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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펄 Jun 07. 2022

자식을 위해서 희생한 부모가 위험한 이유(1)

자식의 죄책감과 허구의 독립의 근원

“부모님과 관계는 어떠세요?”

“음…… 오히려 아빠와 관계가 좋은 것 같아요. 연락을 하거나 그런 관계는 아니지만 오히려 연결 지점이 없고 저를 그냥 내버려 두시고 아빠는 또 아빠 인생을 잘 살아가시고. 돌이켜보면 그러면서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결국은 다 아빠가 아낌없이 금전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지원을 해주셨더라고요. 그야말로 희생이죠. 저도 제가 아빠의 희생으로 이만큼 살고 있다고 아주 잘 알고 있어요.”

“아빠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군요.”

_브런치 글 <#심리상담 1일 차(2022.01.25)> 중에서


첫 상담에서 무심결에 내뱉은 이 말속에 나와 아버지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고스란히 녹아있다. 알코올 의존증(중독) 아버지가 오랜 세월 집안에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정서적 학대를 자행했는데도 이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심지어 아버지와 관계가 ‘좋다’라고 착각한 이유는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제대로 해냈기 때문이다. 20대에는 아버지의 경제적 지원과 심리적 지지 덕분에 영국 유학과 거주지 독립이라는 내 절실한 욕망을 실현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정서적 학대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이면서 모순적이게도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하나 더 고백하자면 부모님께 사립대학교 등록금이라는 빚도 하나 더 지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대학 등록금까지는 자신들이 지원하겠다고 말씀하셨고, 자식의 대학 진학은 학력이 높지 않은 부모님의 강한 염원이어서, 부모가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하는 일이 당연한 줄 알았다. 변명을 하자면 당시 내 주변 많은 대학 친구들이 생활비조차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를 할 필요 없이 공부에만 매진하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 되는 우리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경제력이 높은 편이어서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부끄러운 사실은 세상 물정을 얼마나 몰랐는지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학자금 대출이 무엇인지 몰랐고, 그러니 졸업 뒤에도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허덕인다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당시에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쟁이었던 반값등록금이 왜 이슈가 되는지도 잘 공감하지 못했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준이 형편없다고 깨닫고는 일이 년 아무리 시사상식을 외우고 작문과 논술 쓰기 등을 훈련하더라도 이 아둔함이 몇 년 안에 나아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해서 당시 꿈꾸던 기자를 미련 없이 포기했다.


이렇게 말하면 꼭 우리집이 부자 같은데 다른 글에서 여러 번 얘기했지만 십 대 때 신고 입던 신발이나 옷은 1~2만 원 대였고 3만 원 이상 넘은 적은 거의 없었다. 야자 시간에 친구가 선생님 몰래 퓨마 매장에 가서 눈여겨본 7만 원짜리 신발을 산다고 했을 때, ‘세상에! 7만 원 하는 신발도 있구나. 어떻게 신발을 7만 원이나 주고 살 수 있지?’ 내심 무척 놀랐다. 내가 소비경험이 적었다 뿐이지 밥을 굶거나 공과금이나 수업료를 밀리지는 않았으니 우리집은 경제적 하층도 상층도 아닌 중상층 범위에 속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편, 이십 대 중반까지 왜 이리 경제관념과 세상 물정에 어둡게 성장했는지는 기회가 되면 다른 글에서 풀어보려고 한다.


(오해를 줄이고자 좀 더 부연 설명을 하면 20대 때 전적으로 부모의 경제적 지원에 의존하지는 않았다. 생활비는 과외 아르바이트로 벌었고, 어학연수도 이 돈을 저축해서 일부 비용을 충당했고, 대학등록금도 두 학기 정도는 성적 장학금과 그 외 장학금으로 낼 수 있었다.)




최근에 문득 첫 상담에서 ‘나는 아버지가 희생한 결과물이다. 아버지의 희생으로 이만큼 살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느끼고, 누구에게도 무시받지 말고 당당하게 잘 살아야 한다’라고 태연하게 한 말이 떠올랐다. 무엇보다 ‘희생’이라는 단어를 해맑은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는 데 놀라고 소름이 쫙 돋았다. 모가 나를 위해서 희생했다는 생각이 부모를 향한 내 끝없는 죄책감의 근원이며, 부모와의 감정적 탯줄을 끊지 못해서 진정한 독립을 하지 못하고 허구의 독립에 머무른 원인이라고 깨달았다.


그럼, 대체 나는 왜 부모님이 나를 위해 희생했다고 서른 중반이 되도록 한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었을까. 우선, 아버지가 자신의 경제 활동을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고 규정지었고, 대가족의 생계가 가족 중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달렸기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짠 프레임에 동조했으며, 10대 때 엄마가 폭력 성향이 짙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 논리도 결국은 아버지가 최소한 경제적 책임을 다했다는 이유였다. 엄마는 늘 ‘아버지가 힘들게 일을 하시고, 그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이자 낙은 술이고, 아버지는 자신이 힘들게 일하는 만큼 즉, 가족을 위해서 희생하는 만큼 자신의 이런 모습을 가족들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엄마는 어쩔 도리가 없고(엄마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고), 그러니 우리가 아버지를 이해해야 한다’라는 식이었다.


사실 경제적 궁핍함을 경험한 부모 세대가 자식을 경제적 어려움 없이 키우면 부모로서 역할을 제대로, 다 해냈다고 생각하는 크나큰 실수를 저지른 가정이 비단 우리 가정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남편이 돈을 벌고 아내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며, 여성의 경제 활동이 활발하지 않고 가계 경제를 오로지 남편의 수입에만 의지하는 구조였기에 자식에게 엄마처럼 말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으리라 생각한다.


내 모든 글에서 밝히고 있지만 이유불문하고 부모의 신체적/정신적 학대나 폭력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 백 번 양보해서 ‘그 시대는 다 그랬으니까’라고 자식이 덮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예전의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벌인 무자비한 체벌이나 사랑의 매도 같은 맥락이다), 그렇다고 자식의 뼛속 깊이 각인된 상처와 부정적이 영향이 저절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나는 운이 좋게 학창시절 내내 좋은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난 영향으로 마음이 제법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해서 이처럼 글을 쓰고 심리치료도 적극적으로 받으면서 점점 부모가 남긴 치명적인 부정적인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기질상 너무 여리고 예민한 사람은 자칫 우울증이나 조울증 등과 같은 정신질환에 시달리며 부모와 세상을 향해 분노했다가 자기 자신을 자책했다를 반복하며 평생 복잡한 심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오은영 박사가 자주 언급하듯이 부모가 경제적 이유를 자신들을 이해해야 하는 근거로 내걸면 부모에게 생존권을 기댈 수밖에 없는 아이(자식) 입장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어린아이도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살아가려면 돈은 꼭 필요하다고 무척 잘 알고 있다. 청소년이라도 아직 가치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은 시기라서 부모의 말이 뭔가 께름칙하고 이상하긴 한데 제대로 반박할 수 없고, 집을 떠나서 살 수는 없으니 뭔가 찜찜한 부모라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쪽으로 생각이 자꾸 기울 수밖에 없다. 사실 아이는 생존을 위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많은 아이들이 혼란스러움과 불편함, 불안감을 어떻게 해소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해하다가, 집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숨쉴 구멍을 찾고자 가출을 단행하는데, 나는 겁이 많은 아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출을 하거나 술, 담배, 약물, 학교 폭력, 편의점 털기 등 딱히 비행이라고 할 만한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얼마나 부모에게 잘 길든 착한 아이였는지 나 자신을 해치더라도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서 부모를 곤란하게 하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다. 심지어 부모님께 대든 적도 한 번도 없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가 두려웠던 것 같다. 며칠 전, 지금도 아버지를 보고 싶지 않고 그 사람과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가 사실은 깊은 내면에서 아버지를 공포스러운 존재로 각인해서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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