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촌놈의 국내여행 뿌수기 [화천 편]

눈 덮인 산골을 여행하다

by 이영

















겨울의 설경이 아무리 낭만적이라고 해도 겨울철 여행은 쉽지 않다. 강설로 인해 길이 막혀버리기도 하고, 관광지들이 갑자기 휴무에 들어가기도 하고, 차가 오작동될 수도 있고, 조금만 걸어도 오돌오돌 추위에 떨어야 하니, 겨울철 여행은 '도전'이라 할 만큼의 비효율성이 수반된다. 그럼에도, 그 비효율성을 감안하더라도, 여행 욕구를 자극하여 나를 유혹하는 매력적인 겨울여행지들이 있다. 고생길이 훤하면서도 그것을 무릅써서 떠나는 겨울철 여행은 그만큼의 보상을 확실히 선사해준다. 그중 한 곳이 강원도 화천이다. 겨울철만 되면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지역 중 한 곳이 '화천'일 것이다. 성공적인 마케팅 덕인지 국내의 겨울여행하면 '화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화천은 그 지역 자체로 '눈과 얼음의 궁전'과도 같다. 화천이 국내 겨울철 대표 여행지로 손꼽힐 수 있던 건 역시나 세계 4대 겨울 축제 중 하나로 거론되는 '산천어축제' 덕분이다.




화천산천어축제

2003년 첫 문을 연 화천 산천어축제는 이제는 어엿하게 강원도를 대표하는 겨울 축제로 자리매김하였다. 북한강이 화천시내 방면으로 빠지는 하천이 완전히 얼어붙는 1월 한 달 간 매년 100만 명 이상이 지나는 대형 축제로, 주말에 방문하면 주차장이 전쟁터가 되고 주차요원으로만 모든 도로도로에 배치될 정도이다. 산천어는 민물고기로,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 강에 남아 성장한 송어를 '산천어'라 한다. 산천어축제 공식 홈페이지상의 산천어 설명문을 빌려오자면 이렇다.


"산천어는 연어목 연어과로서, 물이 맑고 수온이 연중 20℃를 넘지 않고, 용존 산소량이 9ppm을 넘는 1급수 맑은 계곡에서 서식하는 냉수성 토종 민물고기입니다.등쪽은 짙은 푸른색에 까만 반점, 배쪽은 은백색이고, 측면에 나타나 있는 비행기 창 모양의 특유의 무늬인 파마크(parrmark)로 인해 자태가 아름다워 ‘계곡의 여왕' 이라 불립니다. 백두산 인근의 양강도에서는 고혈압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산천어 요리가 고급요리로 자리잡고 있으며, 북한에서는 국방위원장의 보양식,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대만에서는 보물 물고기(국보어/國寶魚)로 보호하고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양강장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행사라 웬만하면 주말보다는 평일을, 현장예약보다는 사전예약을, 오후 시간대보다는 오전 시간대를 권장한다. 화천산천어축제는 말 그대로 얼어 붙은 강 위에서 산천어를 잡는 얼음낚시 행사다. 본인이 이미 소유하고 있는 낚시용품이 있다면 그대로 가져가도 좋고, 아니면 행사장에서 싼값에 임시 낚시용품을 구매할 수도 있다. 그렇게 낚시용품을 가지고 얼음장 위에 가서 뚫어놓은 얼음 구멍에 낚시대를 던지면 그만이다. 낚시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지나가는 스태프 분들에게 물어보면 아주 친절히 방법을 설명해주신다. 이 행사의 단점이라면 산천어를 낚는 즐거움은 철저하게 조사(釣士)의 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여러 마리를 낚을 수도 있지만, 한 시간이 넘도록 단 한 마리도 못 낚을 수 있다. 워낙 추운 행사인 만큼 추위에 지쳐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기사 낚시꾼들에게 들어보면 그 또한 낚시의 미학이라고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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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낚시에 성공하여 산천어 몇 마리를 확보하면 그대로 가지고 가 회로 떠먹거나 구이로 구워먹을 수도 있다. 회를 무척이나 사랑하지만 산천어는 구워먹는 편이 훨씬 나은 거 같다. 한 마리도 낚지 못해 먹지도 못하는 건가 상심에 잠길 필요는 없다. 행사장 근처에 산천어를 활용한 음식을 내어 파는 식당들도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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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산천어축제는 얼음낚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낚시꾼들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야간낚시도 가능하며, 반팔 반바지를 입고 얼음물에 들어가 맨손으로 산천어를 잡는 행사, 얼음썰매와 아이스 스케이팅 등등 얼음을 활용한 거의 모든 놀거리들이 준비되어 있으니, 추위로 인한 건강만 조심할 자신이 있다면 하루 종일 놀아도 지루할 틈이 없을 것이다. 지루해지기 전에 몸이 먼저 지치게 된다.



산타클로스에게 편지 쓰기

산타클로스는 실제로 존재하는가 허구인가?! 산타클로스의 존재는 믿는 자들의 축복이다. 핀란드의 '로바니에미'라는 곳이 산타클로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핀란드의 로바니에미가 산타클로스의 고향이 된 건 현대에 들어선 핀란드 정부의 적극적인 브랜딩 덕분이었지만, 어쨌든 오늘날 가장 큰 산타마을을 보유하고 있으며, 산타를 믿는 자들은 로바니에미를 산타클로스의 고향으로 굳게 믿고 있다. 산타클로스가 전세계 어린아이들을 총괄하기 여간 어렵다보니 전세계 곳곳에 산타클로스우체국을 두어 세계인들과 소통하고 있다. 대한민국에도 산타클로스우체국이 1점 들어와 있으니, 강원도 화천에 있는 산타클로스우체국 대한민국 본점이다. 우리가 유일하게 산타클로스와 소통할 수 있는 곳이며, 365일 내내 언제든 이 우체국을 방문하여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쓰면 그 편지는 핀란드 로바니에미에 있는 산타우체국 본점으로 우편발송된다. 편지를 보내면 그 해 크리스마스 시즌에 답장까지 받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핀란드어를 알아야 하는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한국어로 작성해도 알아서 번역되어 전달되고, 또한 산타클로스의 답장도 잘 번역되어 도착한다. 이보다 더한 겨울철의 낭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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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예수의 탄생일이라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예수의 정확한 출생연도와 날짜는 기록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즉 성탄절은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이지 예수가 태어난 날이 아니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가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은 1월 6일이었다. 그러다가 336년 로마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본인을 태양신으로 신격화하기 위해 태양신의 신전을 만드는 등 태양신과 관련된 각종 문화가 로마에 정착되는데 시리아에서 12월 25일을 '무적 태양신의 탄생일‘로 삼는 전통이 로마로 넘어왔다. 로마가 크리스트교화 되는 과정에서 로마의 기존 기념일들에 기독교적 의미를 부여하였는데, 성탄을 기념하던 크리스마스가 1월 6일에서 12월 25일로 바뀌었고, 350년 교황 율리오 1세가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공식화하였다. 그레고리우스력이 아닌 율리우스력의 전통이 짙게 배어있는 정교회 국가들에서는 12월 25일 대신 1월 7일에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극히 일부 국가는 여전히 1월 6일에 크리스마스를 지낸다. 12월 25일에서부터 1월 6일까지 쭉 크리스마스로 기념하는 곳들도 있다.


그렇다면 산타클로스의 개념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산타클로스의 ‘산타’는 Saint, 즉 ‘성 니콜라스’를 뜻한다. 성 니콜라스는 비잔틴 제국의 주교로 여러 선행들로 유명하여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성 니콜라스를 기리는 축일 12월 6일에 프랑스의 어느 한 수도원에서 수녀들이 성 니콜라스를 기리는 동시에 가난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에게 선물을 베푸는 행사는 점차 관례로 굳어지더니 언제부터 성 니콜라스로 변장한 사람들이 아이들에게 몰래 선물을 놓고 가는 풍습이 생기고 혹은 도덕적으로 나쁜 아이들을 혼내주는 설화까지 생겼다. 성 니콜라스의 문화는 인근 기념일이었던 크리스마스와 자연스레 합쳐졌고 19세기경부터 산타클로스가 보편화되었다. 북유럽이 결부된 건 게르만 문화와 크리스트교 문화가 합쳐진 결과물로, 게르만의 후예들은 산타클로스를 북유럽 신화의 오딘과 연결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유럽 신화의 원산지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산타마을이 많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산천어커피박물관에서 커피 한 잔의 충만함을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화천'은 산천어축제보다는 거례리에 있는 느티나무로 알려졌을 것이다. 무려 400년이 된 이 나무는 '나홀로나무' '왕따나무' 등등의 별칭이 있지만 '사랑나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린다. 북한강변에 자리하여 과거에는 강을 지나가던 배를 향해 인사를 건넸을 것이며, 오늘날에는 청정한 북한강과 강원도의 잘생긴 산들을 병풍삼아 방문객들에게 탁 트인 호방함을 선사하고 있다. 겨울철 거례리사랑나무는 풍성한 생명력을 뽐내보이진 못하지만, 은하수처럼 놓인 하얀 눈밭 위에 굳건하게 서 있으며 이튿날 아침의 햇빛 조각을 나뭇가지에 걸친다. 그 기운을 받아 안전하고 재미있는 이튿날의 여행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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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한창 산천어축제 행사를 치렀던 시내로 돌아온다. 산천어축제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은 산타클로스우체국 대한민국 본점과 산천어커피박물관을 함께 찾는다. 산천어커피박물관은 커피유물 수집가인 제임스 리가 30년간 전세계에서 모아온 커피 도구들을 기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미국에서 커피를 전문적으로 배워왔다는 교포 제임스 리는 현재 산천어커피박물관장으로 있다. 살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도구들을 수집했는지, 그 집착에 감탄하게 되고, 또 이것을 보존하고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을 세웠다는 것도 존경스러울 뿐이다. 산천어커피박물관에서는 제임스 리의 수집품들을 구경하면서 커피에 대한 짤막한 지식들도 배워갈 수 있다. 국가별 혹은 문화별 커피도구들을 조망하면서 각 문화의 차이까지도 사유할 수 있으니, 예술과 교육과 관광의 모든 기능을 담당하는 알찬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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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현대인의 필수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커피. 이제는 기호식품으로 분류되기 어려울조차 커피는 전세계를 아우르고 모든 문화권을 묶어주는 음료다. 6~7세기경 에티오피아의 목동이었던 '칼디'가 커피 열매를 먹고 흥분하며 뛰어다니는 염소를 보고는 자기도 먹어봤더니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일화가 커피 최초의 시작이다. 기분이 좋아지고 졸음을 방지해 준다는 점에서 에티오피아의 종교 사원에서 수양에 도움이 되는 신비의 열매라면서 유명해졌고, 에티오피아의 농부들도 자생하는 커피 열매를 끓여서 죽이나 약으로 먹기도 했다고 한다. 9세기경 커피는 아라비아 지역의 이슬람권 국가로 전파되어, 역시나 큰 인기를 끌었다. 처음에는 이슬람 성직자에게만 허용되었으나 그 누구도 커피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다만 이슬람권에서는 커피가 다른 문화권으로는 확산되지 않도록 막았으나, 12~13세기경 십자군 전쟁 차 중동 지역에 들어온 유럽인들이 커피를 목격하였고 크리스트교 문화권으로도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크리스트교계에선 이슬람인들이 먹던 음료라며 커피의 확산을 막으려고 했지만, 인류 역사상 동서고금 커피의 확산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끝내 크리스트교에서도 커피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슬람권에서는 차라리 커피가 유럽으로 퍼진 거 커피 무역 독점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기로 했다. 도저히 커피 공급은 커피 수요를 따라가지를 못했으나, 신항로와 신대륙 개척에 나선 유럽 열강들이 인도와 아시아 국가에서 플랜테이션하며 커피 공급을 충족시켰다.


커피 존

이렇듯 커피는 특정 기후권에서만 재배될 수 있는 열매다. 남북 양회귀선(북위 25도, 남위 25도) 사이의 벨트지대(커피나무가 자란다고 하여 '커피 존'이라고도 한다)에서만 재배되며 평균 기온은 약 약 20°C 안팎, 강우량은 1,500~1,600mm를 따지는 아주 까다로운 녀석이다. 그만큼 인류에게 환희와 일상을 선사해주니 사실 존재만으로도 고맙지만. 커피의 국제시장 점유율은 브라질을 필두로 콜롬비아가 그 뒤를 이으며 이 두 국가가 전체 생산의 40%, 그리고 멕시코, 과테말라 등 중남미의 약 20개국이 합쳐 거의 65%를 공급하고 있다.



그런데 커피콩 하나 안 나는 이탈리아에서 왜 본인들을 커피의 종주국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일까? 커피는 열매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고 음료로 가공이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커피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의 '에스프레소'가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기계는 1906년 이탈리아에서 발명되었다. 압력은 9기압 정도, 온도는 90°C 전후에서 20초 안에 30ml의 커피를 뽑아낸다. 높은 압력으로 순식간에 추출해내기 때문에 '에스프레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에스프레소는 '데미타세'라는 조그만 잔에 담아서 마셔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며, 에스프레소 커피를 뽑으면 '크레마'라는 옅은 갈색의 크림층이 생기는데 이 '크레마'가 에스프레소의 질을 결정한다고 한다.


전시를 다 구경하면 입장권으로 커피 한 잔을 무료로 주문할 수 있다. 하루의 시작은 역시 커피고, 여행의 시작도 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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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랑캐를 무찌른 호수 '파로호'

산천어축제 이전에 화천 관광을 책임지던 곳은 파로호였다. 어느덧 파로호는 공식명칭이 되었으나 엄밀히 따진 정식명칭은 화천호다. 화천호는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 화천수력발전소로 만들어져 수도권에 전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로서는 꽤 큰 규모였는데, 해방 후 화천군이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이 중요한 화천수력발전소를 북한에 빼앗기고 말았다. 다행히 6.25 한국전쟁을 거쳐 휴전선이 새롭게 그어져 화천수력발전소는 대한민국의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6.25 한국전쟁 당시 격전이 이루어졌던 곳이 여기 화천호였다. 6.25 한국전쟁을 통해 화천호의 이름이 파로호가 될 만큼 '파로호 전투'는 6.25 전쟁에서 기념비적인 전투였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의 허리를 끊는데 성공한 UN군과 국군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반격 수준이 아니라 38선을 넘어 압록강과 두만강 직전까지 올라가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었다. 흔히 UN군과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치고 올라가자 안보상 위기의식을 느낀 중국이 중공군을 투입시켰다고 알려져 있지만, 시기적으로 중공군은 일찌감치 압록강을 넘어 우리 한반도 땅에 이미 주둔 중이었습니다. 우리 국군과 UN군이 38선을 넘어 평양 공격을 시작할 즈음 1950년 10월 중순 이미 30만 명의 중공군 13병단이 압록강을 넘은 상태였다. 1950년 11월부터 중공군의 반격이 시작하였고, 이듬해 1951년 5월까지 총 5차례에 걸쳐 공세를 퍼부었다. 이중 가장 큰 규모의 공세는 마지막 5차 공세였다. 5차 공세에는 중공군 3개의 병단과 북한군까지 합세하여 95만~100만에 이르는 병력이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니, 이 5차 공세는 '춘계공세'라고 별도의 이름이 붙을 정도였다. 612년 수양제의 고구려 침입 이후 두 번째로 100만 명의 외적이 한반도를 공격한 전쟁이었다. 중공군의 남진방향은 크게 세 갈래로, 가장 서쪽은 경기도 파주 방면, 가운데는 연천과 포천을 지나 경기도 가평과 양평 방면, 가장 동쪽이 강원도 인제까지 내려오는 강원도 산악지대 방면이다. 가장 서쪽 경기도 파주 방면은 서울로 직공하는 루트였고, 서울 쪽으로 투입된 병력만 55만이었다. 파주를 사수하던 UN군의 8배~10배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1951년 4월 22일부터 파주시 적성면의 설마리에서 영국의 글로스터 대대가 3일간 항전해준 덕에 시간을 벌어주었고, 파주의 임진강 하류 문산에서 국군 1사단이 중공군에게 최대한 큰 피해를 주고 철수하여, 서쪽 방면 중공군의 진격은 처음부터 삐그덕거렸다. 가운데 연천과 포천을 지나 경기도 가평과 양평으로 향하는 중공군은 서쪽에서 서울로 진격하는 중공군을 백업하는 것이 임무였다.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UN군은 연천과 포천에서부터 가평까지 중공군에게 밀렸지만, 가평전투에서 영연방 국가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군의 분전으로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시켰다. 캐나다군, 호주군, 뉴질랜드군 스스로도 6.25 한국전쟁에서 가장 기념하는 전투가 가평 전투이며, 가평 전투의 승리로 사실상 서부전선의 중공군은 서울 진격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서부전선에서 중공군은 파주를 거쳐 의정부까지 내려왔지만 중부전선 중공군의 협조가 어려워지니 더 이상의 진군은 무리였다. 중공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의정부에서 서울로 무리해서라도 중공군을 진군시켰지만 북한산까지만 내려오고 미군의 강력한 화력 공세에 진격은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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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의 5차 공세에서 서부전선과 중부전선은 UN군과 국군의 눈부신 승리였지만, 동부전선은 상황이 달랐다. 동부전선, 지금의 강원도 인제 일대에는 우리 국군 부대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서울 점령에 실패한 펑더화이는 차라리 동부전선에서 국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면서 대거 남하하는 것을 5월 공세의 목표로 삼고, 서부전선에 있던 중공군 3병단과 9병단 병력 25만 명을 강원도 인제로 보냈다. 예상치 못한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대규모 공세에 아니나 다를까 국군은 빠르게 무너졌다. 강원도 인제에 있던 국군 5사단, 7사단, 9사단, 3사단 네 개 사단은 각자의 루트에 따라 철수하였다. 이중 강원도 현리에 잠시 주둔 중이던 국군 9사단과 3사단은 강원도 평창을 목표로 철수를 재개했는데, 현리부터 평창까지의 길은 매복하기 딱 좋은 조건이었고, '오미재' 고개에서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가 국군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인 '현리 전투'이다. 현리 전투로 국군 9사단과 3사단은 무기와 장비까지 버리며 줄행랑을 쳐, 강원도 평창에 도착한 국군의 병력은 처음 병력의 40% 정도에 불과했다. 첫 공격에 대성공을 한 중공군은 그대로 강원도 더 남쪽으로 남진했지만 미군 제2사단이 강원도 홍천을 사수하고, 강릉을 막고 있던 수도사단에서 연대 병력을 평창 대관령으로 보내 대관령을 사수하면서 동부전선에서 중공군의 공격도 저지되었다.


동부전선에서 급한 불을 껐고, 곧이어 또 한번 희소식이 전달됐다. 중공군이 동부전선에서 남진하고 있던 사이, 펑더화이는 다시 한번 중부전선 진입을 시도하기로 하였다. 중부전선을 통해 경기도 동부를 장악하면 서울 점령을 한 번 더 시도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공군 19병단의 63군이 가평을 통해 경기도 양평으로 남진했는데, 국군 6사단이 양평의 용문산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었다. 용문산 전투 때 중공군 63군 피해가 4000~5000명에 이르렀고, 동시에 동부전선도 막히게 되면서 이로써 중공군의 5차 공세는 완전한 실패로 끝이 났다. UN군 총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낸 것에 만족하지 않고, 대대적인 반격을 지시했다. 모든 전선에서 UN군의 진격에 중공군은 각 부대별 연락과 통신이 모두 단절되었고 전열이 완전히 와해된 채 각자 철수하는 아수라장 같은 철수였다. 이때 벤플리트 장군과 이승만 대통령이 중요하게 강조한 곳이 화천이었다. 화천에는 위에서 말한 화천수력발전소가 있고, 또 화천은 지리적으로 철원을 포함한 '철의 삼각지대'로 나아갈 수 있는 요충지였기에, 추후 철의 삼각지대 진공을 생각한다면 화천을 반드시 기점으로 삼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공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은 '철의 삼각지대'를 후퇴목표지점으로 삼고 각 부대별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현리 전투에서 승리 후 평창과 대관령까지 내려와 있던 동부전선의 중공군 부대들은 '철의 삼각지대'로 가기 위해선 북한강을 도강해야 했고, 가장 가까이서 북한강을 도강할 수 있는 지점이 강원도 화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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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과 대관령까지 내려가 있던 중공군 병력 9병단의 20군, 12군, 27군은 현리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의 시점이었기에 이 세 병력을 추격할 UN군 내지 국군은 없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용문산 전투 이후 강원도 춘천에 배치되어 있던 미군 제7사단과 국군 제6사단이 북한강으로 향하던 중공군 9병단의 20군, 12군, 27군을 쫓기로 하였다. 북한강은 폭이 넓은 강이고 철수는 시간이 촉박한 만큼, 중공군은 부교를 만들어 도강하긴 어려웠다. 화천호가 있는 화천저수지의 공도교를 통하는 길이 그나마 쉽게 건널 수 있는 길이었다. 미군 제7사단은 화천호 너머에 주둔하여 건너오는 중공군을 막기로 하고, 국군 6사단은 화천호로 향하는 중공군을 뒤에서 추격하기로 하였다. 국군 6사단이 화천저수지 인근으로 오기 전에 중공군 9병단 중 20군은 화천저수지를 통과해 앞에서 대기하던 미군 제7사단과 맞붙었고, 국군 6사단은 대신 뒤이어 화천저수지로 오던 9병단의 12군과 27군을 막았다. 본격적인 교전 전에 국군 6사단의 2연대와 7연대가 화천저수지 인근 고지대를 점령하여 중공군의 이동방향을 파악하였고, 6사단의 보고에 따라 화천저수지로 향하던 중공군에 미군이 엄청난 폭격을 가했다. 엄청난 폭격 후 2연대가 먼저 화천저수지로 향해 중공군을 뒤에서 밀어냈는데, 승산이 없던 중공군은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그대로 화천저수지로 뛰어들었고, 거의 대부분이 익사하고 말았다. 6사단 2연대에 이어 6사단 7연대도 화천저수지로 향하였다. 그 길에 미군 폭격으로 타버린 중공군 전사들이 즐비했다고 한다. 결국 중공군 잔존병력들은 그대로 항복해버리니, 이 전투가 '파로호 전투'이다. 파로호 전투가 끝나고 하루 이틀 뒤 화천호 안에 잠겨 있던 중공군 시체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는데, 그 넓은 화천호가 새까맣게 될 정도였다고 한다. 말그대로 중공군이 섬멸되어버린, 중공군의 5차 공세를 마무리짓는 화룡점정 같은 전투였다. 파로호 전투로 인한 중공군의 사상자는 1만 5천~2만 5천으로 추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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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6.25전쟁이 끝나고 이때의 전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화천저수지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군 6사단의 공로를 치하했고, 화천호를 “오랑캐를 무찌른 호수”라는 뜻의 ‘파로호’로 이름을 바꾸고 친필 비석까지 세워두며 화천호는 '파로호'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해졌다.


저 산너머 평화의 댐으로 가는 길이다

파로호를 가장 멋있게 굽어볼 수 있는 곳은 파로호 전망대까지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야 늘 그렇듯 경치야 보장되지만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보니 부담이 가는 게 사실이다. 파로호는 선착장까지만 가도 넓디 넓은 광활함을 만끽할 수는 있다. 허름한 횟집들이 즐비한 곳에 주차장도 잘 마련되어 있어 눈 덮힌 산들을 병풍으로 바라보는 파로호도 퍽 즐길만 하다. 다만 겨울철 파로호의 유일한 단점은 유람선을 운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동절기만 아니라면 유람선을 탈 수 있고, 유람선을 타고 약 1시간~1시간 30분 정도 가면 백암산으로 올라가 평화의 댐까지 갈 수 있다. 평화의 댐은 80년대에 만들어진 또 하나의 수력발전소이다. 5공 시절 북한에서 금강산 일대에 대규모 저수지 겸 댐을 건설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정부는 안보상의 불안을 겪는다. 금강산에서 큰 댐을 만들었다가 혹시라도 북한에서 댐을 터뜨리면 수해는 고스란히 한국이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5공 정부는 북한의 수공에 대항하기 위한 댐을 하나 더 건설하기로 하였고 1987년 착공을 시작한 평화의 댐은 6공 시절이었던 1989년 완공되었다. 명칭은 '댐'이지만 건립 배경은 별로 '평화'스럽진 않았던 셈이다. 평화의 댐 건설을 주도했던 건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12.12 군사반란의 핵심멤버였으며 하나회 일원이기도 했던 장세동이었다.

사진출처: 트래블아이

안기부 부장이었던 장세동은 정부와 언론에 북한의 수공 위협을 대대적으로 선전했고, 엄청난 불안감에 평화의 댐 건설비용을 위한 국민들의 엄청난 모금 운동도 있었다. 하지만 평화의 댐 건립과 과정이 뭔가 석연치 않았던 점들이 많았던 것인지, 훗날 김영삼 대통령은 감사원에 '평화의 댐' 건설 과정에 대한 면밀한 조사를 요구했다. 조서 결과 북한이 금강산댐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나 수공이니 위협이니 모든 게 다 근거없었던 대국민 사기극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늘 역사라는 게 아이러니하다. 2002년 실제로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흙탕물을 방류해버렸고, 평화의 댐이 무너질 위기까지 갔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는 평화의 댐 보호 측면에서 댐의 확장공사를 단행했고 노무현 정부 때 완공되었다. 댐 자체는 평화와 거리가 먼 사연을 갖고 있지만, 인근에는 '세계 평화의종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분쟁의 역사를 겪었거나 분쟁중인 국가 60여 개국의 탄피 1만관을 수거해 종을 만들었다. 결과적으로는 평화를 염원하는 댐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겨울철이라 또 놓쳐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산행이다. 어느 강원도의 지역이 그렇듯 화천도 수려한 경관의 숲을 가지고 있다. 화천의 주산으로 삼고 있는 백암산은 철원까지 걸쳐 있으며, 6.25 전쟁의 마지막 전투인 금성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해발 1,178m의 높은 곳에서 강원도 숲 절경의 진면목을 굽어볼 수 있다. 산행이 부담스러우면 백암산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백암산 케이블카는 우리나라 최북단에 위치한 최고 높이의 케이블카이기도 하다. 높은 산이다보니 금강산과 DMZ 지역까지 굽어볼 수 있고,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DMZ 지역 특유의 야생성도 감상할 수 있다. 화천은 백암산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마다 한국 특유의 지질경관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런 곳을 조선시대 문인들이 그냥 지나쳤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지나쳤더라도 아무런 기행기나 그림을 안 만들었을 리도 없다. 조선 후기 김상헌의 손자였던 곡운 김수증은 화천을 방문하고는 북한강의 지류 하천이 산길에 따라 부딪히고 꺾이는 곳을 갖다오고는, 하천이 9번 꺾인다고 하여 '구곡'이라 불렀으며, 자신의 호를 따와 '곡운구곡'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각각의 지점마다 '방화계(榜花溪)', '청옥협(靑玉峽)', '신녀협(神女峽)', '백운담(白雲)', '명옥뢰(鳴玉瀨)', '와룡담(臥龍潭)', '명월계(明月溪)', '융의연(隆義淵)', '첩석대(疊石坮)’ 라는 이름까지 지어주었으며, 평소 친했던 화가 조세걸에게 '곡운구곡'의 그림을 그리게 하니 이 그림이 <곡운구곡도>이다. 그 덕에 녹음이 푸르를 때 화천은 이 곡운구곡이 명승지로 회자되곤 한다. <곡운구곡도>의 그림은 오늘날 곡운구곡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고 한다. 김수증이라고 어디 친구에게 그림만 그리게 하고 끝냈을까. 이 실경산수화에 김수증도 각 곡마다 본인의 감상을 시조로 남기니, 이 시조로 화천 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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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구곡도


제1곡 방화계.

잔돌이 구른 옥 같은 물이 얼굴로 튀어 올라

떨어진 복사꽃을 푸른 물줄기가 훔쳐가니

찾는 이 어리둥절해 개도 덩달아 짖는구나


제2곡 청옥협.

우뚝한 산봉우리에 파란 옥을 세워 놓은 듯

안개는 정처없이 단풍 위에 내려앉고

속세의 떼를 겹겹이 막아 돌사다리 신나네


제3곡 신녀협.

선녀는 잠이 들고 냇물은 퉁소를 불어

노송에 걸린 달이 물고기 비춘 찰나

흰 바위 펄펄 날다가 내 흑심을 쓸어가네


제4곡 백운담.

개울가 푸른 바위 풀벌레 합창 소리

새침한 솔 그림자가 자갈밭을 배회하자

흰 구름은 물장구 치고 연못 위에서 넘실대네


제5곡 명옥뢰.

깊은 밤 급류 소리 큰 뫼에 메아리쳐

둥근 달 비친 솔밭 외로운 저 거문고

찬 구슬 아래 쟁쟁하여 명치 끝을 울리네


제6곡 와룡담.

초록색 투명한 못 모래톱 어른거려

세상일 나 몰라라 물굽이 베개 삼거든

누운 용이 벌떡 일어나 망나니춤 추느니


제7곡 명월계.

개천이 평평하니 녹수도 앝구나

잔잔히 이는 파문이 달빛을 흩뜨려도

드리운 장송 그림자가 물속에 들어가 차갑네


제8곡 융의연.

넓게 자리 잡아 그득히 괴인 큰 연못

이따금 보라색 구름이 홀로 오르내리네

유유한 피라미떼 턱을 괸 채로 바라보네


제9곡 첩석대.

건너편 층층바위 대를 이뤄 맑은 내에 비치네

흐르는 여울물 끝은 솔바람과 급하니

그 울림소리 동천에 가득 요란하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책 추천

- 이외수 <장수하늘소>

화천을 대표하는 문학가라고 하면 '이외수' 작가가 대표적일 겁니다. 태어난 곳은 경상남도 함양이었지만 대학시절을 춘천에서 보낸 뒤 이외수 작가는 강원도 곳곳에서 생활하다가 화천에 자리를 잡습니다. 눈을 감은 곳도 화천이죠. 이외수 작가가 머물던 동네가 '감성마을'이란 곳으로 이외수 문학관이 조성되었으며, 많은 문학인들이나 문학소년소녀들이 화천을 오면 찾는 마을이기도 하죠. 이외수 작가의 대표작이야 많지만 여기서 추천드리는 작품은 <장수하늘소>라는 중편소설입니다. 소설 속 '동원시'와 '장암산'은 모두 만들어진 배경이지만, 화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춘천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동원시에 사는 형국과 형기 형제에 관한 이야기로, 세속적인 형 형국과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조짐을 풍겼던 동생 사이의 관계 속에서 물질적인 인간과 무결한 자연의 대비를 형상화합니다. '생명'이라는 관념에 대한 이외수 작가의 자연주의적이고 신화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 여행의 재미를 더 깊이! 여행지와 어울리는 영화 추천

- 박근영 감독의 <정말 먼 곳>

강원도 화천을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제작사인 '봄내필름'은 강원도 기반에서 늘 강원도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만들어 온 만큼, 강원도 특유의 그윽하고 토속적인 정취를 잘 담아냅니다. 미장센에도 강한 박근영 감독의 역량과 어우러져 강원도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죠. 다만 단순히 강원도의 경치만 느끼기에는 내용 자체는 무겁습니다. 영화 제목처럼 정말 먼 곳으로 끊임없이 도망쳐야 하는, 과연 영화 속 인물들이 마음 편하게 자리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 라는 안타까움을 자아내는 내용이죠. 언뜻 보면 퀴어영화이긴 하지만, 퀴어적 내용이 전부인 영화는 아닙니다. 그보다 사람 간의 공허함, 그러면서 결국 그 공허함을 사람 간의 관계로 채우는, 사람 사는 사회와 관계의 아이러니함을 고민해보게 하죠. 지금은 스타가 된 홍경 배우의 독립영화 스타 시절을 확인할 수도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