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은 삶을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줬다
삶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깊어지며, 사람의 말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날. 누군가 옆에 있어도 외롭고, 반대로 너무 많은 말들이 밀려와 고요를 찾고 싶은 날. 나는 그런 시간에 책을 펼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책 앞에 조용히 앉았다. 읽지도 않고, 그냥 손끝으로 종이의 결을 느끼며 천천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책은 삶을 살아본 사람들이 남긴 마음의 지도였다. 말로는 끝내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 이해받지 못해 외로웠던 고통, 누군가에게는 하찮게 들릴까 숨겨두었던 생각들이 책 안에는 고스란히 있었다. 그 문장들을 하나씩 읽으며 나는 점점 안심하게 되었다. 아,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나와 비슷한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은 그 시간을 기록했구나. 그 단순한 사실이 나를 붙들어줬다.
고통의 크기를 견디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며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웃고 있었지만, 마음속은 텅 비어 있었던 날들. 그때 책은 내게 거창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묵묵히 내 옆에 앉아주었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등을 토닥여주는 느낌이었다. 나는 점점 책 속 인물들의 삶에 스며들었고, 그들의 선택과 감정, 생각들을 따라가며 나를 비춰보았다.
특히 어린 시절 만났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여전히 내 안에서 울리는 책이다. 제제가 벽장 속에서 울며 조심스레 누군가의 품을 갈망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도 함께 울었다. 제제의 상처는 내 상처였고, 그의 외로움은 내 외로움이었다. 문장을 따라가던 눈물이 이마까지 흘러내렸고,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구나. 이건 누군가의 마음이었고, 지금은 나의 마음이기도 하구나.
고전 문학을 읽기 시작하면서 삶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나 또한 한때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판단으로 모든 것을 밀어붙인 적이 있었다. 그 결과에 대해 스스로 회의하고 고립된 시간을 보내야 했던 때,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은 차가우면서도 따뜻하게 내 마음을 두드렸다. 인간은 왜 이렇게 모순적인 존재일까. 악을 저지르면서도 구원을 갈망하고, 미워하면서도 사랑을 꿈꾸는 존재. 고전은 그 오래된 질문을 나에게 다시 던졌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인간의 오만과 한계를 이해했고,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에게서 인간 소외의 절망을 읽었으며, 『파우스트』를 따라가며 인간의 욕망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마주했다. 고전은 나에게 ‘사는 기술’을 알려준 것이 아니라 ‘견디는 감각’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은 본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불완전함 속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고 서 있을지를 고전은 몸으로 보여주었다.
책을 읽는다는 건 그저 텍스트를 해독하는 일이 아니다. 나에게 책은 감정을 언어로 바꾸는 연습이었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해석하는 창문이었으며, 때로는 침묵을 배우는 법이었다. 감정이 복잡할 때, 나는 그림책을 펼쳤다. 『눈, 물』 같은 그림책 한 권이 에세이 열 편보다 더 큰 울림을 줄 때가 있었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건네듯 고요하게 나를 쓰다듬는 글과 그림은, 책이라는 매체가 얼마나 다정한 존재인지를 일깨워주었다.
비문학은 나의 인식을 교정해주었다. 세상을 보는 틀을 만들어주었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지 않게 도와주었다. 『팩트풀니스』를 통해 나는 얼마나 편견 속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았고, 『돈의 심리학』을 읽으며 나의 소비습관이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감정의 패턴’이라는 걸 깨달았다. 책은 내게 사고의 프레임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책은 글을 쓰게 만들었다. 쓰는 일은 읽는 일의 연장이다. 읽으며 받은 감정과 생각들을 머릿속에만 두지 않고, 손끝으로 옮기는 과정. 책을 읽으며 나도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졌다. 나의 이야기를, 나의 견딤을, 나의 배움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삶을 견디기 위해, 그리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삶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되는 문장을 쓰기 위해.
읽는 사람으로 산다는 건 아주 조용하고도 고요한 투쟁이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잠시 빠져나와 나만의 세계에 침잠하는 일. 책을 읽는다는 건 외면이 아니라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삶을 견디는 방법은 어쩌면 거창하지 않다. 매일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손끝, 그리고 그 페이지를 넘기며 나를 다시 세우는 시간. 나는 그것으로 오늘도, 삶을 견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