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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09. 2022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 부모가 위험한 이유(2)

은연중에 ‘우리 부모님은 나를 위해서 한평생 희생하셨으니까 이제는 내가 잘 해 드려야 해’라는 죄책감을 안고 산 자식이 비단 나 혼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경제적, 물리적으로는 독립을 했는데 이처럼 정신적인 독립을 하지 않은 자식들은 우리나라에 과연 얼마나 많을까. 누군가 통계를 낸다면 우리나라에서 성인 부모-성인 자식이 얼마나 의존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으리라.




‘아버지가 힘들게 일을 하시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낙은 술이고, 아버지는 자신이 힘들게 일하는 만큼 즉,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자신의 이런 모습을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어쩔 도리가 없고(엄마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고),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엄마의 알코올 의존증(중독)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얼핏 그럴듯한 말속에는 여러 의미가 혼재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아버지가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희생’을 하고 있으니 아버지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나머지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렸을 때 엄마가 나와 동생들에게 씌운 이 강력한 프레임(관점)을 하나씩 뜯어서 사실관계를 살펴보면,


- 아버지가 힘들게 일을 하신다: 일의 속성은 기본적으로 힘들다. 성과(결과물)의 압박을 견디고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며, 일은 필연적으로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일은 내막을 살펴보면 고충이 없거나 힘들지 않은 일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위험하고 육체적으로 고되고 사회적 지위가 낮은 서러움도 많이 받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이 일을 하기로 선택한 사람은 아버지 자신이다.


-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낙은 술이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이 술일뿐, 술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이것이야 말로 알코올 의존자(중독자)가 술을 마시고자 하는 전형적인 핑계에 불과하다. 엄마도 저간의 사정과 변명거리가 있겠지만 알코올 의존자의 행위를 제지는 못할 망정 결과적으로 동조해서 지지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 아버지는 자신이 힘들게 일하는 만큼 즉,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자신의 이런 모습을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아버지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술주정을, 자식들은 이를 넘어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서적 학대를 자행하는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다른 글에서 계속 말했지만 신체적이지 않은 정서적 폭력과 학대라 할지라도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화될 수 없다. 폭력은 폭력이고 학대는 학대이며 명백한 ‘잘못’이다.


어중간한 이 말은 아버지가 돈을 버는 행위가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과거 남편이 경제 활동을 하고 아내가 육아와 살림을 도맡는 가정 내 역할 구분이 분명한 시대에서 아버지가 경제적 책임을 다하는 일은 희생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이다. 희생이 아닌 한 가정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듯이 자식은 어떤 ‘선택’을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 시대에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하는 과정 없이 즉, 자식 유무를 선택한다는 발상을 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당연히 낳는 분위기였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식을 낳는 ‘선택’을 한 당사자는 결국 부모 자신들이다.


자녀가 성인이 되기 전까지 자녀의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를 해결하고, 경제적 지원을 하는 일은 부모로서 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다.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런 아주 아주 아주 아주 기초적인 자세를 갖추지 않고, 일이 너무 고되고 일하기 싫어서 자식 부양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면 이 사람은 자식을 낳으면 안 된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과정이 힘겨워서 자신의 인생을 자식에게 저당 잡혀 ‘억울하다’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자식은 부모에게 짐이 되고 부모를 억울하게 만든 일종의 ‘가해자’가 되어버린다. 부모가 낳아서 세상에 나왔고 그 과정에서 자식이 한 ‘선택’은 아무것도 없으니 뒤따를 ‘책임’도 없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자식은 부모를 ‘희생’시킨 ‘죄인’이 돼 근원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떠안고 살아간다.


부모가 미성년 자녀를 부양하는 일이 ‘희생’이라면 자녀는 앞으로 자신이 한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일은 뒤로하고, 갑자기 자신을 낳기로 한 부모의 ‘선택’을 ‘대신’ ‘책임’지는 사람이 돼야 한다. 부모가 느끼는 억울함을 해소하고,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부모가 자신에게 돈이나 물건 등을 맡긴 것도 아닌데, 난데없이 부모에게 일종의 대가를 지불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이 상황에서 정말로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 성인으로서 제 밥벌이를 하는 부모일까. 몰염치한 부모를 만난 ‘죄’로 부모가 떠넘긴 짐을 떠안는 ‘희생’을 하는 자식일까.


- 엄마는 어쩔 도리가 없다(엄마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다): 엄마의 말이 맞다. 나 자신도 변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타인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변화는 자신이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일어나며, 강한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특히, 중독성이 강한 술/도박/마약/외도/폭력/사기를 일삼는 사람은 바꾸려 하지 말고 가급적 빠르게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 알코올 의존증(중독) 아버지가 변하지 않을 테니, 그런 아버지를 자식들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경제력이 없고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정상(이라고 믿는) 가족을 유지하고 싶은 엄마가 보인 일종의 현실 회피이자 자녀 방임이며, 잘못된 강요이다. 엄마는 최근에도 ‘너희가 어렸을 때 자신이 아빠와 너희 사이를 더 잘 중재하지 못해서 후회한다’라고 말씀을 하셨다. 엄마는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방관자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엄마가 하셨어야 할 역할은 중재자가 아니라 남편의 정서적 학대와 폭력에서 어린 자녀를 보호하고, 자녀의 다친 마음을 보살피고 어루만지는 일이었다.


마음이 연약한 엄마는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고 평생 천사처럼 착한 사람으로 살고 싶으신 모양이다. 너무 착해도 병이라던데 딱 엄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인간은 참 어리석고 잘 변하지 않는 존재인가 싶다.




희생: 다른 사람이나 어떤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 따위를 바치거나 버림. 또는 그것을 빼앗김.


희생의 사전적 정의이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한 경제적 활동을 희생이라고 주장하는데, 나는 아버지의 목숨, 재산, 명예, 이익을 빼앗은 적이 없다.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서 목숨, 재산, 명예, 이익을 버리는 희생을 감수한 적이 없다. 아버지는 희생이 아니라 부모로서 마땅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부모이자 어른으로서 자식을 낳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졌을 뿐이다. 자신이 억울하게 생각하는 고된 직업은 이미 자식이 태어나기 전에 자신이 선택한 일이며, 그 선택을 자식은 강요한 적도,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강요할 수도 없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희생이라고 치부하면 곤란하다.


물론, 목숨을 담보로 장기이식을 하는 수술을 결정하는 등 가족 사이에서도 희생하고 은혜를 입는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자식의 이런 요구는 절대 들어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업을 실패해서 금전적으로 곤란한 자식에게 노후 자산인 한 채 있는 집을 저당 잡혀서 자금을 융통해준다면 이는 부모의 명백한 희생이다. 자신들의 여유로운 노후를 희생한, 여윳돈이 아니라 생존에 필요한 돈을 빼앗겼다고 할 수 있다. 예전에 아들인 오빠나 남동생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학비를 보태려고 딸인 누나나 여동생이 일찌감치 공장 노동자로 취업 전선에 나선 일은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이런 정서와 자녀양육이 보편적이라고 했을지라도 말이다.


이렇듯 희생은 당연하지 않기에 가족이라도 결코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해서도 안 된다. 우리나라는 가족을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는 정서가 뿌리가 깊은데 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지. 누군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존재라면 나는 평생 갚아도 부족한 커다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 당연하다’라고 양립할 수 없는 ‘희생’과 ‘당연하다’를 동일선상에 놓고 섣불리 말하는 사람에게 ‘가족을 위해서 희생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아마 대부분 ‘의무’와 ‘책임’, ‘희생’을 헷갈려서 진정한 희생이 무엇인지 착각하고 있으리라. 정말로 희생한 사람은 그 결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함부로 ‘희생이 당연하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세상이 떠들썩하게 알도록 자신이 희생한 사실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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