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지 않은 하루의 공백
가끔은 너무 바빠서 책을 한 줄도 읽지 못한 날이 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부딪치고, 수업을 준비하고, 끊임없이 울리는 카톡 알림을 들여다보며 분주하게 흘러가는 날. 그리고 밤이 되어 간신히 침대에 누웠을 때, 어김없이 스며드는 감정이 있다. “뭔가를 잃어버린 것 같아.”
지갑도, 휴대폰도 제자리에 있고, 일도 어떻게든 마무리했는데, 하루가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다. 겉으로는 할 일을 다 했지만, 마음속 어딘가에 비어 있는 공간이 남아 있다. 그게 바로 책장을 넘기지 못한 날에 찾아오는 허전함이다.
책을 읽는다는 건 활자를 따라가는 눈 운동이 아니다. 하루 중 가장 조용하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고, 내 감정과 마주하는 의식이다. 누군가의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그 문장이 내 안에서 작은 파동을 일으킨다. “이 말, 지금 내 마음 같아.” “아, 나도 이런 감정이 있었구나.” 그렇게 한 문장, 한 문단을 지나며 나는 내 안의 결을 더듬는다. 감정이 흐르고, 생각이 정리되고, 말로 꺼내지 못했던 것들이 천천히 형태를 갖춘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한 날은 그 모든 연결이 끊어진 채 하루가 휙 지나간다.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들조차 정리되지 않은 채 어수선하게 흘러가고, 감정은 머리맡 어딘가에 쌓인 먼지처럼 가라앉는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았더라도, 나 스스로도 왜 그렇게 예민했는지 생각해볼 틈이 없다. 그러다 보니 감정은 말없이 축적되고, 나는 점점 무뎌진다.
예전에 그런 날이 며칠씩 이어진 적이 있었다. 강의가 몰려 있고, 글 마감도 있고, 아이들 수업까지 준비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책은 눈앞에 뒀지만, 책장을 펼 만큼의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금요일 저녁, 모든 일정이 끝나고 비로소 시간이 생겼다. 그날, 조용히 차를 한 잔 내리고 창가에 앉았다.
책장 앞에 서서 가장 얇고 가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무언가를 이해하고 분석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집어 든 책이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였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문장이 아니라 숨결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감정, 내 안에 쌓여 있던 불편함들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마치 잊고 있던 내가 내 안으로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책을 읽지 못한 하루는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나와의 단절’이다. 단 한 페이지라도 넘기지 못한 날이면, 나는 나에게 미안해진다. 내 안에 머물 틈도 주지 않은 채, 타인의 말과 세상의 리듬에만 쫓기다 하루를 끝내버린 셈이니까. 책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 말을 거는 일이다. 아무리 짧은 문장이라도, 그것은 분명 나를 향한 질문이 되고, 나는 거기에 천천히 대답하며 나 자신을 회복해간다.
책을 읽지 못한 날에는 꿈조차 흐릿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 반면 책을 읽은 날에는 꿈이 선명하거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마음이 이상하게 가볍다. 책이 나와 나눈 대화가 그대로 꿈으로 이어진 듯한 느낌. 문장을 읽으며 무의식 속으로 내려간 감정들이 나를 다시 다독이는 것이다.
책을 읽지 못한 하루가 쌓이면, 삶은 점점 납작해진다. 감정은 굳고, 마음의 윤곽은 흐려지고, 하루하루가 비슷해진다. 몸은 계속 움직이지만, 마음은 제자리를 맴돈다. 마치 어떤 공간에 ‘나’라는 사람이 빠져 있는 느낌. 나는 살고 있다기보다, 버티고 있는 상태가 된다.
그럴수록 작은 독서의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 단 한 페이지라도, 단 한 문장이라도 나에게 돌아오는 시간. 책은 내 마음을 조용히 다시 접속시키는 장치이고, 나를 다시 일으키는 손이다. 아무도 몰라주는 마음을 문장 하나가 알아줄 때, 나는 다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책을 펼친다.
너무 지쳐버린 날에는 그림책 한 권이라도,
집중이 안 되는 날에는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라도,
내 마음이 닿는 한 줄을 찾기 위해 책장을 넘긴다.
그렇게 나의 하루가 다시 나에게로 되돌아온다.
읽는다는 건, 결국 나를 돌보는 일이라는 걸 나는 안다.
읽지 못한 날의 허전함은
그 돌봄이 빠진 하루의 쓸쓸한 공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