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시작을 여행하다
고려의 왕씨 왕실을 몰아내고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잔재에서 벗어나고자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도를 강행했다. 평생을 전장을 누비며 전국을 돌아본 태조 이성계는 지금의 충남 계룡을 새로운 수도의 후보지로 점찍었다. 비록 최종적으로 정도전과 하륜의 결정에 따라 지금의 서울인 '한양'이 새로운 수도로 결정되었지만, (하륜은 지금의 신촌 일대를, 정도전은 지금의 종로를 주장했고 정도전의 제안이 채택되었다) 태조 이성계가 가장 먼저 새로우 수도의 후보지로 거론할 만큼 충남 계룡은 지리적으로 이점이 많은 곳이었다. 서울에 비할 바겠지만 계룡은 한반도 가운데에 위치하여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국방 면에서 유리하고, 또한 나름 전라도와 경상도로 이동할 수 있는 길들도 있는 편이었다. 또한 평야도 넓직하여 다양한 시설과 기관들을 위한 부지도 마련되어 있다.
이런 길지들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떤 식으로라도 쓰이기 마련! 계룡시의 또 다른 장점은 산으로 둘러싸여 기밀 유지도 가능한 편이라 군사시설이 들어서기에 제격인 곳이다. 1989년 노태우 정부 당시 육군, 해군, 공군의 모든 본부들이 계룡에 모여들었다. 이로써 계룡시는 삼군본부가 모두 모인 군사의 도시가 되었다. 처음 계룡의 중요성을 인지한 태조 이성계도 원래 군인이었다는 역사의 우연이 참 공교롭다. 대한민국 국군은 창설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곡절을 거쳐야만 했다. 나라를 빼앗겨 군대의 근대화를 자력으로 이루지 못한 상태에서 해방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곧바로 6.25 전쟁이 터졌다. 다만 일제강점기에서 해방과 6.25 전쟁까지는 우리 국군의 창설과 성장에 위기이자 기회이기도 했다.
이번 계룡 여행에서는 육군, 해군, 공군 삼군의 창설역사를 돌이켜보며 매년 9월~10월에 열리는 계룡軍문화축제를 방문해보기로 한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38선 이남에선 임시적으로 미군정이 들어섰다. 해방 전후로 한반도에는 사설 군사단체들이 수도 없이 난립하고 있었다. 미군은 중구난방의 사설군사단체들을 다 통합할 목적으로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군사영어학교를 임관한 자만이 정식 장교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한반도 내 치안유지를 위해 1946년 1월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한 것이 오늘날 국군의 모태다. 계급명칭은 과거 대한제국군 명칭을 그대로 따랐으나 곧 오늘날의 계급명칭으로 바꾸었다. 병사들에 대해선 모병을 시작했다. 미군정 시기 우리는 워낙 극심한 경제난을 겪고 있던 터라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자원입대하는 수가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조선국방경비대는 처음엔 연대 단위로 전국 주요 도시에 9개의 연대를 설치했다. 제1~9연대까지 각각 서울, 대전, 익산 이리, 광주, 부산, 대구, 청주, 춘천, 제주에 주둔하였다. 점점 군사교육을 받은 장교들이 임관하고 자원입대하는 수는 늘어나고 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자 국방경비대는 연대 단위 부대들을 더 추가하기로 한다. 그렇게 강릉에 제10연대를, 수원에 제11연대를, 군산에 제12연대를, 아산 온양에 제13연대를, 여수에 제14연대를, 마산에 제15연대를 설치했다.
다만 인력의 문제와 장비의 문제가 많아서 조선국방경비대의 보병사단은 포병 무기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소총부대나 다름없었다. 더 큰 문제는 조직력의 문제였다. 조선국방경비대에 김구의 임시정부 산하군인 한국광복군이 합류를 했지만 그 수는 매우 미미했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관동군, 만주군 소속의 병사들도 합류했다. 만주군이란 일본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군대였고,관동군은 중일전쟁 때 일본이 만주에 주둔시켰던 일본군이었다. 즉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광복군 병사들은 한때 독립군을 토벌하던 쪽의 병사 및 장교들과 같은 군에 소속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조선국방경비대 내부에서는 광복군 출신이냐 일본군 출신이냐를 두고 파벌이 생기고 갈등이 심했다. 또 그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일제시기 중국공산당의 군대 중 하나인 팔로군 출신들, 또 남로당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사상적인 갈등도 공존했다. 끝내 1947년 10월 19일 여수, 순천에서 제14연대가 남로당의 스파이들에 의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된 광주의 제4연대에서도 반란군에 합류하는 일이 벌어지자, 이후 국군에서는 "4"라는 숫자를 쓰지 않기로 하였다.
1948년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기존의 조선국방경비대는 오늘날의 국군으로 발족했다.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된 이후 처음으로 창설된 우리나라 정부의 우리 군대였다. 국군은 육·해·공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기존의 군사영어학교도 육군사관학교로 개편하였다. 기존의 각 지역을 담당하던 연대들도 사단 단위로 확장되었다. 제1사단은 개성을, 제2사단은 대전을, 제3사단은 부산을, 제5사단은 광주를, 제6사단은 춘천과 원주를, 제7사단은 동두천을, 제8사단은 강릉과 주문진을, 제9사단은 서울을 담당하였다. 그 외에도 기존 수도경비사령부가 수도사단으로 확장되어 정부 수립~6.25전쟁 발발 사이에 대한민국의 국군은 총 9개의 사단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수도사단은 현재 수도기계화보병사단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6.25전쟁 개전 당시 기준 육군은 약 9만 5천 명이었다. 더불어 보유하고 있던 군장비는 장갑차 27대가 전부였다.
다만 육군은 6.25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탈바꿈하였다.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아 여러 패전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실전경험과 미군으로부터 받은 무기와 장비들을 익히며 3년간의 전쟁을 통해 정예화되었다. 미군을 포함한 UN군의 다른 국가의 군도 한국군의 성장세를 보고 감탄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개전 초기부터 육군 사단을 20개까지 늘릴 계획을 가지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9사단, 제12사단, 제15사단을 창설했다. (10, 14라는 숫자는 군대에서 쓰지 않는 숫자이며, 13은 서양권에서 쓰지 않는 숫자이다) 전쟁이 끝난 시점의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우리 국군을 일컬어 전쟁 이전에 비해 “완전히 다른 군대”라고 자부했다. 육군사관학교 자료에서는 한국전쟁을 통한 육군의 발전에 대해 “비록 육군의 변화가 미군 주도로 진행되었고, 당시 미 육군의 모습을 모방한 결과라고도 설명할 수 있지만, 대한민국 육군의 입장에서 고찰하면 이러한 변화는 ‘군사변혁’의 모습이었다. 우리 군에게는 새로운 무기체계인 전차와 포병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의 개편과 더불어 작전수행 개념도 화력과 기동의 통합전투력을 발휘하는 군대로 변화되었으며, 이를 이끌어 갈 장교단에서도 획기적인 체질 개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대한민국 육군은 경비대에서 진정한 군대로 탈바꿈하였던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해체-통합 등 여러 번의 사단 편제 개편을 거쳐 보병사단 13개, 기계화/기동사단 3개, 신속대응사단 1개, 동원사단 5개 총 34개의 사단을 보유하고 있다.
1946년 1월 미군정이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할 때 그 예하부대로 바다를 담당하는 조선해양경비대를 두었다. 조선해양경비대의 책임자는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손원일 제독이었다. 손원일 제독은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를 중국 상하이에서 10대 시절을 보냈는데, 상하이에 있던 세계의 여러 해군과 군함들을 보고 바다를 동경했다고 한다. 손원일 제독은 난징중앙대학교 항해과를 졸업한 후 항해사로서 바다인생을 시작했다.독일에서도 오래도록 일하면서 항해사로서의 실력과 명성을 쌓았다. 상하이로 돌아온 후에는 식료품 사업을 했으나, 손원일 제독은 바다로 나갈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었으며 해방이 되자 귀국 후 사업으로 벌어드린 돈을 투자해서 1945년 11월 해방병단을 조직하였다. 미군정이 조선국방경비대 예하로 조선해양경비대를 둘 때 손원일 제독의 해방병단을 통합시켰고, 손원일 제독을 조선해안경비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감투는 받았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이제 막 독립한 나라에 배가 없는 것이다. 손원일 제독은 투자와 지원을 어떻게든 얻어내 조함창을 만들고, 훗날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이 되는 해군병학교를 설립했으며, 주요 항구도시에 초보적이나마 기지의 부지를 마련하는 등 해군 조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손원일 제독은 조선해안경비대의 본부를 진해에 두고 해안경비 및 훈련에 나섰지만 이때 조선해안경비대가 탔던 배는 경비정 정도이지 군함은 아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수립되면서 조선국방경비대는 국군 육군으로 개편, 예하부대였던 조선해양경비대는 대한민국 국군 해군으로 독립하였다. 해군병학교는 1949년 해군사관학교가 되었으며, 손원일 제독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에 임명됐다. 1949년 9월 손원일 제독이 나서 대한민국 해군이 처음으로 구입한 군함이 ‘PC-701 백두산함’이라는 600톤급 구잠함이었다. (구잠함은 잠수함을 탐지해서 대적하는 대잠함정을 말한다.) 비록 수준급의 성능을 자랑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장교, 병조장들, 하사관들, 수병들이 월급의 일부를, 해군부인회의 바자회사업과 일반 국민들의 성금으로 마련한 돈으로 구입한, 우리나라가 최초로 구입한 전투함이었다는 점에서 값진 군함이었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은 과연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집안답게 일본군 출신들은 해군에 거의 등용하지 않았다. 손원일 제독은 더 많은 전투함들을 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해 해외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6.25전쟁 개전 당시 기준 대한민국 해군은 해병대 포함해 6900명 정도, 대한민국의 해군기지로는 목포·묵호·부산·인천·군산·포항·진해 등 총 7군데가 있었다. 하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손원일 제독은 군함 구매 차 해외를 방문 중이라 부재했다. 급하게 귀국한 손원일 제독은 곧바로 인천상륙작전 준비에 돌입했다. 비록 인천상륙작전은 미군의 주도로 진행되었지만 PC-702 금강산함을 포함해 15척의 한국함정도 작전에 투입됐다. 원래 한국 해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는데, 손원일 제독이 맥아더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이 기념비적인 작전에 한국 해군도 참여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손원일 제독은 해군참모총장임에도 불구하고 소총을 들고 직접 전장에서 병사들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서울 수복 후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는 포고문을 처음 발표한 사람도 손원일 제독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육군의 북진과 더불어 해군도 맞춰 북진했고 장진, 원산, 진남포 등에 해군전진기지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손원일 제독은 계속 대한민국에 필요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증강하며 해군력 강화에 일조하였다. 손원일 제독은 진해기지를 대한민국 해군의 함대사령부로 삼고, 무상으로 UN으로부터 초계함 등 지원을 받으면서 더 많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함정들이 점점 더 늘었다. 조함창을 더 크게 개편하였으며 고작 전쟁 1~2년만에 전투함 한 정 없던 대한민국 해군이 눈부시게 빠른 발전을 이루었다. 전쟁 전에 600톤 백두산함 하나로 크게 기뻐하던 해군이었건만 전쟁 도중 한국 해군이 보인 놀라운 성과에 감동한 UN군 기동부대 사령관 조지 다이어 제독이 PF급 호위함을 추가 양도해주기로 하면서 1952년이 되면 2300톤급에 달하는 PF 호위함을 한국 해군이 무려 5척이나 보유하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도 한국 해군은 발전을 멈추지 않아 동해의 제1함대, 서해의 제2함대, 남해의 제3함대까지 확장시켰으며 오늘날의 대한민국 해군은 해외파병을 가서 활약을 할 정도의 강력한 해군으로 부상하였다.
해병대란 해군에 소속된 부대로, 해군과 해병대의 차이라면 해군은 바다 위에서 싸우는 부대인 반면 해병대는 상륙작전이 주된 임무인 부대이다. 전시에 가장 힘들고 위험한 작전 중 하나가 상륙작전이다. 아무리 수위가 얕은 바다에서 내린다고 하지만 물과 그리고 모래사장에서 빗발치는 적군의 포화를 뚫고 뛰어가서 적의 진지를 무력화시킨 뒤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것이 엄청난 피해가 수반되는 작전이기에 난이도가 상당히 높으며, 따라서 해병대는 정예병일 수밖에 없다.
해병대는 해군 소속이기에 해군 창설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이 1948년 기존의 조선해양경비대를 대한민국 해군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에서 일본군 출신들을 해군에 거의 등용하지 않았다. 광복군 출신의 병사들은 그렇게 많지도 않고 해군에 대한 이해도도 거의 없었으나 손원일 제독은 차라리 새로 교육시키고 인재를 양성하는 쪽을 택했고, 대한민국 해군의 창설멤버들과 장교들 중엔 관동군과 일본군 출신들의 거의 없었다. 기존 조선해양경비대에는 관동군 및 일본군 출신의 해군들이 있었고, 손원일 제독이 관동군과 일본군을 노골적으로 배제하면서 해군을 창설하자 나머지 관동군과 일본군 출신의 장교들끼리 모여 주축이 되어 해병대 창설을 주도하였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 때 미군 해병대가 진압에 투입되었는데 미군 해병대를 유심히 봤던 만주군 간도특설대 출신의 신현준 중령이 손원일 제독에게 해병대의 필요성을 내세우며 설득해 해군이 만들어지고 이듬해 1949년 4월 대한민국 해병대가 만들어졌다. 신현준은 초대 해병대사령관이 되었고, 창설 시점의 해병대 병력은 2개 대대 규모의 400명 정도였다. 해병대 역시 비행장 격납고에 생활하면서 열악한 시설과 여의치 못한 군수 지원 등의 악조건에 놓여 있었다. 6.25전쟁 전까지는 병력을 보강함과 동시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 제주 4.3사건에 투입되며 실전경험을 쌓았다.
1950년 6월 25일 6.25전쟁의 발발 시점 기준 국군 해병대는 1200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낙동강방어선 전투 당시 국군 해병대는 통영상륙작전을 통해 경남지방에서 낙동강을 넘으려는 북한인민군을 저지시켰다. 1950년 8월 23일 최초의 퓰리처상 여성 수상자인 뉴욕 헤럴드 트리뷴지 마거리트 히긴스 기자가 통영상륙작전을 보도하면서 "한국 해병대는 악마조차도 잡을 정도였다."라는 기사를 보도했고, 여기서 ‘귀신 잡는 해병대’가 유래했다고 한다. 통영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뒤 보름 후 9월 대대 수준에 불과했던 해병대는 연대 단위로 확장하였다. 해병대 제1연대가 탄생하는 시점이었는데, 이 당시 해병대 제1연대는 오늘날 해병 제1사단의 전신이다. 해병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해병 제1연대가 조직되고 바로 투입되었던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었다. 3개의 상륙지점 중 해병대 제1연대는 레드비치 상륙지점을 담당하였고, 이후 서울 수복 때까지 작전에 투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에서부터 서울 수복까지 해병대의 공이 매우 컸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크게 기뻐했다고 하고 해병대의 어느 한 대대장의 생일에 맞추어 이승만이 직접 헬기를 타고 가서 생일케이크를 선물했을 정도로 해병대에 대한 이승만의 신뢰는 무한했다. 이후 북진에 맞추어 원산과 함흥의 상륙작전을 성공시켰고, 서울을 빼앗긴 뒤 오로지 국군 해군과 해병대만의 힘으로 제2인천상륙작전을 감행했으며, 서해5도와 강화도 부근 도서들을 점령하고 지켜내 오늘날 서해 5도가 남한의 영토가 될 수 있었다. 1951년 UN군은 국군 제1해병연대에게 강원도 양구의 도솔산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국군 제1해병연대는 미 제1해병사단에 소속되어 그간 국군 해병대는 후방을 담당하였는데, 미 해병대가 중공군의 맹공에 진군이 저지되자 후방에 있던 국군 해병대에게 도솔산 점령을 지시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도솔산도 중공군의 방어가 만만치 않았고, 국군 제1해병연대를 이끌던 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야습을 감행하기로 하였다. 효과적인 야습을 위해 국군 제1해병연대는 야간에 그 어떤 조명과 대포 사격 없이 진군하여 오로지 백병전만으로 대암산과 도솔산을 점령하였다. 도솔산 전투에 크게 감복한 이승만 대통령은 해병대에 무적해병(無敵海兵)이란 휘호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1952년 해병제1연대는 제1전투단으로 승격했고, 전쟁이 끝나고 1954년 미 해병대로부터 작전인수권을 인수받았으며, 1955년 오늘날의 해병제1사단이 되었다. 한국 해병대의 시작은 열악하고 미비했으나 한국전쟁의 혹독한 실전경험을 거쳐 정예병으로 부상하였다. 그야말로 한국 해병대는 한국전쟁 당시의 그야말로 치트키였다. 현재 해병대는 2개 사단과 10개의 여단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민국 공군도 미군정 시기 조직되었던 조선국방경비대에서 시작하였다. 단 공군도 해군 만큼이나 전문성을 요하며 거대한 장비들도 뒷받침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 겨우 식민지에서 벗어난 한국에서 공군을 창설하기란 매우 어려운 실정이었다. 공군 창설에 대해서는 임시정부 때부터 안창호 주도로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해외에서 조종을 배우고 온 조선인 파일럿들도 더러 있었고요. 하지만 아직까지 임시정부 단계인 상태에서는 항공기를 구입하거나 만들 역량은 없었다.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공군 창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1946년 조선국방경비대가 처음 조직됐을 당시에는 만들어지지 않았다가 1948년 5월이나 되어서야 조선국방경비대 소속의 항공부대가 설치되었다. 이때 해군의 모태가 되는 조선해양경비대는 국방경비대 산하의 독립된 부대였던 반면 항공부대는 육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 조선국방경비대는 육군으로, 산하 조선해양경비대는 해군으로 독립했을 때도 공군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육군 예하의 항공국이 있을 뿐이었다. 공군도 별도로 독립시켜야 한다는 여론에 1949년 10월, 6.25전쟁이 터지기 8개월 전에 대한민국 공군이 창설되었다. 공군 독립의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장교들 최용덕, 김정렬, 김영환, 박범집, 이근석, 장덕창, 이영무 등을 공군 창설 7인이라고 하는데, 이중 가장 주도적으로 공군 창설에 나섰던 인물은 최용덕 장군이었다. 해군에 손원일 제독이 있다면 공군엔 최용덕 장군이 있었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최용덕 장군은 중국에 있을 때 육군군관학교와 보정항공학교를 수료하며 항공인으로서 길을 시작했다. 최용덕은 중국국민당 산하부대의 항공대에서 활약했던 베테랑급의 파일럿이었다. 심지어는 중국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이었고 국민당의 공군지휘부 참모장, 공군기지사령관 겸 공군기지학교장직일 역임했다. 1940년부터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소속되어 군무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을 맡으며 해방 전부터 임시정부 소속으로 공군 창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방 후 최용덕은 이 파일럿들과 항공건설협회를 만드는 등 공군 창설에 박차를 가하지만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부정하면서 광복군 출신의 최용덕 경력도 무시하였고 미군정은 최용덕에게 조선국방경비대 보병학교에 입학해 미군 훈련을 다시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전까지 장군 대우 받는 사람한테 다시 훈련소 가라는 처사는 매우 치욕적인 일이었지만 최용덕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백의장군을 빗대며 50세의 나이로 임관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섰을 때 초대 국방부 차관이 되어 1949년엔 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세웠고 10월 공군은 육군으로부터 독립, 공군사관학교도 육군으로부터 독립시키는데 이바지하였다. 초대 공군참모총장은 공군 창설 7인 중 한 명이었던 김정렬 장군이었다.
공군 창설은 정말 무에서 유를 창출한 것이라 별도로 독립은 했으나 군복이나 장비 관련해서는 찢어지게 빈약했다. 6.25전쟁 개전 당시 기준 공군은 약 1900명 정도로 항공기는 전투기가 전혀 없고 훈련기와 정찰기로만 22대가 전부였다. 부랴부랴 훈련기 몇 대를 전선에 투입시킬 수 있도록 개조하였고 미국으로부터 P-51 머스탱이라는 전투기 10대를 지원받았다. 원래는 F-82 트윈 머스탱이라는 전투기를 지원해주려고 했지만, F-82 트윈 머스탱은 2명의 파일럿이 들어가야 하는데 아직 대한민국 공군에는 그 정도 수의 파일럿 인력들이 없어서 차마 공여받질 못하고 1명이 들어가는 전투기 P-51 머스탱을 지원받은 것이었다. 6.25전쟁 내내 주요 공중임무는 미군을 포함한 UN군 공군이 맡았고, 한국 공군은 후방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국 공군도 실전경험을 차근차근 쌓아가며 역량을 키워나갔고, 1952년 1월에는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이라는, 미군조차도 500번에 걸쳐 실패한 폭격 작전을 한국 공군이 단 세 번만에 성공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 공군은 나날이 발전했고 6.25전쟁 후반 고지전으로 고착화되었을 때도 한국 공군은 항공지원작전을 하며 큰 역할을 수행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한국 공군의 전투비행단은 제1전투비행단 하나였다. 전쟁 도중 제10전투비행단과 제18전투비행단을 만들어 한국전쟁이 끝날 때는 3개의 전투비행단이 전부였지만, 현재는 총 6개의 전투비행단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의 해군과 공군 그리고 오늘날의 해군과 공군을 생각해본다면 한국인들의 저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우리가 없이 시작할 순 있어도 이 악물고 어떻게든 무에서 유를 창출해내는 끈기와 근성이 어마어마한 민족이라는 걸 해군과 공군의 역사가 시사하지 않나 싶다.
1989년 대한민국 육군, 해군, 공군의 삼군 본부가 모두 충남 계룡시로 모여들면서 계룡은 국방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커맨더 센터가 되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비단 군사력만 강화시킨 것이 아니라 최첨단 기술과 산업을 접목하여 현대식 군수장비 및 무기들을 만들어 세계적으로도 그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계룡시에서는 아예 '군문화'를 컨셉으로 도시의 정체성 형성과 홍보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계룡시에서는 대한민국 육군과 손을 잡고 2002년부터 매년 10월 초 군문화페스티벌인 '지상군 페스티벌'을 연무대 일대에서 개최해왔다. 현재는 '계룡군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육군이 주체하는 행사인 만큼 육군이 주력이긴 하지만 해군과 공군에 대한 전시 및 홍보도 이루어지고 있다. 계룡군문화축제는 민간인의 관람과 함께 세계 각국의 군사 및 무기 전문가들도 참여해 포럼, 마켓 등도 이루어지는 말 그대로 '엑스포'에 해당하는 축제다.
군수장비와 무기라는 것은 강인하고 든든한 이미지와 함께, 전쟁이란 참상에 사용되어 사람을 죽이는 차갑고 잔혹한 속성 때문에 두려움도 동시에 들게 한다. 어느 나라나 '자주국방'을 국방의 정향점으로 삼는다.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힘만으로 국방을 책임감 있게 수행할 수 있다는 '자주국방'의 필요성은, 특히나 한국의 역사를 감안했을 때 더더욱 우리 한국에게 와닿을 수밖에 없다. 군사력 강화는 결코 침략적 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힘을 과시하는 목적이 아니다. 헌법 상에서도 우리는 침략 전쟁을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주국방의 방향성과 전쟁론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기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가타부타 할 말은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현대의 국방력은 전쟁을 억제하고 일어나게 하지 않기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더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력 강화와 자주국방은 무서운 게 아니라 안정감을 주기 위한 목적이다. 내가 우리 한국의 현대사에서 배운 국방과 군사와 전쟁의 교훈은 이것이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한시준 <대한제국군에서 한국광복군까지, 황학수의 독립운동>
대한민국 국군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가 운영했던 한국광복군, 더 거슬러 올라가면 마지막 한국의 왕조였던 대한제국의 군대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황학수는 그렇게까지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인데요, 대한제국군에서 한국광복군까지 모두 장교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황학수는 대한제국군의 장교로 임관하였으나 1907년 일제의 대한제국군 해산으로 고향으로 낙향합니다. 국권 피탈 후에는 만주로 넘어가 만주에 주둔 중이었던 여러 독립군 군부대에서 장교로 맹활약하다가, 종국에는 임시정부로 가서 임시정부 산하의 군부대 한국광복군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황학수는 총사령관 지청천의 대리였으며, 한국광복군 특별사령부가 있던 중국 시안에서 일제와 전쟁을 위한 훈련을 도모했습니다. 다만 한국이 외세에 의해 해방되어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황학수는 정치인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다시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습니다. 황학수가 대한민국 국군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쉽지만, 그는 대한제국군에서 독립군과 한국광복군을 모두 관통했던, 참 군인 출신의 독립운동가였습니다. 황학수의 일대기를 다룬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대한제국과 한국광복군의 정신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에 이어 한국의 두 번째 천만영화였죠?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비슷한 시기에 나오면서 200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한국영화의 제작 역량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였습니다. 한국영화의 화양연화 시기를 장식했던, 그리고 대한민국 전국민들을 뜨거운 눈물을 선사했던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였습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같은 민족끼리의 내전을 두 형제의 비극적 우애를 통해 감동적인 서사를 만들어냅니다. 계룡군문화축제장에서 구석 한 켠에 자그맣게 6.25전쟁 전사자 유품 발굴 전시를 다녀오고 가장 먼저 떠오른 영화가 <태극기 휘날리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