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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 Apr 16. 2024

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인천 편]

떠남과 만남을 여행하다

언젠가 TV에서 유시민 작가가 해외로 여행을 가면 그 지역의 항구는 꼭 가는 편이라고 본 적이 있다. 항구는 사연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라더라. 육로가 아닌 바다를 이용한 이동은 훨씬 더 먼 곳으로 향한다는, 어쩌면 영영 만나지 못하고 만나더라도 꽤 긴 세월이 걸릴 것만 같은 분위기가 있다. 항구에서는 누군가를 떠나 보내기도 하고, 누군가로부터 떠나기도 하고, 누군가와 만나기도 하고, 연고가 없는 곳에 정착하기도 한다. 이별과 만남, 그리고 낯선 환경에 대한 어색함과 적응이 공존하는 곳이다.


대한민국의 대표 항구도시라 함은 부산과 인천이 있을 것이다. 실제 두 지역이 가장 역사적으로 오래된 항구도시이며, 그만큼 더 많은 사연들이 깃들었을 것이다. 그중 인천은 수도 한양(혹은 경성 혹은 서울)과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인 만큼 저마다 수백 수만 가지의 이유로 수많은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천 항구 도시에 깃든 각종 사연들은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인천의 역사는 떠남과 도착의 역사였다. 그리고 인천의 여행은 이별과 해후의 여행이다.




차이나타운: 화교의 흔적


나의 인천 여행은 인천역에서 시작한다. 인천역에서 내리면 넓지 않은 폭의 횡단보도 넘어 차이나타운의 큼지막한 대문이 여행객들을 맞이해준다. 차이나타운이 언제적 차이나타운이냐 할 수 있겠지만 내 주변엔 차이나타운을 제대로 여행해봤다는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차이나타운의 투어 시작은 여느 관광객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길거리 월병, 공갈빵 등 길거리 음식들을 줏어먹으며 예열해준다. 조금 있다가 점심을 먹어야 하지만 길가에 풍기는 양꼬치 냄새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차이나타운은 보행속도를 급격하게 늦춰주는 곳이다. 차이나타운에 가면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항상 고민이다. 공화춘의 짜장면? 십리향의 화덕만두? 어느 곳 하나 놓치기 싫은, 차이나타운을 대표하는 중식 요리다. 그리고 어느 곳 하나 웨이팅은 감수해야 하는 식당들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 투어에 이제 막 입문하는 자라면 공화춘의 짜장면으로 선택하는 게 의미있을 것이다. '공화춘'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짜장면을 개발해 요리를 낸 최초의 중국집이기에 그 의의가 남다르다. 현재 공화춘 건물은 신설한 건물이며, 한국 최초의 중국집이었던 시절 가게는 현재 짜장면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짜장면 박물관 입구


짜장면은 처음부터 그 모습이 짜장면이 아니었다. 짜장면의 전신은 수타면이었으며, 19세기 말 인천으로 들어온 산둥성 출신의 화교들이 먹던 음식에서 유래했다. 밀대로 민 다음 칼로 썰어 면을 뽑으며 '쿵!' '쿵!' 소리가 나던 수타면은 전통적인 한국인들의 면발을 제조하던 방식이 아니라 금세 한국인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19세기 말 인천항에는 산둥성 출신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해외에서 저임금으로 고용되어 노동하는 중국인, 인도인 노동자들을 사회학적 용어로 '쿨리'라고 부르는데, 쿨리들이 인천항에서 수타면을 배달시켜 간단히 요기를 채웠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런 양념 없이 면을 먹을 수야 있나! 인천항의 중국인 쿨리 노동자들은 중국 전통향신료 양념이었던 첨면장을 면에 섞어 먹었는데, 이 첨면장이 오늘날의 춘장이고 그렇게 검은 면요리 '짜장면'이 탄생했다. 원래 산둥성에는 '작장면'이라고 첨면장에 면을 비벼 먹는 향토음식이 있었다고 한다. 타지인 인천에서 그들의 향토음식을 그대로 먹을 순 없었고, 여러 변화를 거쳐 작장면이 짜장면으로 변하였다. 

짜장면의 인기는 금세 인천으로 퍼졌고 화교들이 모여 살던 지금의 차이나타운에는 중국집들이 즐비해졌다. 정식 중국집으로 첫 가게는 1912년 문을 열었던 '공화춘'이었다. 1년 전 중국에선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중국 역사상 최초의 공화정부가 들어서자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공화'라는 이름을 가져와 식당이름을 지은 것이다. 중국집은 인천을 넘어 지방으로도 퍼졌고, 인천 외 다른 항구도시 위주로 화교들이 몰리면서 중국집이 많이 형성되었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고는 중국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는데, 인기의 확산 배경에는 맛도 맛이지만 '배달'이라는 비결이 숨어 있었다. 우리는 중국집 배달가방이라 하면 알루미늄으로 만든 철가방을 떠올린다. 일전 MBC 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이연복 셰프가 이야기해줬듯 원래 중국집 배달가방은 나무가방으로 시작했다. 단 나무가방은 배달하기엔 너무 무겁고 또 위생적인 문제도 있어서 알루미늄 철가방으로 대체되었던 것이다.



짜장면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오면 짜장면의 유혹을 뿌리칠 수가 없다. 이미 눈만으로 식욕을 돋우었고 나도 모르게 공화춘으로 달려간다. 센스넘치게도 공화춘에서는 지금 인기 있는 형태의 짜장면도 팔고, 옛날 공화춘에서 팔았던 전통적인 짜장면도 팔고 있어서 조금이나마 색다른 짜장면을 먹어보고 싶다면 일반 짜장보단 공화춘 짜장을 주문하기를 추천한다. 든든하게 먹고 나와서 조금 여유부리는 관람을 하고 싶다면 근처에 중국식 찻집이 있으니 그곳에서 차나 커피를 마시면서 중국풍 분위기를 만끽해보는 것도 좋다. 다만 나는 가만히 휴식하면서 소화를 시키기보단 두 다리로 걸어다니고 박물관을 구경하면서 소화를 시키는 편이니 식사 후 당차게 다음 차이나타운 명소로 이동한다. 















차이나타운의 길거리 음식들, 짜장면 박물관, 짜장면 식사까지. 어쩌면 여기까지가 차이나타운의 클리셰일 것이다. 다만 차이나타운의 관광객들은 모두 이 코스에서 중단하고 그 다음으로, 아니 그 내면으로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나. 차이나타운의 중국풍 분위기를 만끽하는 사람들은 많아도, 차이나타운을 만든 화교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 차이나타운 입구에 메인 명소와 식당들이 몰려 있지만, 차이나타운 끝쪽으로 걸어가보면 차이나타운과 화교들의 삶과 사연을 소개해주는 한중문화관이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고 한중문화관에서 중국 전통문화를 가볍게 관람한 후에는 한중문화관과 연결된 인천화교역사관으로 넘어갈 수 있다. 인천화교역사관에 와서야 비로소 차이나타운의 제대로 된 모습을 마주했다고 할 수 있다.



1882년 조선은 청나라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양국이 서로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기 이전에도 조선은 청나라에게 사대하는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다. 다만 조선을 마지막으로 이젠 동아시아 국가들도 전부 근대화에 접어들면서 기존의 전근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새롭게 근대적 조약을 체결해갔다. 조선이 1876년 일본과 먼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청나라는 1882년 조선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두고 새로운 형태의 근대적 외교관계였다는 해석과 기존의 조공책봉관계를 더 강화하려는 조약이었다는 해석으로 양분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청나라가 조선의 경제에 침투하려는 목적이었음은 분명하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장정의 명칭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조선과 청나라 사이 무역에 관한 조약이었다. 장정은 청나라에게만 유리한 불평등한 조약이었으며, 조항들 가운데 경제적인 측면을 살펴보자면 청나라 상인들이 마음껏 조선에 들어와 상행위를 할 수 있도록 조선이 보장해주는 것이 주요골자였다. 심지어는 청나라 상인들이 양화진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국내에 있는 외국인과 무역을 할 때 외화를 자유롭게 주고 받을 수 있는 무역을 '내지무역'이라고 한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자 청나라의 많은 상인들이 사업의 꿈을 안고 조선에 유입되었다. 조선으로 들어오는 청나라인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산둥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인 상인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청나라인 노동자들도 함께 유입되었고, 이것이 한국 화교의 시작이었다. 화교란 해외에 퍼져 있는 중국인들을 가리킨다. (더 정확히는 해외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가운데 중국 국적을 포기한 화인과 중국 국적을 유지하는 화교로 구분한다.) 



조선의 개항 역사 초기에는 문호를 연 항구가 인천, 원산, 부산 세 곳이었다.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출발하는 청나라인들은 전부 인천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인천에는 청나라인들이 거주하는 조계지(외국인들이 자유롭게 통상에 종사하고 생활을 할 수 있으며 치외법권이 설정되어 있는 구역)가 만들어졌으니, 바로 지금의 차이나타운 자리였다.


인천항에서 부두 노동자로 일하던 쿨리 중국인들은 노동환경이 열악하자 청나라 조계지에서 청나라인들을 대상으로 작은 가게들을 꾸리곤 했다. 그 가게들은 대개 중국집, 옷가게, 이발소였다. 그래서 이 3가지 업종을 가리켜 중국집에서 사용하는 식칼, 옷가게에서 쓰는 재단칼, 이발소에서 쓰는 면도칼을 통칭해 '싼바다오(세 자루의 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전하면서 인천의 청나라 조계지는 급격하게 위축되었고, 1910년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 청나라 조계지 자체가 철폐되었다. 하지만 조계지에 거주하던 청나라인들은 계속 생활하면서 그들끼리의 커뮤니티를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1920년대에 이르면 화교 인구가 약 1800여 명이었다. 중국 명절마다 화교인들이 옛 청나라 조계지에서 개최하던 각종 폭죽놀이와 가장행렬은 식민지 조선인들과 일본인들 모두의 이목을 모으는 오락거리였다고 한다. 다만 해방 후 한국전쟁 때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중국에 대한 혐오감이 팽배해져 화교들을 배척하였다. 전후 이승만 대통령 역시 화교들의 경제권을 심각하게 규제하면서 화교 커뮤니티가 없어지다시피 위축되고 말았다. 1991년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서야 한중수교를 통해 중국과 국교를 회복하면서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옛 청나라 조계지 터를 차이나타운으로 조성하면서 지금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단일민족 국가이기에 한국사는 오롯이 한국인들만의 것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역사관이 폐쇄적으로 바뀌면 그 민족은 자멸하는 법이다. 역사는 어느 한 민족만의 소유물이 아니며, 여러 구성원들이 복합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며 역사를 진행시켜왔다. 한국 화교들의 역시 한국사의 일부분이며 우리는 타민족, 타문화에 대해 개방적인 역사관과 사고관을 갖는 것이 국력을 증진시키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중문화관 입구



인천개항장거리: 일본의 흔적

한중문화관과 인천화교역사관이 위치한 곳이 차이나타운의 끝이다. 이 곳이 차이나타운의 끝이라는 걸 사전에 모르고 있어도 그 옆으로 놓인 경계선 같은 거리가 있기에 누가 봐도 이 곳으로 오면 차이나타운이 끝났다는 걸 인지할 수 있다. 이 경계선 같은 거리는 실제로 19세기 청나라 조계지의 끝을 알리는 구간이었으며, 그 너머는 일본인들의 조계지였다. 오늘날에는 이 거리에 비석을 하나 두어 청나라 조계지와 일본 조계지의 경계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과거 일본인들의 조계지였던 곳은 현재 인천개항장거리로 불리고 있다. 중국테마여행을 끝내고 이제는 일본테마여행이다! 


청나라-일본 조계계단
인천개항장거리


문호를 굳게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은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근대화에 접어들었다. 강화도 조약에 의거 조선의 인천, 부산, 원산 세 항구를 개항하였고 세 도시에는 일본인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조계지를 간행이정이라고도 부르는데, 간행이정으로 규정된 일본인들의 조계지에서는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상행위를 할 수 있었고 그덕에 많은 일본인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먼저 개항된 곳이며 가장 먼저 조성된 조계지였기에 오늘날의 인천개항장거리에 해당하는 인천의 일본인 조계지는 가장 근대화된 곳이었다. 일본인 외 서양인들도 수도 한양으로 올 때는 인천항으로 입항한 후 일본인 조계지를 거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덕에 많은 근대시설들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았는데, 대표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이 있다.


1887년 일본 나가사키의 무역상인이었던 호리 히사타로와 그의 아들 호리 리키타로가 조선으로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숙박업 사업을 하고자 2층짜리 일본식 목조 가옥을 만들고 이내 3층짜리 서양식 벽돌 건물로 신축 확장하였다. 이 최초의 호텔이 대불호텔이며 1888년부터 정식 개업하였다. 숙박료는 대략 2원~2원 50전으로 상당한 고가의 최고급 호텔이었다고 한다.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었던 만큼 우리 조선인들이 봤을 땐 얼마나 충격적이었을까. 다만 호텔의 시설적인 측면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의 배제대학교 전신을 만든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호텔 직원들이 영어를 구사하여서 편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지만, 오늘날 연세대학교 전신을 만든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는 호텔이라곤 하지만 침대에 모포가 있는 것이 전부였다고 하며,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뎅은 지붕에서 비가 샜다고 회고하는 등 하나 같이 불편함을 토로했다.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해도 내부는 비참할 정도로 초라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엿다. 



1899년 한양과 인천을 잇는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이제 인천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굳이 인천에 머무를 필요 없이 철도를 타고 곧바로 한양으로 떠날 수가 있었다. 경인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 마차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을 땐 인천항에서 한양까지 12시간 거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경인선을 타면 1시간 40분만에 한양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숙박객들이 점차 줄어들자 대불호텔은 경영난에 허덕였고, 다른 호텔들도 점점 들어서다보니 호텔을 더 이상 경영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1918년 중국인 부호 뢰씨 가문이 대불호텔 건물을 매입하여 '중화루'라는 중국집을 열었고 중국집은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공화춘의 인기를 앞지를 정도였다. 다만 1970년대 결국 중화루도 문을 닫았고 폐건물로 이어지다가 다시금 옛 호텔의 모습을 복원하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불호텔 외에도 인천개항장거리에는 개화기~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들이 다수 남아 있어 현재는 박물관으로 탈바꿈된 건물들이 즐비하다. 1888년 설립된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인천개항박물관으로, 1890년 설립된 일본 제18국립은행 인천지점은 인천개항장근대건축전시관으로 모습을 바꾸었고, 전부 다 한 구간에 모여있다. 버려진 일본식 가옥을 리모델링해 카페로 운영 중인 '관동오리진'이나 '팟알'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유도 잊지 말자. '개항장'이라는 이름으로 출시된 인천의 수제맥주를 파는 작은 가게도 있으니, 날 좋을 때 테라스에 앉아 낮술을 즐길 수도 있다. 몇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근대건축물과 일본식 가옥을 공간으로 다양한 오락시설들이 있으니 지루할 틈이 없다.


옛 인천개항장거리 재현모습


체력이 남아 있다면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제물포구락부까지 걸어가보자.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장으로도 이름을 알린 제물포구락부는 1901년에 서양인들이 모이는 사교장인 곳이었다. 테니스 코트, 도서실, 당구장 등의 위락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1913년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내 모든 외국인들의 조계지가 철폐하였고 제물포구락부도 쇠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 후 1953년에는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하였고, 1990년부터는 인천문화원으로, 그리고 2007년부터 다시 제물포구락부의 이름으로 다양한 문화행사들을 이어가고 있다. 

제물포구락부

제물포구락부에서 조금만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인천항과 인천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자유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 굽어보는 가운데 자유공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저 바다에서 조선을 드나들고 또 나가던 사람들의 만남과 재회와 이별을 생각해보니, 때마침 낙조가 분위기를 더 돋구는 건지 아련한 비장미가 은은하게 깔려 다가온다.


인천개항장거리는 월미도와 붙어 있다. 월미도에는 일본식 컨셉 등 다채로운 컨셉의 숙소들이 많으니 잘 찾는다면 숙소까지도 콘텐츠를 채울 수 있는 재미도 잊지 말자.





월미도 한 바퀴

여행 첫째날을 마치고 월미도에서 눈을 뜬다. 한 물 가버린 유원지라는 선입견이 생겨버린 곳. MZ세대 이전 2000년대 젊은 세대들이 몰렸던 곳. 디스코팡팡과 바이킹의 명성만 전해지는 곳. 그런 이미지로만 전해지는 월미도의 모습이 안타깝다. 사실 더 안타까운 건 월미도에 깃든 역사 속의 사연들이다. 지금은 유희와 위락과 오락의 공간이지만 월미도는 근대도시 인천의 과거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전날 월미도에 도착했을 때 하늘 위에서 붕붕 지나가던 월미바다열차를 보고 너무 타고 싶었으나, 사전예약제라길래 그날 저녁에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운행하는 시간대로 예약했다. 월미바다열차는 월미도 입구인 월미바다역에서부터 월미도 외곽을 한 바퀴 돌고 첫 정차역으로 돌아오는 모노레일이다. 그저 열차 안에서 창밖의 월미도 풍경을 구경할뿐만 아니라 가이드 한 분께서 같이 탑승하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월미도의 이모저모에 대해 해설까지 더 해주시니 월미바다열차를 놓쳤으면 어떡할 뻔 했나! 


사진출처: 월미바다열차


월미바다역에서 출발해 월미테마파크와 조개집들이 즐비한 월미도 해안가를 돌고 월미도 뒷편으로 오면 오늘날의 인천을 만들어준 인천항의 광경이 펼쳐진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인천을 개항하겠다고 조인한 이래 여러 준비를 거쳐 1883년 정식적으로 인천항이 문을 열었다. 강화도 조약 당시 인천과 함께 개항한 항구도시로는 부산과 원산이 있었다. 그런데 인천의 경우 부산과 원산에 비해 골치아픈 문제가 크게 걸림돌이 되었으니, 너무나도 큰 조수간만의 차였다. 부산과 원산은 동해 혹은 남해라는 얼마든지 넓은 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었지만 복잡다단한 해안선으로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우리나라의 서해안 특성상 인천이 수도와 가장 가까운 항구임에도 이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항만시설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대두었고 그렇게 인천항에는 갑문을 만들기로 한다. 갑문의 영어명은 Lock Gate. 즉 '닫는 문'이다. 항만에 갑문을 설치해두어 썰물일 때 바닷물을 충분히 받아놓았다가 밀물 시간대가 되면 갑문의 문을 닫아버려 바닷물을 가둬둗는 것이다. 이렇게 조수간만이 차를 해결한 이후였던 1906년이 되어서야 인천항은 본격적인 대규모 항만 업무를 감당할 수 있었다. 


이후로 지금까지 정말 많은 기업의 공장들이 들어섰다. 월미바다열차를 타고 인천항을 지나치면 부두에 즐비한 수많은 기업들의 공장과 제반 시설들을 목격할 수 있다. 부두에서 가장 인상적인 광경은 사일로 벽화다. 책을 그려놓은 벽화가 수놓인 저 벽화는 원통형 곡물저장고다. 단순히 원통형 곡물저장고만 놓여 있으면 얼마나 부두의 풍경이 건조하겠는가. 저렇게 벽화를 그려두어 부두 풍경이 조금이나마 동화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다. 해설사분의 설명을 들어보니 사일로 벽화는 기네스북에 기재된 세계에서 가장 큰 외벽 벽화라고 한다. 전문가 22명이 약100일 동안 86만5400L의 페인트를 사용했다고 하니 입이 떡 벌어지더라.



월미바다열차를 한 바퀴 다 도는데 약 40분이 소요된다. 중간중간 정차역이 있어서 승하차를 할 수 있지만 기왕 탄다고 하면 꼭 첫 승강장인 월미바다역에서 출발해 월미바다역으로 돌아오기를 추천한다. 두번째날의 여행을 아주 알차게 시작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한국이민사박물관 - 인천에서 떠나는 조선인들

월미바다열차를 타면 중간쯤 지나칠 때, 그러니까 월미도의 가장 안쪽을 지나칠 때 한국이만사박물관을 소개받는다. 한국이민사박물관은 20세기 초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우리 조선이라는, 혹은 대한제국이라는 나라를 떠나 해외로 이주를 떠났던 이민자들을 조명하는 박물관이다. 


1902년 12월 한국 역사상 최초로 해외로 이민을 떠나기 위해 조선인들이 탑승한 배가 인천항에서 출항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하와이. 인천에서 하와이로 바로 갈 수 있는 배는 따로 없었기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서 나가사키를 경유해 하와이로 가던 이민선 '갤릭호'를 탑승해야만 했다. 하와이 이민을 원하는 이민자들은 우선 나가사키항에서 신체검사를 받았고, 검사를 통과한 102명이 1903년 1월 갤릭호를 탑승해 하와이로 향했다. 한국 최초의 이민자들이 하와이로 목적지를 정한 것은 하와이의 신흥산업이었던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인들이 하와이 노동자로 이민을 떠나기 전에는 광둥성 출신의 중국인들이 대거 하와이로 가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취직하였다. 하지만 유입해오는 중국인들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고 이로 인해 현지인들이 실직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곳곳에서 시위가 터졌고, 결국 중국인이민금지법이 입안될 정도였다. 중국인의 빈자리는 일본인들이 채웠지만 일본인들은 노동강도가 높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를 기피하였으며, 다시 노동자의 수가 부족하자 조선에 요청하여 조선인 노동자를 불러모았던 것이다. 조선에선 하와이 이민 모집 광고가 이루어졌고 가난했던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하와이에는 65개의 사탕수수 농장이 있었다고 하며, 이후 지속적으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취직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하와이로 이주하였고, 1905년까지 무려 56회에 걸쳐 7000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하와이에 정착했다. 노동자로 취업했다고는 하지만 하루 근무시간이 16시간이었으며, 백인 직원들의 감시 하에 거의 노예나 다름 없는 열악한 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려야만 했다. 당시의 이민자들은 오로지 노동으로 돈을 번다는 목적으로 고향을 떠나왔기에 대다수가 남성들이었고, 시간이 지나며 남초 현상이 심각해졌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없으니 말이다! 결혼과 가정이 당연시되던 당대 사회적 분위기에서 결혼을 하지 못한다면 구태여 하와이에 있을 수가 없었고, 동양인 남성들이 서양인 여성들과 결혼하는 일은 극히 드무니 (아니, 애당초 미국인과 동양인의 결혼은 불법이었다.) 조선에서 결혼할 여성들을 하와이로 모집해서 불러와야만 했다. 하와이 당국에서조차 노동자 확보를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을 혼인시킬 조선인 여성들의 필요성을 느끼곤 조선에서 중매쟁이들을 고용하거나 선교사들을 활용했다. 중매쟁이들은 미혼 여성들을 상대로 하와이는 조선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살기 좋은 기후이며, 남성들도 돈을 잘 벌고 있기에 가서 결혼만 한다면 가난을 면할 수 있다고, 하와이에 사는 남성들은 조선의 남성들과 달리 가부장적이지 않다고 과장홍보를 한 덕에 많은 지원자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무하고 결혼할 수는 없으니, 중매쟁이들이 하와이에 있던 남성과 조선에 있던 여성들의 사진을 교환하여 서로에게 보여주고는 각자의 짝을 고르게 해주었다.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하와이의 남성이든 조선의 여성이든 가장 잘 나온 사진을 보내기 위해 일부러 젊었을 적 사진을 고르거나 남의 사진을 도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이렇게 짝이 지어지면 조선의 여성들이 하와이로 넘어가 남편을 찾았는데, 이런 여성들을 '사진 신부(Picture Brides)'라고도 부른다.

 (사진신부의 첫 시작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당국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지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1910년 첫 조선인 여성들이 그녀들의 남편을 찾으러 인천항을 출항한 이래 1924년 미국 내에서 미국인과 동양인의 결혼을 불법화 하던 법안이 폐기되면서 사진신부의 관례도 끝이 나버린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약 600~1000여 명의 사진신부들이 하와이로 들어왔다.



하와이로 넘어오는 조선인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어느새 하와이에선 한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한인 커뮤니티가 생길 때쯤이면 그들의 고향은 이미 일제에게 빼앗긴 시점이었다. 하와이에 일찍이 한인들이 들어와 커뮤니티를 일구어놓았던 만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던 독립운동가들이 하와이를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삼기도 하였다. 하와이에 기지를 둔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는 대한인국민회였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부

본디 하와이에는 일제강점기 이전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선교사, 유학생들이 들어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들의 가정과 함께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한 바 있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도 조선인들의 민족단체들이 있었는데, 1909년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에 있던 단체를 하나로 합치기로 하였고, 1910년 끝끝내 대한제국의 주권을 빼앗기며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통합단체의 이름을 '대한인국민회'로 정하였다. 대한인국민회의 본부는 샌프란시스코에, 하와이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부였다. 대한인국민회의 총회장은 안창호였고, 하와이 지부는 박용만과 이승만이 이끌었다.  박용만은 일제와의 전쟁을 주장하며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부를 일종의 군부대로 조직하려 했다. 반면 이승만은 외교를 중심에 둔 독립운동을 주장했다.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부를 사실상 창설한 사람은 박용만이었고, 이승만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하와이로 넘어온 경우였기에 두 사람 사이에 의견이 충돌하였다. 두 사람의 노선 대립은 이승만의 승리로 끝났다. 이승만은 하와이 지방총회를 장악했고, 박용만은 지지자들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나와 1918년~1919년 대조선독립단을 별도로 조직했다.


1919년 3.1운동의 불길은 하와이에까지 미쳤다. 하와이에서도 한인 커뮤니티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에 나섰고, 이후 한인 커뮤니티는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들을 규합해 십시일반 모금활동을 하며 그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나 대한인국민회를 포함한 독립운동단체에 후원해주기도 하였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국제연맹 청원 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의 뭇매를 맞자 이승만이 장악하고 있던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부는 총회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었고, 이승만은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부를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재편하였다.


해외 농장의 노동자로 취업하기 위해 인천을 떠난 이민자들이 정착한 곳은 하와이 말고 한 국가가 더 있었다. 바로 멕시코였다. 멕시코에서는 여러 생활용품에 쓰이는 용설란의 한 품종 '헤네켄'을 대규모로 재배하였는데, 하와이에는 사탕수수 농장에 취업했다면 멕시코에서는 이 헤네켄 농장에 취업하였다. 멕시코에 정착해 헤네켄 농장에서 일한 우리 한국인 노동자들을 '헤네켄'에서 따와 '애니깽'이라고 불렀다. 1905년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에 정착해 애니깽이 되었다. 애니깽 노동조건 역시 열악하기 그지 없었으며 거의 반노예 수준이나 다름없었다. 채찍질을 맞아가며 몇 푼 안 되는 돈을 모으고 애초 약속되었던 근무시간을 훨씬 초과하기 일쑤였다. 그나마 계약기간이 존재해서 계약기간만 끝나면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품었으나, 계약기간이 끝날 때쯤엔 우리의 국가가 사라진 상태여서 그들의 여권도 효력이 정지되어버렸다. 어떻게든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도 있지만 멕시코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 편이 일반적이었다. 헤네켄 재배는 멕시코뿐 아니라 쿠바에서도 대규모로 시행되었기에 멕시코에서 조선인 노동자 확보 사업이 선행되자 1921년부터는 쿠바로도 이민을 가 애니깽 노동자가 되었다. 멕시코와 쿠바에도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설치되었고, 멕시코와 쿠바의 애니깽들도 얼마 되지 않은 돈들을 모금해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주기도 하였다.


사탕수수 노동자와 에네켄에게 쓰였던 채찍


재외동포. 나에겐 가까운 거리에 재외동포가 없어서 '재외동포'란 말이 멀게만 느껴지는 친숙하지 않은 개념이다. 하지만 재외동포들이 우리의 역사에 지대한 흔적을 남긴 만큼 현재의 우리도 알게 모르게 그들이 만들어 준 역사 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다. 한국을 떠난 이민자들이고, 새로운 국가에 정착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문화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었기에 오늘날의 한국 문화도 조금이나마 풍성할 수 있는 것이다.



월미도의 인천상륙작전

유원지로서 월미도의 역사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는 수도 경성과 가까운 인천의 월미도를 유원지로 개발하기로 하였고, 해수욕장이나 월미조탕 같은 온천 등 각종 위락시설들이 지어졌다. 월미도의 유원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상류층들이 찾는, 식민지 조선 내 최대 규모의 유원지였다. 본디 월미도는 육지인 인천과 이어진 육계도였다. 즉 썰물 때는 육로로 월미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제가 월미도를 유원지로 개발하면서 1km 제방을 쌓아 상설도로를 만들기까지 했다. 유원지로서 가장 역사가 깊은 건 월미도이기 때문에 월미도가 다소 쇠잔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유원지 시절의 월미도 해수욕장

그러나 이런 유원지로서 월미도가 일시적으로 중단된 시기가 있었다. 일제가 만들어놓았던 그 화려한 위락시설들이 한순간에 파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갯집들이 즐비한 월미문화거리 입구에는 큼지막한 표지석이 있지만, 표지석의 회백색과 검푸른 바닷물의 색깔이 같은 색감으로 어우러져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놀러 온 관광객들 중 이 표지석을 유심히 관람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한 곳이 일어난 현장인데도 말이다. 월미도는 6.25한국전쟁 다시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던 인천상륙작전의 상륙지점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고집으로 진행되었다. 현 전선이 모든 대한민국의 영토를 북한에게 상실하고 오로지 낙동강 전선만이 남아 있을 때, 다른 참모진들은 지금 낙동강 전선도 어떻게 될 지 모르는 마당에 준비시간도 너무 많이 걸리는데다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병력들을 많이 빼가면 정작 가장 중요한 낙동강 전선이 뚫릴 수 있다는 위험성이 제기되면서 인천상륙작전은 폐기되나 싶듯 했다. 미국 본국에서도 인천상륙작전의 위험성을 감지하고 차라리 다른 지역에서 상륙작전을 제안했으나, 맥아더의 결심은 확고했다. 맥아더의 모든 제장 지휘참모진들과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인천 상륙에 성공할 확률이 현격히 적어서 상륙지점이 인천인 것에 대해 반대했다. 상륙작전을 감행하려면 해수욕장, 즉 모래사장이 필요하다. 그러나 인천을 비롯한 서해안은 조수간만의 차가 지나치게 커서 자칫하면 갯벌에 배들이 전부 빠져버려서 기동불가 상태가 되어버릴 수 있다. 해안선도 복잡하고 인천 앞에는 월미도 섬 때문에 작전함들의 기동에도 매우 불편했다. 설령 상륙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인천의 해안가는 방어하기가 굉장히 좋은 지형이기에 북한인민군이 죽자고 방어에 달려들면 작전에 실패할 수도 있었다. 참모진과 합동참모본부에서  모든 가능성을 따져서 계산해보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1이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나온 상륙지점들이 군산, 평택, 평양 바로 밑의 남포였다. 맥아더는 오로지 인천만 고집했고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결국 맥아더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상륙작전 작전 문서

작전명 Operation Chromite, 일명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다만 제장 참모들과 미 합참은 충분한 준비 시간을 위해 10월을 제안했지만, 맥아더는 확실한 기습 효과를 거두기 위해 9월로 날짜를 정했다. 작전이 최종수립된 시점이 8월이었으니 겨우 한 달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작전날짜는 9월 15일. 인천에 성공적으로 상륙하기 위해선 북한군의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닌게 아니라 북한 참모진과 중국공산당 측에서도 분명 UN군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고 거의 확신에 차고 있었다. 다만 어디에 상륙할지를 두고 고민을 했는데 일부 장교들은 인천을 정확하게 예측하기도 했다. UN군은 북한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해안가를 따라 서해안-동해안 등지에 공습을 계속 퍼붓고, 군산, 삼척, 영덕의 장사리, 함경남도 신포 등지에 9월 초부터 일부 부대들을 계속 파병시켰다. 그럼에도 북한군은 인천 방어에 소홀히 하진 않았다. 중국과 북한참모진은 인천이 UN군의 상륙지점으로 유력한 곳 중 하나라고 손꼽았고, 인천을 포함한 상륙가능성이 있는 곳들에 방어를 강화해놓고 있었다. 이렇게 어려운 작전이 성공하려면 적군의 뻘짓도 좀 받쳐줘야 하는 법이다. UN군과 한국군은 기자회견을 통해 모든 사력을 다 해 낙동강을 넘어 북한군과 싸울 것이라는 거짓정보를 흘렸고, 여기에 속아 넘어간 김일성은 상륙지점에 강화된 방어병력을 최소한만 놔두고 전부 낙동강 전선에 투입시키면서 인천의 방어력이 상당히 낮아졌다.


완전한 작전성공을 위해선 북한군의 방어현황을 면밀히 파악해야만 했다. UN군은 미 해군 특공대원들을 인천에 잠입시켜서 갖가지 방어시설, 포대 현황, 병력 및 장비 등을 모조리 조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천을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그만 북한군에게 발각이 되어버렸다. 9월 14일 특공대 소속이었던 한국인 임병래 중위가 북한군과 교전하며 시간을 번 사이 나머지 대원들은 무사히 인천을 빠져나가 맥아더에게 정보들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단 시간을 끈 임병래 중위는 빠져나가질 못하고 체포되기 직전 자결했다. 이 이야기가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내용이며, 영화에서는 이정재 배우가 임병래 중위 역할을 맡았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뒤 9월 14일 미군 해병대를 포함한 UN군 해병대, 그리고 한국군 해병대 도합 260정의 상륙정들이 일본과 동중국해를 출발해 인천으로 향했다. 현장사령관은 미 제10군단의 군단장이었던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 14일 저녁 즈음에 인천 앞바다에 서서히 도착하자 이를 포착한 인천의 북한군이 본부에 UN 상륙정이 보인다고 보고를 하지만 이미 거의 모든 병력이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상황에서 북한군이 인천으로 지원하러 간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UN군은 인천 앞바다의 기뢰들을 제거할 수 있었다.

 


팔미도 등대 모형

15일 0시 05분 첩보부대가 인천 앞바다 팔미도 등대에 불을 등화했고, 새벽 5시부터 7시 사이에 월미도 상륙을 감행했다. 인천의 해안선에는 월미도가 뾰족 튀어나와있기 때문에 월미도를 먼저 제압하지 않으면 인천의 다른 상륙지점에 상륙해도 포위되어 양쪽에서 포격을 받을 수가 있다. 본격적인 상륙에 앞서 월미도에 함포 사격 및 폭격기들의 공습이 선행되었다. 월미도는 일제강점기에 큰 유원지였기에 UN군은 월미도에 민간인들이 없을 거라 판단해서 주저없이 약 1000여 발의 폭격을 퍼부었다. 하지만 예부터 월미도에는 일부 민가들이 구석 한 켠에 존재하고 있었다. 월미도의 민간인 100여 명이 미군 폭격기들의 폭격에 희생되는 안타까운 사건도 있었다.


9월 15일 오전 밀물 시간에 맞추어 월미도에 상륙작전을 개시했다. 상륙지점의 이름은 '그린비치'. 월미도의 '월미문화의 거리'에 표지판이 있는 그 자리다. 월미도 그린비치에는 미 해병 1시단 5연대의 3대대가 상륙을 맡았다. 15일 약 06:15까지 무차별적인 함포와 함재기들의 지원포격이 이어지다가 06:30분에 맞추어 5연대가 큰 어려움 없이 그린비치에 상륙했다. 5연대는 두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월미산을, 나머지 한 부대는 인천 내륙으로 이어지는 제방의 입구를 장악했다. 미군은 전차부대를 앞세워 참호와 벙커에서 항전하던 북한군을 깔아뭉개버렸다. 오전 08:00까지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 정오까지 북한군 잔당들마저 소탕했다. 미군엔 부상자만 있었을 뿐 전사자는 없었다. 


월미도와 인천 시내를 잇는 제방


오후 썰물 때는 대기하다가 저녁 밀물 시간에 맞추어 인천상륙작전의 두 번째 상륙지점 '레드비치' 상륙이 진행됐다. 레드비치는 인천역 부근으로, 오늘날에는 대한제분 공장이 자리한 위치였다. '레드비치'는 인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사실상 인천상륙작전의 메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요성만큼 중장비를 실은 LST 전차상륙함들이 대거 동원되었다. '레드비치' 상륙은 미 해병 1시단 5연대의 1대대와 2대대가 맡았다. 이번엔 미 해병뿐 아니라 우리 국군의 해병대도 투입되었다. 저녁 17:30부터 상륙작전이 감행됐다. 인천 시내로 들어갈 수 있는 상륙지점인 만큼 '레드비치'에서는 북한군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고 자정이 되면, 어제 여행을 다녀온 인천개항장거리-제물포 구락부-자유 공원까지 UN군이 장악했다.


레드비치 상륙 당시 사진과 모형 조각
LST 전차상륙함


레드비치 상륙과 동시에 인천상륙작전의 세 번째 상륙지점 '블루비치' 상륙도 진행됐다. 블루비치는 지금의 신포역과 인하대학교가 위치한 곳으로 메인 상륙지점이었던 레드비치에서 들어오는 UN군을 측면에서 지원해주는 역할을 맡았으며, 작전은 미 해병 1연대와 한국 해병대가 담당했다. 블루비치는 워낙 갯벌이 넓었던지라 중장비나 큰 규모의 상륙함들이 접안하지 못해서 경장비를 실은 LVT 상륙장갑차가 접근했다. 블루비치에서 북한군의 저항이 거의 없다시피했지만 갯벌이 워낙 넓었던지라 상륙 자체가 쉽지만은 않았다. 이로써 16일 자정을 넘어가며 5000분의 1이란 확률을 뚫고 인천상륙작전은 대성공하였다.


16일 오전부터 미군은 김포-서울로 진격하였고, 국군 해병 1연대가 투입되어 시가지 소탕에 나섰다. 인천상륙작전부터 시가지 소탕에 이어 이후 서울 시내 진입까지 '한국 해병의 아버지'라 불리는 한국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직접 소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는 놀라운 용맹함을 보이기도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바뀌었고, 9월 27일 서울의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며 서울을 탈환하였다.


월미도에서부터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차로 20분 거리에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 있다. 월미도에서 인천상륙작전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면, 기념관에서는 각종 전시물로 조금 더 생생하게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니 시간이 남는다면 꼭 방문하기를 추천한다.


1950년 당시의 인천 위성사진과 오늘날의 인천 위성사진



동인천에서 여행의 마무리를

인천여행의 시작은 인천역에서, 인천여행의 끝은 동인천역에서 마무리한다. 월미도에서 나와 동인천으로 가는 중에 신포국제시장을 지나칠 수가 있다. 1883년 항구의 문을 연 이래 워낙 많은 외국인들이 인천을 드나들다보니 약 100여년 전부터 신포 지역에 해외의 잡화들을 사고 파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신포국제시장까지 이어졌다. 신포국제시장은 인천사 최초의 근대상설시장이다. 첫 시작은 중국인들이 채소를 내다 판 청과점에서 시작했지만 점차 시장의 규모가 커지며 다양한 외국산 물품들을 팔거나 외국인들을 상대로 조선의 특산물들을 팔았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신포시장은 폭격을 맞아 초토화되었지만 전후 정부 주도로 신포국제시장이 다시 들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신포국제시장의 명물이라 함은 역시 닭강정 혹은 만두다. 일제강점기 때 신포시장에선 닭 혹은 꿩고리를 팔았다고 하는데 그 맥이 이어졌는지 1985년 개업한 신포닭강정이 명성을 알리며 신포국제시장의 상징으로 남았다. 신포닭강정 앞에는 언제나 긴 줄이 끊이질 않는다. 두번째는 이제는 전국적으로 체인화된 신포우리만두다. 만두와 비빔국수, 쫄면을 같이 먹는 메뉴로 사업에 대박친 신포우리만두는 처음엔 아주 작은 만두가게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확실하진 않으나 쫄면이 1970년대 인천에서 탄생했다는 설이 있다. 점심으로는 신포우리만두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신포닭강정은 기념품으로 사고는 든든하게 동인천 역으로 향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신포국제시장에서 동인천 역까지 가는 사이에 한 군데 들러야 하는 곳이 또 있다. 인천은 우리를 쉽게 놔주지 않는다. 인천의 또다른 근대유산인 '답동성당'이다. 1889년 프랑스의 빌렘 신부가 인천의 답동 한 언덕에 작은 성당을 차린 것이 답동성당의 시작이었다. 이후 1897년과 1937년 두 차례에 걸쳐 증축 보수 작업을 통해 현재의 우람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 근대공법으로 세워진 성당들이 대게 기품이 넘쳐 흐르기 마련이지만 인천의 답동성당은 어딘가 더 고급스럽고 교양을 갖춘 의젓함이 있다. 스스로 꾸미는 법을 알게 된 모범생 같은 멋이랄까. 적색 벽돌이 오히려 날카롭고 차갑운 시크함을, 푸르고 회백색의 돔들은 또 애교스럽지만 어른스러운 경건함을 갖추고 있다. 건물의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흰색 장식들은 속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아한 장식성을 자랑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 무렵 찾았는데, 성당 내부의 은은한 불빛들이 켜지더니 더없이 신성해지더라.






인천항의 옛 이름은 제물포항이었다. 조선시대부터 수도로 들어가기 위해 각종 선박들이 정박하였던 이 항구는 1883년 근대적 항구로 개항한 뒤, 1899년 수도 한양과 인천을 연결한 경인선 철도가 깔리며 수도에서 가장 가까운 최대 항구도시로 발돋움했다.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인천에서는 현대사 속 굵직굵직한 사건들의 무대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거대한 항구에서 그간 수많은 사람들이 떠났고, 다시 돌아왔고, 혹은 첫 발걸음을 딛기도 하였다. 우리 한국인이 나가 타지의 생경한 환경에 고생을 치르기도 했으며, 반대로 외국인이 한국으로 들어와 적응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건 크나큰 오산이다. 하나의 거대한 줄기는 있을지언정 3000천년 역사가 흐르며 복잡다단한 민족성의 총체성이 현재의 한국을 낳았다. 이는 다른 외국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지구촌 세계사를 만들어낸 건 여러 민족들의 교류와 왕래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인간은 나와 다른 모습을 한 다른 인간을 보면 거리감을 두는 사회적 관성이라는 것이 있다. 이상할 건 없다. 내가 봤을 땐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능이다. 동시에 새로움을 만나 다른 모습을 탄생시키겠다는 모험심 또한 인간의 본능이다. 인간의 사회는 그간의 역사처럼 끊임없는 운동에너지를 받아들여야 더 좋은 모습을 나아갈 것이다. 


동인천 역 근방의 고서점 '한미서점'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김영하 <검은 꽃>

1905년 조선의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의 에네켄 농장으로 떠난 에네켄 노동자들의 애환을 다룬 소설입니다. 취업사기나 다름없었던 홍보에 넘어가거나, 당대 한국의 격랑의 역사에 휩쓸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국을 떠나야 했던 군상들의 다방면에서 조명하고 있습니다. 멕시코로 가는 여정, 덥디 더운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 감독관들의 착취, 그리고 계약기간이 끝나 이제서야 해방되나 싶었지만 그들도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멕시코 혁명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격변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인물들의 비극적 피투성을 다루고 있죠. 건조하고 사실적인 문체이지만 그 안에 뜨거운 무언가가 전달되는 김영하 작가님 특유의 개성넘치는 문체가 아주 매력적입니다. 인물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소설의 창작이지만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실화일 수 있는 비장미 가득한 소설입니다. 김영하 작가님의 대표작이며, 언제나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한국의 현대소설 리스트에 거론되는 작품이죠.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윤여정 배우님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큰 화제를 모았던 영화입니다. 비록 배우들이 전부 한국 배우들이고, 감독도 한국인처럼 보이지만 정이삭 감독은 엄밀히 말하면 미국 교포이며, 영화제작은 브래드 피트가 담당한 해외영화랍니다. 최근 몇 년 부쩍 이민 2세대들의 개인적 이야기를 다룬 한국영화들이 많이 발표됐습니다. <미나리>부터 <라이스보이 슬립스>, <리턴 투 서울>, <패스트 라이브즈> 등등 말입니다. 모두 소개해드리고 싶지만 그나마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미나리>를 인천 여행에 맞추어 추천드립니다. <미나리>는 미국 이민의 붐이 일었던 1980년대, 미국 땅에 정착해보려는 한국인 가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영화 제목 미나리는 타지에 정착하려는 한국인, 의미를 더 확장시킨다면 외지인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집과 가족의 정의에 대해 질문합니다. '집'이라 함은 '물리적인 공간'이 먼저일까요 '가족 그 자체'가 먼저일까요? 꿋꿋하게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이민가족들의 끈끈함을 노래하는 목가 같은 영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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