 검열 속에 당당히 <태백산맥>을 내놓았다. <태백산맥>이 1989년에 마지막 최종권이 출간되었으니, 독재 끝물이라는 점이 어느 정도 적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994년 8개의 반공단체들이 단체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500 여가지에 걸쳐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며 조정래 작가님을 고발하였다. 11년이나 지나서야 검찰에선 조정래 작가를 무혐의 처분하였다. 이처럼 <태백산맥>은 우리 문학사에서 아주 당돌한 작품이었다.


벌교의 거시기꼬막식당과 보성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태백산맥문학관이 있고, 그 앞으로는 <태백산맥> 속 마을을 재현해두었다. 태백산맥문학관에는 조정래 작가님이 소설을 구상하고 집필하고 출간했을 때의 과정이 소상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16,500매의 분량을 위로 쌓아올린 <태백산맥>의 원고지다.

"제가 <태백산맥>을 시작할 때 제 키를 넘는 원고량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생각하지 못했죠. <태백산맥>은 가려지고 숨겨지고 파묻혀 있는 역사를 햇별 아래로 드러낸, 사실을 사실이라고 말하는 진실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태백산맥>의 높이는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진실의 두께와 비례합니다." - 조정래 인터뷰




태백산맥문학관 건물 외벽에 조정래 작가님의 인용글이 새겨져 있다.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 역사와 창작물 사이의 관계, 아니 더 나아가 무엇을 담고자 하는지와 그것을 어떻게 담아내고자 하는지 사이의 윤리성과 예술성은 언제나 고민하고 반성해야 한다.



보성녹차밭의 다선일미(茶禪一味)

보성 여행의 둘째날은 보성읍이다! 진정한 보성이 아니겠는가! 벌교여행이 꼬막미식여행과 태백산맥문학기행이라면, 보성여행은 녹차 여행이다. 보성 녹차야 워낙 많이 들어 익숙하지만 보성에 들어서는 순간 곳곳에 줄지어 있는 녹차밭을 보고는 보성 녹차의 저력을 새삼 느꼈다. 특정 여행지를 콕 집지 않더라도 보성에선 녹차밭 옆에 녹차밭, 그 옆에 또 녹차밭 줄지어 있으니 보성인들의 생활과 아주 가까운 그들의 자산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관광객들이 몰리는 녹차밭은 대한다원이다. 보성녹차는 대한다원과 함께 시작했다.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조성된 대한다원 녹차밭은 해방 후 6.25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되었는데, 1957년 장영섭 회장이 인수하여 대규모 녹차밭으로 확대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주차장에서부터 소슬한 숲길을 적적히 걷다가 매표소에서 티케팅을 하고 안으로 진입하면, 다시 기분 좋은 메타쉐카이어길을 걷다가 광장을 지나쳐 거대한 녹차밭의 광경을 마주한다. 다소 체력이 지치긴 하지만 녹차밭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이 거대한 녹차밭의 파노라마와 저 멀찍이 보이는 남해바다까지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다. 녹차밭의 푸르른 잎사귀들이 모여 만든 이 광경의 감격은 초자연적이기까지 하다.



차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들이 있지만, 모든 차들은 동일한 찻잎에서 출발한다. 일반적인 찻잎이란 딱 한 가지 종인 것이다. 그저 찻잎을 어떻게 조리해느냐에 따라 차종이 나뉜다. 우선 찻잎을 그 어떤 가공과 발효를 하지 않고 우려낸 차가 녹차이다. 가장 기본이 되는 차라고 할 수 있다. 찻잎을 아주 살짝만 발효시키고 대신 찻잎을 건조시켜 우려낸 차를 백차라고 한다. 백차보다 조금 더 발효시키면 황차가 된다. 황차는 '약발효차'로 분류가 되며 6가지 차 종류 중 가장 덜 알려졌다. 황차에서 더 발효시킨 '반발효차'가 청차이며, 대표적으로 우롱차가 청차에 해당한다. 반발표에서 훨씬 더 발효시킨다면 순차적으로 홍차, 흑차가 된다. 홍차의 경우 중국산 찻잎을 영국으로 운송 도중 우연히 발효된 찻잎을 우려먹다 탄생했기에 홍차의 종주국을 주로 영국으로 간주한다. 동양에서도 찻잎을 완전발효시킨 전례가 있으니 흑차이며, 윈난성의 특산물 보이차가 흑차에 해당한다. 흑차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다보니 값비싼 가격에 판매되곤 한다. (말차는 녹차의 찻잎을 가루로 갈아 타먹는 차를 뜻한다.)


녹차의 원산지는 중국의 서남부 쓰촨성에서부터 티베트,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중간지대인 아삼 지방으로, 지역적 특성에서 유추할 수 있듯 차는 온화한 기후에 적당한 고산지대에서 바람을 잘 받는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 중국인들이 언제부터 녹차를 처음 마셨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동양인들이 차를 마신 역사는 매우 오래됐고, 차의 존재가 유럽으로 전해졌을 땐 유럽인들은 차가 없으면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특히 영국의 호감이 높았는데, 영국은 중국 청나라로부터 수입하는 차로 인해 만성적자 재정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영국에서 일으킨 전쟁이 아편전쟁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신라 시대 828년 흥덕왕 때 당나라로부터 처음 차나무를 선물받았다는 기록이 공식적인 우리 차 역사의 시작이었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기에 임금(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 <삼국사기> 흥덕왕 세가



비록 원산지는 중국~아삼지방에 걸쳐 있다지만 오늘날에는 중국뿐 아니라 한국, 일본,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 각자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방식으로 찻잎을 생산하고 있다. 보성군의 차 역사는 사실 녹차가 아니라 홍차에서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홍차를 생산 후 수출해낼 목적으로 1938년 경성화학공업주식회사를 통해 인도산 차나무를 보성군에 심어 조성했던 것을, 전술했다시피 한국전쟁 이후 장영섭 회장이 계단식농법을 도입하였다. 보성군의 홍차는 대한민국의 주요 수출품으로도 활약했으나 1972년 일본이 대만과의 수교 단절로 그간 대만으로부터 수입해오던 녹차의 길이 중단되고 말았다. 일본이 선택한 대안은 한국이었고 보성군의 대한다원에서 녹차를 주력으로 밀었다. 때마침 88올림픽으로 전통에 대한 관심에 발맞추어 그 어느 때보다 녹차의 인기가 부상했던 것이다. 70-80년대를 기점으로 대한다원은 녹차에 매진하였고, 오늘날 보성군은 하동군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녹차 고향이 되었다.


우리 선조들이 풍류를 위해 크게 의지했던 두 벗이 술과 차였다. 밤에는 술이, 낮에는 차가 있었다. 술이 영혼을 채워주었다면, 차는 영혼을 비워내주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차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한국만의 다도를 정립한 한 사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으니, 바로 조선후기의 승려였던 초의선사이다. 전라남도 무안에서 태어난 초의선사는 15세 때 나주 남평의 운흥사로 출가하여 승려로서의 삶을 걸었다. 초의선사는 당시 전라남도 강진에 유배 중이었던 다산 정약용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며, 이때 차를 통한 선 철학을 학습한 것으로 보인다. 30세에 더 깊은 선 철학의 가르침을 받고자 처음으로 상경하여 경기도 남양주의 수종사로 가서 해붕스님 밑에서 수학하였는데, 이때 역시 해붕스님에게 선 철학을 공부하고자 해붕스님을 찾으러 왔던 동갑내기 추사 김정희와 처음 만나 두 사람은 절친이 되었다. 추사 김정희에게는 소중한 인연들이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절친한 '친구'는 초의선사만한 사람이 없었다. 

초의선사 (사진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초의선사는 다시 전라남도로 내려가 해남의 대둔사에 '일지암'이라는 아주 소략한 암자를 두고는 평생 다도와 선 철학 연구에 심취했다. 제주도로 유배령이 떨어진 추사 김정희는 전라남도에서 배를 타기 전 일지암으로 달려가 초의선사부터 만났으며, 추사 김정희가 유배로 인해 제주도에서 몇 년 간을 나오지 못할 때 초의선사가 해남에서 제주도로 와 반년 가량 추사 김정희와 함께 머무르기도 했다. 초의선사가 해남으로 돌아간 뒤로도 초의선사와 추사 김정희는 수많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서로에 대한 돈독한 우정을 과시하였다. 1848년 유배생활 9년만에 해배된 추사 김정희는 역시 육지 땅을 밟자마자 초의선사가 있는 일지암으로 달려갔다. 


제주도에서 풀려난 추사 김정희는 고향 예산으로 돌아가 몇 년을 그곳에서 머물렀는데, 이 당시 추사 김정희의 정확한 거주지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초의선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강상에 머무르고 있다'고 전해 추사 생애에서 이 시기를 '강상 시절'이라고 부른다. 어느덧 노년의 추사 김정희는 언제나 초의선사를 애틋하게 그리며 편지를 보내 한번은 강상에 들러다라 떼를 썼다.


"나는 스님이 보고 싶지도 않고, 또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진 않지만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차를 찾게 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거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다." - 김정희의 편지


우직하고 강골한 성격인줄만 알았는데 추사 김정희라는 사람도 절친한테는 이렇게 농담도 잘 했었나 보다. 초의선사는 끝내 강상을 방문해 추사 김정희와 차를 마시며 놀았다고 한다. 초의선사가 일지암으로 다시 떠날 때 그 아쉬움에 추사 김정희가 서예 작품 하나를 선물로 보내니


다반향초(茶半香初): '차를 반이나 마셔도 향은 처음 그대로다'라는 뜻으로 초심을 유지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일지암에서 마침내 다도를 통한 선 철학을 완성한 초의선사는 <<동다송>>이라는 저서를 펴냈고, 오늘날에 초의선사를 다도계의 성인이라는 뜻에서 '다성'이라 칭한다. 초의선사는 차를 곧 인간의 영혼으로 여겼다. 아니 인간의 영혼이 지향해야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초의선사는 언제나 '다선일미(茶禪一味)'를 강조했다. 차와 인간의 선은 같은 맛이라는 것이다. 


푸른 찻물 녹색 향기가 아침 옷깃에 스미니

총명이 사방으로 트여서 막힌 바가 없구려

- 초의선사 <<동다송>> 중


녹차의 집산지답게 보성엔 녹차를 활용한 음식들이 다양하다. 녹차와 녹차 아이스크림, 녹차라떼를 비롯한 카페들은 물론이고, 녹차를 머금은 삼겹살과 떡갈비 식당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카페로는 '봇재'라고 보성군에서 운영하는 복합몰이 있다길래 찾았다. '봇재'가 무슨 뜻일까 생각해보니 이 복합시설물이 위치한 곳이 가파른 고개에 있고 보성의 앞글자 '보'를 따와 '봇재'가 된 게 아니었을까 한다. 카페 이름 자체가 옛 지명이 가리키니 여행지 카페로 이만한 곳이 없다! 녹차삼겹살과 녹차떡갈비들도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순 있지만 보성의 전통시장들에 몰려 있으니 시장을 찾아보길 권장한다.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문뜩 떠올랐다. 녹차떡갈비, 녹차라떼, 녹차아이스크림까지 모두 먹긴 했지만 정작 녹차를 마시진 않았다는 걸...






명선. 항상 질 좋은 차를 보내준 초의선사에게 보답하기 위해 추사 김정희가 답례로 보내준 서예 글씨다. 초의선사는 '명선'을 자신의 호로 삼았으니, 이 단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나보다. 명선이란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는 뜻으로, 차를 통해 선사상을 추구했던 초의선사의 철학을 압축적이고 명료하게 담아내고 있다. 선()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철학에 교양이 옅은 나로선 명료하고 적확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초의선사의 말을 따라해보자면 선()이란 차의 맑음이다. 다시 말해 '선(禪)'이란 차를 통해 영혼을 맑게 정화하는 과정이자 도달해야 하는 정향점이다. 


<태백산맥>의 저자 조정래 선생님이 말하신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말씀 또한 결국은 인간의 맑은 영혼, 그리고 그 맑은 영혼에서 비롯하는 정화된 삶과 공동체를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한다. 차가 다 똑같은 차가 아니냐고, 소설은 그저 소설일 뿐 아니냐고 냉소적으로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맑은 영혼은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만 다가올 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정화되지 않는다. 영혼이란 말이 거창하다면 내 일상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주고, 정신을 깨게 해주는 행위는 주기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행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소도구가 차이고 문학이라고, 이번 보성여행을 통해 깊이 생각해본다. 현대사회에는 삶을 충만하게 채우는 고수들이야 많다. 그런데 삶을 가볍게 비워내는 고수들은 점점 줄어드는 것만 같다. 채우고 비우고, 비우고 채우는 그 사이의 균형을 나의 태백산맥문학기행과 보성녹차기행으로 조금은 짐작은 해볼 수 있게 되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박동춘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한국의 다성'이라 불리며 한국 다도문화를 복원하고 새롭게 정립한 초의선사를 다룬 책들 중 가장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이 책의 저자 박동춘 작가님은 초의선사의 제자인 범해 스님의 제자인 원응 스님의 제자인 응송 스님의 제자입니다. 즉 초의선사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로, 초의선사의 차 이론을 적통으로 전수받아 '초의차' 연구 및 계승에 앞장서고 있으신 분이시죠. 자신이 연구하고 계승하는 분야의 시조격인 초의선사의 생애와 차에 담긴 선 사상을 널리 알리겠다는 사명감마저 느껴집니다. 이 책은 크게 3가지 구성으로, 초의선사의 간단한 생애-초의선사가 만났던 그의 소중한 인연들-그리고 차에 담긴 초의선사의 선 사상을 다루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차 한 잔에 무슨 의미를 그렇게 부여하는가 회의적일 수 있지만 정화된 영혼을 투영하는 가치관이야말로 동양철학의 원융이 아닐까 합니다. 이 책에서도 가장 강조하는 것이 차에 담긴 본질, 물체, 관념 등이 섞여서 발휘되는 차의 원융함인데요, '차 한 잔의 여유'라는 말이 있듯 그 여유가 곧 영혼의 정화죠. 이 책은 차에 대한 초의선사의 다도 문화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차를 매개로 어떻게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봐야 하는지 새로운 시선을 일깨워준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1994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94번째 장편연출작이자, 조정래 선생님의 <태백산맥>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태백산맥>이 워낙 분량이 많은 대하소설이다보니, 시도조차 다소 부담스러우신 분들은 영화로 먼저 접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안성기, 김명곤, 김갑수, 오정해 등 당시로서 나름 초호화 캐스팅이었죠. <태백산맥>의 그 거대한 세계관을 3시간이 조금 안 되는 분량에 담으려다 보니까 원작의 내용과 감정선과 캐릭터들이 많이 축약되어 안타깝지만, 그럼에도 이만큼 살린 건 임권택 감독이기에 가능하다 싶습니다. 그리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하는 전투씬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과 격정적인 스펙터클을 선사해줍니다. 드라마와 액션이 연출이 모두 가능한, 확실히 거장은 다르구나 생각이 드는 감독님이시죠. 하지만 <태백산맥> 세계관의 진정한 가치와 매력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원작 대하소설을 읽어보시길 권장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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