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책상 앞의 의자가 나를 기다린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사람의 마음

by 꿈꾸는 담쟁이

하루의 끝자락, 집 안의 음악소리, 물소리 등 소음이 잦아들고, 전자기기의 불빛도 하나둘 꺼질 무렵이면 나는 조용히 책상 앞으로 향한다. 거기엔 말이 없는 한 개의 의자가 있다.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묵묵히 나를 기다리는 의자.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나는 안다. 그 자리에 앉는 일은 내 하루의 마침표이며 동시에 쉼표다.


이상하게도 그 의자는 ‘나를 기다리는 존재’처럼 느낀다. 바쁘고 산만한 하루를 보낸 몸과 마음을 이끌고 그 자리에 앉으면, 나를 향한 온기가 느껴진다. 누군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오늘도 어김없이 거기에 앉는다. 책상 위에는 읽다 만 책이 있고, 구겨진 포스트잇이 한 장쯤 떠 있고, 어쩌면 어제 마신 커피의 얼룩이 그대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흔적들이 오히려 이 자리가 ‘나의 자리’임을 조용히 증명해준다.


책상 앞의 의자에 앉는 순간, 내 안의 리듬이 정돈되기 시작한다. 하루 종일 뒤엉켜 있던 생각들이 조용히 자리를 찾아가고, 표현되지 못한 감정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천천히 떠오른다. 신기하게도 책을 펼치기 전부터 마음이 차분해진다. 이곳에 앉으면 나를 회복시키는 어떤 의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결국 앉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다리를 구부리고, 등을 기대고, 평평한 책상 위에 몸과 마음을 동시에 올려두는 일. 그 자세 하나만으로도 바깥의 속도에서 벗어나, 내 안의 호흡으로 돌아온다. 이건 내가 다시 나로 돌아가는 준비다.


예전에는 이 자리에 앉는 일이 그다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업무를 보는 일상의 일부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 자리에 앉지 못한 날엔 내 하루가 어딘가 불안정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다른 공간에서는 이만큼 나 자신과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아무리 예쁜 카페나 조용한 도서관이라도, 내 책상만큼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집중이 안 되고 책 한 장도 넘기지 못할 때도 있다. 멍하니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어딘가 놓이는 느낌. 읽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자리에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하나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건 누가 대신해줄 수 없는 감각이다. 내가 나를 다시 찾아오는 행위, 그 시작점이 바로 이 조용한 의자다.


삶은 늘 바쁘고,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가끔은 이 자리에 앉을 틈조차 없이 하루가 지나가 버리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마음이 먼저 알아차린다. 책을 읽지 못한 아쉬움보다도, 이 자리에 앉지 못한 낯섦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제야 깨닫는다. 책상 앞의 의자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이 자리는 나에게 루틴이자 의식이다. “여기 앉는 순간부터 내가 다시 시작된다.”는 몸의 언어. 책을 펼치고, 문장을 따라가고, 생각을 정리하고, 감정을 바라보는 모든 일이 이곳에서 시작된다. 책상은 하루의 흐름을 회복시키는 입구다.


아이들도 그걸 안다. 아이들이 공부방에 오길 기다리며 나는 책상 앞에 먼저 조용히 앉는다. 아이들은 묻지 않아도 안다. “아, 선생님이 책 읽는 시간이구나.” 어떤 날은 아이가 내 옆에 조심스레 앉아 책을 펼친다.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책상을 두고 서로 다른 책을 읽는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다. 함께 앉아 각자의 마음을 읽는 시간, 말 없이 연결되는 그 조용한 동행이 책상 앞에서 시작된다.


의자는 내 마음의 방향을 되찾게 해주는 나침반이고, 내 감정을 놓치지 않게 붙잡아주는 다리이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 날에도,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도, 여기에 앉는다. 그 자체가 나를 지탱하는 어떤 행위가 되었다.


살다 보면 마음이 엉킬 때가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편함이 마음속에 오래 머물고, 어떤 감정은 정리되지 않은 채 자꾸만 반복된다. 그럴 땐 억지로 해결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책상 앞으로 간다. 의자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책 한 장을 넘기며 천천히 감정을 마주한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앞에 앉아 말없이 차를 마시듯, 그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 나아지는 기분이 드는 곳. 그게 이 자리다.


책상 앞의 의자가 나를 기다린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아무 말 없이, 어떤 판단도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그 의자처럼,

나도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나를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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