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첫 문장을 읽는 두려움과 설렘 사이

책을 펼칠 때 느끼는 감정의 결

by 꿈꾸는 담쟁이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약간의 긴장을 느낀다. 설렘만큼이나 조심스러운 감정이다. 그 책이 내게 말을 걸어줄지, 아니면 단단히 닫힌 채 나를 밀어낼지는 첫 문장, 바로 그 한 줄이 결정하는 것 같다.


그 문장을 만나는 순간, 나는 늘 감정을 숨긴 채 눈을 좁힌다. 언제나 처음 만나는 사람을 바라볼 때처럼. ‘이 사람, 나랑 잘 맞을까?’ 그런 마음으로 책의 첫 문장을 읽는다.


잊지 못하는 첫 문장이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q책장을 펼치자마자 이렇게 시작한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나는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이렇게 대놓고 시작해도 되나?’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나는 그 책의 분위기와 어조에 빠져버렸다. 재치 있고, 아이러니하며, 동시에 뼈 있는 말. 이 책은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살짝 찔러 보며, 같이 놀자고 손을 내미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좋은 첫 문장은 독자를 ‘낯선 친구’가 아닌 ‘오래된 지인’처럼 대한다는 것을. 책과 독자 사이의 관계는 단지 작가가 말하고, 독자가 듣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는 걸 그 문장이 먼저 가르쳐주었다.


그와는 반대되는 느낌의 문장도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눈 잔잔하지만 묵직한 시작이었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이 문장을 처음 읽은 날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날이었다. 그날따라 친구도, 가족도, 누구 하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저녁을 먹었다. TV도 끄고, 음악도 없이 그냥 조용히 책을 폈다. 그런데 이 첫 문장이 나를 사로잡았다.


‘84일 동안 아무것도 낚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라니.’ 이야기가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그 문장 안에 담긴 ‘외로운 인간의 시간’이 나와 너무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노인의 바다를 함께 건넜다. 고기를 낚지 못한 채 돌아오는 그의 어깨를 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괜찮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멋졌다고.


이렇듯, 첫 문장은 때로 한 사람의 마음을 열거나 닫는다. 그 사람의 하루를 지탱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 한 줄에서 이미 결정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책을 펼칠 때 늘 조심스럽다. 기대와 불안이 반씩 섞인 상태. 그건 연애 편지를 처음 열어볼 때와도 비슷하다. 내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을 수도 있고, 혹은 너무 오래 기다려온 문장일 수도 있으니까.


한 번은 친구가 물었다. “책을 그렇게 많이 읽으면, 다 비슷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첫 문장은 다 달라. 누군가는 담장 너머로 슬쩍 나를 들여다보는 느낌이고, 또 누군가는 내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달려오는 것 같아.” 친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과 책을 읽을 때 나는 꼭 첫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얘들아, 이 책은 어떤 기분으로 시작하고 있을까?” 그러면 아이들은 책 속 주인공의 기분을 상상하고, 자신의 마음과 비교해본다. 그 순간, 아이들은 이야기의 동반자가 된다.


책을 펼치는 순간의 공기, 그 속에 스며 있는 감정의 결은 첫 문장에 배어 있다. 그 문장이 고요하게 나를 끌어당기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 이 책을 읽을 준비가 되었나?’


첫 문장을 넘기는 건, 결국 용기다. 나를 다른 세계로 던져 넣는 작은 점프. 그 짧은 문장 하나가 누군가에겐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고, 누군가에겐 한 시절의 정리가 된다.


오늘도 나는 책을 펼친다. 아직 읽지 않은 문장들과 마주하기 위해. 어쩌면 그 안에는 오늘의 나를 붙들어줄 단 하나의 문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한 문장을 찾아가는 일.

그게 바로, 내가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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