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싸안음을 여행하다
충청도에서 산맥을 타고 전라도 쪽으로 내려오면 위치하고 있는 대둔산. 그 대둔산을 주산으로 두고 있는 완주. 전라도를 대표하는 도시 '전주'의 명성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 전주를 지리적으로 감싸 안고 있는 완주의 독립적인 정체성에 주목하는 이는 적다. 하긴 전주와 완주는 같은 말이긴 하니 충분히 헷갈릴 수 있다. 아니, 전주와 완주는 엄연히 다른 행정구역인데 같은 말이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한반도를 최초로 통일한 신라가 새로운 행정구역으로 한반도를 재편할 때 '전주'라는 명칭은 오늘날의 전라북도를 아우르는 지명이었다. 이때 전주는 한자식 표현이고 순우리말에서 유래한 원지명은 완산주였다. '전주(全州)'란 '온고을'이란 순우리말에서 파생했으며 이것이 표기될 때는 '완산주'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다. 훗날 통일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지명을 한역화하는 작업에서 완산주의 유래인 '완'이 '완전할 전(全)'으로 번역되었고 완산주의 명칭은 전주로 바뀌었다. 즉 전주와 완산주는 결국 같은 뜻인 셈이다. 하지만 역사의 발전과 전개 속에서 전주(완산주)의 지역범위는 점차 좁아졌고, 1914년 일제강점기 때 가장 핵심지역인 곳이 '전주'로 빠지고, 비도시 지역은 완산주에서 '산'자를 빼 완주라는 이름만 남게 되었으니, 전주와 완주는 생이별을 한 쌍둥이 형제 같은 관계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더 능력 있는 형과 그렇지 못한 동생이 이별을 한 것인데, 오늘날의 완주군은 완전히 도시화 되었지만, 떨어진 기간은 무시 못하는지, 예향의 도시인 전주와는 더 진득하고 정통의 정취를 풍긴다. 따라서 관광으로 시끌벅적한 전주에 질린 사람이 있다면, 전주와 오래 전 헤어진 쌍둥이 동생 완주를 추천하곤 한다.
전주에서 전주천을 따라가다 보면 전주천이 만경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비비정'이라는 정자가 놓여 있다. 전주천뿐 아니라 소양천이 합류하는 지점까지 조망해볼 수 있는 비비정에서 완주 여행을 시작해본다. 이 정자는 1573년(선조 6년) 창주첨사였던 최영길이 창건했으며, 세월이 한참 흐르고 1752년(영조 28년) 전라도관찰사였던 서명구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소박한 마을 굽어보는 전부이지만 한때는 여러 돛단배들이 오가는 명승지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관광객들이 몰렸던 곳이었다. 군산과 부안에서 오는 소금과 젓갈을 실은 배가 쉴 새 없이 오르내렸던 곳이라고도 한다. 특히 비비정의 경치는 모랫빛과 습지 위에 내려앉는 기러기 떼로 유명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비비정의 경치를 두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불렀다. 이 '비비낙안'은 완산 8경으로 손꼽힐 정도였다. 우암 송시열은 비비정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대해 별도의 기행문을 남길 정도였는데, 만경강을 굽어볼 수 있는 이 정자의 자태가 중국의 맹장 '장비'나 '악비'에 견줄 만하다며 두 호걸들의 뒷이름만을 따와 '비비정'이란 이름을 직접 지었다. 지금도 비비정 내부에는 <비비정기>라는 송시열의 기문이 걸려 있다.
오늘날의 비비정에서는 조선시대 당시에는 볼 수 없던 폐철교를 볼 수 있다. 분명 옛 수려했던 경관의 흔적이 남아있음을 절실히 느낄 수 있지만 소박한 마을 분위기에 폐철교 탓인지 어딘지 모르게 쇠잔한 페이소스가 남아 있다. 인류가 이룩한 번성함은 역시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하지만 분명 완주만의 생명력을 느낄 수가 있으며, 그 생명력의 여행은 이제 시작이다. 비비정에서 보이는 만경교 폐철교는 1928년 일제시대 일제가 호남지방에서 수탈한 농산물을 실어나르기 위해 만들었다. 수탈의 흔적이 남긴 폐철교를 따라 다다르는 곳에 두 번째 여행지가 있다.
한반도 최대곡창지대인 전라도는 일제 때 집중적인 수탈의 대상이 되었다. 만경강의 폐철교 역시 일제가 호남지방에서 수탈한 농산물을 실어나르기 위한 철교였고, 그 철교를 따라가다 보면 삼례문화예술촌이 나온다. 최근 각 지자체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일제 시대 수탈저장창고 건물들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삼례문화예술촌도 그러한 경우 중 하나다.
삼례문화예술촌은 구 삼례양곡창고를 개조한 공간으로, 목조 건물 4개동과 벽돌 건물 2개동이 남아 있다.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했으며 일제시대 건물 중에서도 비교적 원형이 거의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건물들이다. 삼례문화예술촌의 설명에 의하면 완주의 삼례읍은 만경상 상륙에 위치하여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온화한 만경평야의 일원을 이루고 있던 만큼, 양곡 수탈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이 일대에 각종 일본인 농장사무소들이 즐비해 있었다고 하며, 비비정에서 보이던 만경강 폐철교를 이용해 군산의 항구까지 양곡을 이동시켰다. 해방 이후로도 계속 양곡창고로 쓰이다가 2013년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이곳엔 주기적으로 각종 미술전시회와 공연 등이 이루어지고 있다. 비록 아픔의 흔적이지만, 그 아픔이 사라진 현대에 들어서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어 아픔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도 미래로 나아가려는 노력들은 역사가 가야 하는 새로운 방향성을 제기해준다.
삼례가 한때는 많은 인파가 모이던 곳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동학의 열기가 한창 치솟을 때 동학도들이 모여 집회를 열었던 삼례집회이다. 동학에 대해 설명하자면 이렇다. 조선후기부터 천주교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천주교의 교리와 내용은 참 따뜻하고 좋지만 서양인들의 종교라는 게 문제가 되었다. 더군다나 강화도 조약 이후로 조선이 근대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서양인들은 무서운 도깨비라든지 무서운 존재들, 혹은 조선을 무너뜨리려는 오랑캐로 인식되면서 서학에 대한 안 좋은 시선이 더 짙어졌다. 내용이나 교리는 좋은데 서양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불편함과 거부감의 대상이 되었기에 내용과 교리는 비슷하게 유지하되 우리나라의 토속성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종교가 동학이었다. 1860년 도학, 풍속학, 민간 종교 등에 통달한 경주 최씨 집안의 몰락 양반 출신 최제우가 경북 일대에서 서학에 대항한다는 뜻으로 '동학'이라는 이름의 종교를 창단했다. 비록 동학은 서학을 배척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명분으로 신분제를 타파한 공평한 세상, 그리고 후천개벽이라는 사상은 천주교의 교리를 어느 정도 차용한 것이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신분을 뛰어넘어 만인이 공평하다는 사상과 서학과는 달리 한국토종 종교라는 이유로 별 거부감 없이 민중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서학이나 동학이나 유학을 거부하는 건 마찬가지라며 1864년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최제우가 사형되자 그의 수제자였던 최시형이 동학의 2대 교주가 되어 강원도 남부와 지금의 충청북도 지역에서 포교 및 신도 관리 업무를 하면서 동학은 한반도 남부와 중부 전체로 퍼졌다. 2대 교주인 최시형 대에는 조선이 개화를 할 무렵이었고, 구식군인들의 반란사건인 임오군란, 지식인 개화파들의 쿠데타였던 갑신정변, 조선에 진출하려는 청나라와 일본, 그리고 서양인들로 인해 사회는 대단히 불안정했고 그럴수록 동학은 더 퍼져나갔다. 최시형 입장에서는 그 많은 전국의 신도수를 전부 관리할 수가 없어서 포접제도를 도입했다. 포접제란 교주인 최시형은 충북 보은을 주요 본진으로 삼고 각 지역별로 접주를 두어 담당 지역의 신도를 관리하는 형태였다. 그래서 접주들별로 같은 동학을 두고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교주 최시형은 동학이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편안한 종교로 남길 원했던 반면 강경파 동학도들은 지금 정부가 너무나도 무능해 외국은 조선을 업신여기고, 탐관오리가 판을 치니 민중들이 들고 일어서서 현 시국을 뒤집어엎자, 그러기 위해선 동학이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하다며 동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으려고 했다. 교주 최시형을 따르는 온건파 동학도들은 주로 최시형이 있는 충청북도 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었고, 강경파 동학도들은 전라북도에 주로 분포해있었기에 온건파를 북접, 강경파를 남접이라고도 불렀다.
두 교접이 주도한 서로 다른 성격의 집회가 있었다. 온건파였던 북접 주도로 1892년 11월 완주의 삼례에서 먼저 모은 집회가 삼례집회였다. 삼례집회는 동학 창시 후 첫 대규모 집회로, 처형되었던 1대 교주 최제우의 신원을 복원해달라는 집회였다. 이를 교조 신원 운동이라 하는데, 동학의 지도부는 삼례의 광장에 모여 교조 신원 요구와 함께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라는 탄원서를 전라감사에 제출하였다. 전라감사는 탐관오리 척결을 약속하였으나 최제우의 신원을 복구하는 것은 본인이 관장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라며 거절했다. 이에 대한 반발심에 강경파들이 1년 후 충북 보은에서 주도한 집회가 보은 집회로, 기존의 교조신원운동 및 탐관오리 척결에 이어 양이세력을 당장 내쫓으라는 척왜양을 요구하는 등 훨씬 더 강도 높은 정치의식을 드러냈다.
흔히 한국의 역사에서 민중들이 정치의식을 내보인 사건의 시초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를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그보다 5~6년 앞서 동학을 중심으로 민중들이 최초로 정치의식을 내보였다. 민중의 역사에 있어서 동학이 상징하는 바가 크다는 뜻이다. 최초의 대규모 집회였던 삼례집회 현장이었던 광장에는 당시의 모습을 기록하고자 새로운 광장으로 정비해두고 있다. 이제는 인파가 많이 모이는 곳은 아니지만 그때의 현장은 충분히 느껴볼 수 있는 공간으로 단장되어 있다.
내가 여행지를 고를 때는 명승지도 좋지만 역사적 상징과 의의를 더 따지는 편이다. 특히 사찰이나 서원 등을 답사하면 국내에 워낙 많은 것들이 있기에 미감보다는 상징성이 더 우선한다. 그러나 가끔 역사적 내력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 그 아름다움만이 소문이 나서 방문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완주 여행에서는 화암사가 그러했다. 화암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694년) 일교국사가 창건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전부 불타버리고 조선후기였던 17세기에 중수된 사찰로, 오늘날 남아 있는 화암사의 건물들 모두 조선후기의 것들이다. 신라 시대 임금의 딸이었던 연화공주가 어떤 약으로도 치료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자 임금이 불심에 호소하였고, 임금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꽃을 주었다고 한다. 임금은 전국을 뒤져 꿈에서 본 꽃을 수소문하였는데, 불명산 깊은 곳에서 마침내 찾았고 그 꽃을 먹은 연화공주가 씻은 듯 나아, 이에 감복한 임금이 꽃을 찾은 곳에 화암사를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래서 사찰의 이름이 '화암사(花巖寺)'인 것이다. 문헌상에는 신라시대 공주 중 연화공주라는 인물이 없고, 진성여왕에게는 딸도 없었으므로 사실과는 무관한 창건 설화이지만 화암사는 이름 그대로 불명산의 꽃과 같은 존재의 사찰이다.
오늘날 유명한 사찰들도 대부분 근처 사찰 바로 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화암사만큼은 주차장에 주차를 한 뒤 한참을 산행해야 화암사를 맞이할 수 있다. 불편한 동선이긴 하지만 그 불편한 동선 끝에는 언제나 꽃과도 같은 아름다운 풍경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의 법칙. 일단 주차장에서 내려 산속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동화 같은 입장로에 완전히 매료되어버린다.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화암사를 찾은 5월 기준 내 시야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초록의 색감에 나도 모르게 같이 물들여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렇게 동화 같은 입구를 뒤로 하면 오솔길을 제법 걸어야 한다. 그렇다고 등산에 가까운 정도는 아니다. 가벼운 산행 정도의 난이도이며, 시냇물 소리를 듣고 산의 녹음을 눈에 담고 걸으면 지루할 틈은 없다. 다만 약간의 부담이 되는 코스가 있다면 수직에 가까운 147계단을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경사도 가파른 이 계단을 걷는 게 약간은 숨이 차긴 하지만 중간중간 팻말로 걸려 있는 안도현 시인의 작품은, 이미 화암사를 갔다온 자가 아직 가보지 못한 자의 기대감을 증폭시켜준다. 숨을 고르고 싶을 땐 안도현 시인의 시를 읽는 것을 핑계 삼아 잠깐의 휴식을 취한다.
절을 두고 잘 늙었다고 함부로 입을 놀려도 혼나지 않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나라의 절 치고 사실 잘 늙지 않은 절이 없으니 무슨 수로 절을 형용하겠는가. 심지어 잘 늙지 않으면 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심사도 무의식 한쪽에 풍경처럼 매달려 있는 까닭에 어쩔 수가 없다. 잘 늙었다는 것은 비바람 속에서도 비뚤어지지 않고 꼿꼿하다는 뜻이며, 그 스스로 역사이거나 문화의 일부로서 지금도 당당하게 늙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화암사가 그러하다. 어지간한 지도에는 그 존재를 드러내고 밝히기를 꺼리는, 그래서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다. 십여 년 전쯤에 우연히 누군가 내게 귓속말로 일러주었다. 화암사 한번 가보라고, 숨어 있는 절이라고, 가보면 틀림없이 반하게 될 것이라고.
- 안도현 <잘 늙은 절, 화암사> 중
잘 늙은 절이라.. 도대체 어떤 모습의 절이길래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표현했을까. '나 혼자 가끔씩 펼쳐보고 싶은, 작지만 소중한 책 같은 절이란 구절'도 나의 호기심을 당긴다. 안도현 시인의 시를 읽는 건 쉬어간다는 핑계였지만 이 글을 읽고 궁금증에 도저히 더 오래 쉴 수가 없어 발걸음에 힘을 내본다.
그렇게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다 보면 하늘과 산이란 옷을 덮고, 본모습은 부끄럽다는 듯 살짝씩 사찰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반드시 돌계단을 전부 올라가야 그 전체의 모습이 보이고, 단 한 계단이라도 다 오르지 않으면 전체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마주하는 사찰의 정문은 우화루이다. 우화루는 사찰의 정문 역할을 할 뿐 정문은 아니다. 엄밀히 사찰을 구성하는 건물 중 하나이며 단지 누각형태로 지어져 명상과 더불어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는 곳이다. 돌계단을 다 오르면 우화루만 보인다. 사찰의 모습을 보려면 우화루의 작은 문을 건너 들어가야 하고, 그 전까지 보이는 건 우화루가 전부이기에 우화루는 화암사의 파사드(facade) 역할까지 수행한다.
감상자의 시선에서 건축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시퀀스다. 감상자가 건물의 공간에 처음 발을 딛을 때부터 다시 공간에 나올 때까지 무엇을 어떻게 어떤 순서로 보게 되는가. 그리고 건축 그 자체는 주변의 경관과 어떤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지는가. 좋은 건축은 이 모든 걸 따진다. 그리고 이러한 건축 감상의 시퀀스는 시야의 통제로 이루어진다. 감상자의 한 시선에 다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동선에 따라 감상자의 시야를 통제하여 당장 보여줄 것과 나중에 보여줄 것을 나누어 선사함으로써 설계자의 의도를 감상자에게 전한다. 그런 점에서 화암사는 실로 감탄스럽다. 돌계단을 다 오르기 전까지는 삐죽 튀어나온 우화루의 일부만 보이게 하다가 다 오르고나서야 우화루의 모습을 보게 된다. 또한 돌계단에 오르면서 보이는 우화루의 배치는 감상자의 시선 대각선에 위치하게 하여 평면적인 하늘과 산의 풍경에 입체감을 더한다. 건축을 자연 속 어디에 배치해야 가장 안정적이고 이상적인지 점지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감탄스럽다. 돌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도 화암사는 파사드 역할을 수행하는 우화루에 가려져 있다. 우화루도 멋진 자태를 뽐내지만 우화루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그제서야 화암사는 전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우화루를 통해 화암사 내부로 들어가면 소근한 마당을 두고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잘 늙은 극락전이 우리를 반겨준다. 이 극락전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를 몰라도 누적된 세월의 내력이 나무 특유의 질감을 통해 드러난다. '극락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건물로, 화암사의 극락전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하앙식(下昻式) 구조의 건물이다. 하앙식 구조란 건물의 지붕과 기둥 사이에 서까래로 층을 하나 더 만들어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고, 그 덕에 처마의 길이를 더 길게 내미도록 하는 건축 양식이다. 그 덕에 처마의 경사도가 돋보여 건물의 구조미를 뽐낼 수 있다. 본디 삼국시대 때 자주 사용하던 건축 양식이었다고 하지만 현재 남아 있는 하앙식 건물은 화암사의 극락전이 유일하다. 편액 또한 한 편액에 '극락전'을 모두 쓰지 않고, 한 편액에 한 글자씩 적어 건축의 구조미가 더욱 돋보인다.
화암사는 건축적으로도 조경적으로도 '좋은 건축'의 가장 훌륭한 예시 중 하나라고 자부한다. 건축은 건축 자체로 있을 수 없으며,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질 때, 그리고 감상자의 시선에 따라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건축-경관-감상자의 관계를 완성시킨다. 영주의 부석사야 워낙에 잘 알려진 사찰이면서 역사적 의의도 상당한 곳인지라 처음부터 큰 기대를 품고 가는 곳이지만, 완주의 화암사는 소문만 듣고 갔던 곳인 만큼 또 다른 의미의 충만함을 선사해주었다. 이렇듯 나의 습관에서 살짝 빗겨가도 예상치 못한 기대감을 주는 것이 새삼스러운 여행의 묘미일 것이다.
둘째날의 여행지는 완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대둔산으로 향한다. 호남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대둔산은 한국의 여러 산들처럼 화강암 기반의 산이며, 앞에는 만경평야를 마주하고 있고, 소백산맥에서 전북 쪽으로 치고 올라가는 산줄기 '금남정맥'을 이루는 산 중 하나다. 위치적으로는 충남과 전북을 가르는 경계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완주군에서 보물이라 자랑하는 주산이다.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가장 높은 봉우리정상을 마천대라고 한다. 대둔산에는 케이블카가 만들어져 있어서 정상까지는 아니지만 대둔산의 기암절벽들을 굳이 등산하지 않더라도 관람할 수가 있다. 등산까지 원한다면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정상인 마천대까지 등산할 수도 있다. 케이블카에 내려 조그만 걸으면 대둔산의 명물인 두 개의 구름다리 '대둔산구름다리'와 '삼선구름다리'를 볼 수가 있다. 마천대로 등산하기 위해서는 두 구름다리를 모두 지나쳐야 하는데, 수평인 대둔산구름다리야 간단히 체험목적으로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삼선구름다리는 경사도가 무려 51도로 계단 수만 127개이니 올라가기 위해선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한다. 심지어 삼선구름다리는 돌아오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에 한 번 삼선구름다리를 올라간다면 반드시 마천대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물론 그만큼 삼선구름다리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도전이며 SNS상에서 도전의 증빙사진으로 많이 업로드되고 있기도 하다. 물론 굳이 오르지 않고 두 구름다리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운동하기 꺼려하는 핑계가 아니라 각각 수평과 수직을 이루는 두 개의 구름다리가 교직되는 그 광경이 대둔산의 잘생긴 화강암 배경을 병풍 삼아 어우러지면서 장관을 만들어낸다. 여느 화강암 산이 그렇겠지만 대둔산은 험준한 만큼 장엄한 화강암의 살갗을 자랑한다. 반대로 장엄한 모습만큼 산세가 험준하기에, 이런 험준한 지형에선 반드시 한국사 속 전투의 현장이 되었다. 이곳 대둔산은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894년 우금치 전투의 패전으로 동학농민운동군이 뿔뿔이 흩어지고 전봉준마저 순창에서 체포되자 동학농민운동은 사실상 종말을 고했는데, 일부 잔당들이 이 험한 대둔산 위에 올라서 계속 저항했다. 관군이나 일본군은 대둔산의 산세에 감히 진격도 할 수가 없었고, 대포도 명중하질 못했다고 한다. 1895년 1월이나 되어서야 관군 특수부대와 일본군 일부가 산세를 역이용하여 몰래 동학군 진지 후방으로 이동했고 끝내 마지막 동학군의 잔당들이 토벌되었다. 대둔산 전투에서 동학군은 도망치는 사람 없이 전원 다 현장에서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대둔산은 한 폭의 그림이다. 이 지역에는 금강산이 놀러 와도 인정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자랑하는 이도 많았다. 병풍처럼 우뚝 선 산줄기들이 줄지어 있는 가운데 남쪽 비탈은 기암의 봉우리가 펼쳐져 있고, 그런 기암 사이사이에 오래된 노송들이 보였다. 전설에 원효대사가 태고사 절터를 찾아내고 사흘 동안 덩실덩실 춤을 췄다고 하니, 그 말이 과장이 아닌 듯싶다. 대둔산은 호남과 호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 한밭의 주산이기도 하다."
- 한박준혜 <은월이>
대둔산케이블카까지 가는 길은 대둔산의 어느 한 골짜기의 평지를 따라가는 길이다. 왼쪽 고개가 대둔산케이블카가 있는 곳이고, 오른쪽 고개는 '이치'라는 고개로 임진왜란 때 이치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지금도 펜션촌 한 켠에 이치전적지가 놓여 있다. 초기 승승장구를 하던 일본 육군은 이순신의 승전고로 제동이 걸리고 만다. 일본 육군의 보급을 책임져야 할 일본 수군이 이순신의 조선 수군에게 패배하면서 보급에 차질을 빚었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군대는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진군조차 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의주에 가 있는 조선의 국왕 선조를 잡으러 갔던 일본 육군 제1군의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성에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제해권을 일본군이 확보하지 않은 이상 전세의 진전이 없지만, 바다 위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을 상대로 일본 수군이 전혀 맥을 못 추리니 해결책도 없었다.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충청도 담당이었던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육로를 통해 전라도로 내려가 이순신의 뒤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1592년 8월(양력 기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충청도 금산에서 전라도로 진입하였는데 한 번은 좌절되었다가 다시 두 번째로 전라도 진입을 시도하니, 이때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지나쳤던 루트가 대둔산이었다. 이때 전라도 광주목사였던 권율이 전라도에 있었던 터라, 일본군이 전라도 진입을 시도한다는 소식에 대둔산으로 향했고 이치 고개에 목책을 쌓은 뒤 일본군을 맞닥뜨렸다. 권율은 이치로 북상하기 전 동복현감 황진더러 군사들을 이끌고 이치로 합류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루 동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일본군을 상대로 권율과 황진이 이끄는 조선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조선군은 2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조선군은 화포세례를, 일본군은 조총세례를 서로 주고 받는 중에, 권율의 지시를 받은 황진 장군이 우회하여 일본군 측면을 공격했다. 황진은 당대 최고의 무장 중 한 명이었고 황진은 두 자루의 검을 휘두르며 무쌍을 뽐냈다. 황진은 탄환에 맞는 부상까지 입었지만 투혼을 발휘하며 백병전을 통해 일본군을 흐트려놓았다. 공포에 찬 일본군은 조선군 본군이 있는 전면으로 도망쳤고, 그 과정에서 조선군 목책이 뚫려 오히려 조선군 본군이 위험에 처하게 된다. 이때 권율은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사기를 진작시켰고, 부상을 입은 황진이 뒷편에서 계속 일본군을 사정없이 베어버리니, 끝내 일본군은 후퇴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군사 한 명이 백 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다"고 한다. 이 전투가 이치 전투이다.
대둔산을 내려와 완주의 동쪽, 진안군과 맞대고 있는 소양면으로 간다. 소양면의 종남산에는 옛 조선시대 고급한옥들을 관람할 수 있는 곳들이 있다. 그 존재만으로 많은 여행객들을 모으는 두 곳이 아원고택과 소양고택이다.
아원고택은 경상남도 진주에 있던 250년된 한옥, 전라북도 정읍에 있다가 일제강점기 때 옮겨진 한옥, 조선시대 말기에 서당으로 사용했던 한옥을 합쳐 위봉산을 정원삼아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현재는 숙박시설과 갤러리로 활용되고 있다. 딱 보아도 평범한 한옥이 아닌, 옛날 아주 잘 사는 부자들의 한옥임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묵는 기분은 마치 조선시대 5성급 호텔에 머무는 느낌이랄까. 아원은 '우리의 정원'이라는 뜻이다. 아원고택 바로 아래에 있는 소양고택은 지난 2010년 철거의 위기에 놓였던 180여 년 된 고창과 무안의 고급한옥 3채를 이곳 완주의 종남산으로 가져오며 역시나 숙박시설로 재탄생되었다. 문화재 장인들이 복원작업을 진행했으며 고택의 세부 디자인조차 철저하게 전통을 고증하였다고 한다. 아원고택에 갤러리가 있듯, 소양고택은 숙박시설 외에도 다양한 전통문화 체험 콘텐츠들을 시행하고 있다. 아원고택이나 소양고택이나 전통과 현대의 고급스러움이 공존하는 곳으로, 현대의 감성에 맞게 재탄생되었지만 그 소프트웨어 자체는 전통을 살리고 있으며 무엇보다 종남산의 유려한 산비탈과 자연이 만들어주는 여백의 공간을 '사유'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미를 내세우고 있다. 고택을 하나의 방석이라 생각하고 비어진 공간을 나의 사유로 채우는 경험을 해보기를 추천한다.
아원고택과 소양고택이 자리하고 있는 종남산은 위봉산으로 이어진다. 두 개의 산이라고 하지만 같은 능선으로 거의 붙어 있으며 도로가 잘 닦여 있기에 차를 탄다면 10분밖에 걸리지 않은 곳에 위봉산성이 있어 고택을 찾는 관광객들이 고택보다 더 높은 위도에 있는 위봉산성에서 사진들을 건져가곤 한다. 위봉산성은 조선 후기 숙종 대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비상시에 전주 경기전에 모시고 있는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옮겨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실제로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이 전주성을 함락하자 조선 관군은 태조 이성계를 위봉산성으로 옮겨온 전례도 있었다. 위봉산성은 앞으로 완주의 평야지대를 마주하고 있고, 뒤로는 전부 산맥들이 이어지기에 산성으로서 제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곳에 만들어졌다. 현재 위봉산성은 조선후기 때 성의 모습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 부분 원형을 보존한 채 전해지고 있으며, 높은 산줄기를 배경삼아 남아 있는 성벽, 보루, 치 등은 탁트인 전망과 함께 포토존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대둔산이나 그 아래 종남산, 위봉산 모두 금남정맥의 일부이다. 종남산과 위봉산 더 아래로 금남정맥을 따라 내려오면 '웅치'라는 고개가 있다. 이곳 웅치에서도 임진왜란 때 '웅치 전투'라는 치열한 접전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웅치 전투는 이치 전투와 엮어 흔히들 '웅치, 이치 전투'라고 한다. 이치전투에 대해 말했듯 이순신의 전라수군으로 인해 일본군이 전라도를 약탈하지 못하게 되자, 충남 금산에 있던 일본군 제6군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전라도 전주를 향해 남하를 시작했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주변에서 동원 가능한 병력들을 수소문 한 뒤 웅치 고개로 집결시켜 웅치 고개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기로 했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은 전주에서 온 의병장 황박을 제1방어선으로, 나주에서 온 나주 판관 이복남을 제2방어선으로, 김제에서 온 김제 군수 정담을 제3방어선으로 구축하여 일본군과 8월 초(양력 기준) 부딪혔다. 조선군은 맹렬히 싸웠지만 일본군의 조총부대에 1방어선과 2방어선이 무너지고 3방어선만이 남게 되었다. 제3방어선마저 전멸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화순에서 온 황진의 부대가 뒤늦게 합류하였다. 황진의 부대가 일본군의 배후를 공격했고 놀란 일본군은 도주했다. 웅치를 통과하면 곧바로 전주가 나온다. 전주와 웅치 사이에는 '안덕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황진이 나타나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승리한 곳이 안덕원이었다. 그러니까 사실상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당시 웅치를 돌파한 것이나 다름 없었던 위태로웠던 상황이었으나, 안덕원에서 나타난 황진이 마지막 보루를 지켜낸 셈이었다.
"그때는 적병이 이미 안덕원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제장(諸將)이 모두 피하여 퇴각하였는데, 공(황진)이 곧장 안덕원으로 달려가서 적병을 요격하고 대파하여 거의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장이 화살에 맞아 죽었는데, 그 졸개들이 시체를 싣고 갈 틈도 없어서 길옆에 묻어 두고 달아났다" - <포저집>
잠시 금산으로 물러난 일본군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다시 한번 전라도 진입을 시도하니 그것이 위에서 언급한 이치 전투였고, 웅치 전투 승리 후 웅치에 머무르던 황진은 이치로 가서 이치에서 맹활약을 하게 된다.
지리적으로 완주는 전주를 감싸 안고 있다. 같은 지명에서 서로 갈라진 같은 의미를 띄고 있는 전주와 완주. 마치 잘난 전주를 분가시키고 그런 전주가 더 빛날 수 있도록 완주가 전주를 지켜주는 듯하다. 임진왜란 때도 웅치 전투와 이치 전투를 통해 일본군이 전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완주가 막아주었다. 그렇다고 완주가 전주의 사이드킥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전주를 감싸 안고 지켜주는 완주의 금남정맥은 종남산, 위봉산, 대둔산 등의 산들을 만들어 내어 완주만의 빼어난 경관과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금남정맥과 만경강이 이루는 완주의 만경창파 같은 완주의 신화에 젖어들기를 적극 추천한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한박준혜 <은월이>
출판사 '모시는사람들'에서 동학을 소재로 하여 여성작가들에게 13편의 소설들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습니다. 원래는 인터넷에서 연재되던 소설이었는데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판되기도 하였는데, 그중 <은월이>는 동학농민운동의 마지막 전투였던 완주의 대둔산 전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입니다. 주인공 은월이와 그 주변 인물들 간의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관계 속에서 구한말 동학이 어떻게 민생에 뿌리내렸는지, 또한 동학 내에서도 어떤 갈등들이 있었는지, 단순히 동학 VS 일본의 구도로만 그리지 않습니다. 그보다 현실적인 고민들도 함께 반영되었는데, 인물들 간의 사랑이야기가 다소 클리셰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구 시대의 관습과 새 시대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과도기에 선 인물들의 고뇌들이 솔직하게 묘사되어 평면적인 내용은 결코 아니랍니다. 작가 자체가 동학에 왜 매료되었는지, 동학의 어떤 사상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는지 직접적으로 잘 드러나죠. 기암절벽의 매혹적인 대둔산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비극의 대둔산 전투를 실감나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
1999년 전북 완주에서 일어났던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정지영 감독의 영화입니다. 경찰들의 잘못된 수사로 죄 없는 소년들이 유죄 판결을 받고는 사회적 낙인 속에서 살아야 하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16년이 지나고 진범을 밝히기 위한 형사 한 명과 경찰의 잘못된 수사를 은닉하려는 당시 사건의 담당형사 간의 수사극입니다. 정지영 감독은 역사와 정치를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오다가 최근 들어 사회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역사, 정치, 사회로 소재를 구분한다지만 정지영 감독은 늘 한국현대사의 얼룩들을 끄집어내고 현 한국의 관객들이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의 영화를 만듭니다. 국가권력과 공권력이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과감하게 보여주고, 그러는 한편 어떤 식으로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관객들에게 던지기도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