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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세평 Dec 02. 2019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①




방학 동안에는 학교가 문을 닫았다.

그래서 주로 홈스테이를 하거나 가끔 친구네 신세를 졌다.


그러던 어느 방학, 사정이 생겨 기숙사에 일찍 돌아가게 됐다.

개학까지 아직 5일이나 남아있었다.

그래도 하마터면 길바닥에 나앉을 뻔했는데, 기숙사가 개학준비로 열려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때 나는 어떤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학교에는 사람이 없었다.

개학 준비를 맡은 선생님이 한 분 계시긴 했는데,

기숙사에 들어갈 때 뵙고는 통 만날 수가 없었다.

바쁘신 모양이었다.


그보다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다.

식당은 개학 전날에나 열린다고 했다.

선생님은 내가 배달음식을 시켜먹으려니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선생님께서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내가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엔 몇 달치 용돈을 한꺼번에 받아 조금씩 나눠 썼다.

큰돈이다 보니 기숙사 사감 할머니께 맡겨두고 한 달에 한 번씩 받아 썼다.

사감 할머니가 계셔야만 금고를 열 수 있고 돈도 꺼낼 수 있었다.

사감 할머니는 삼일 뒤에나 오실 예정이었다.

삼일은 굶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숙사 냉장고와 선반을 모조리 뒤졌다.

나를 반기는 거라곤 대용량 주방세제만 뿐이었다.


다행히 가방에 선물로 받은 러스크가 있었다.

남아공에서는 '버터밀크 러스크'라는 것을 굽는데, 

손가락 두 마디만 한 기다란 과자이고, 다른 러스크에 비해 아주 단단하다.

우유를 넣은 홍차에 찍어먹으면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봉투를 탈탈 털었다. 러스크 다섯 조각이 떨어졌다.

첫째 날에 하나 먹고 나머지 이틀 동안 두 개씩 나눠먹기로 했다.

사람은 물 한 모금 안 마시고도 3일은 살 수 있다고 했다.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대신 강제 단식이 끝나는 셋째 날 저녁, 스스로에게 만찬을 대접하기로 했다.


남아공 특유의 버터 우유 러스크.  다섯 조각으로 삼일을 살아남아야 했다. 출처: taste.co.za


첫날은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나와서인지, 

점심때가 훌쩍 지나도록 배가 고프지 않았다.

허기보다 견디기 어려운 건 무료함이었다.


캠퍼스는 너무 고요해서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릴 것만 같았다.

건물과 잔디밭이 평화롭게 볕을 쬐고 있었다.

평소 북적이던 복도를 나 혼자 기웃거리자니 기분이 묘했다.

나 혼자 시간을 뛰어넘어 더 이상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고적지를 걷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는 흥분으로 소름이 돋았다.

돌바닥 위에 내 신발이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학교를 한 바퀴쯤 돌고 나니 슬슬 허기가 졌다.

다시 현실로 끌어내려지고 나자, 소중한 에너지를 쓸 데 없이 걷는데 낭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부터 방에 꼼짝도 않고 누워있어야지.'

나는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 들어서자 학부모 한 분과 선생님이 보였다.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기숙사 안쪽에서는 쿵쾅거리는 인기척이 들렸다.

여러 명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였다.

곧이어 또래 몇 명이 현관으로 달려 나왔다.

같은 학년 친구들이었다.

입고 있는 스포츠 유니폼을 보니 하키 대표팀이었다.

후문으로 돌진하던 친구들은 나를 발견하고 급정지했다.

나를 보고 환해지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여전히 조금 어리둥절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한줄기 희망이 스쳤다.


'나 말고 사람이 있다. 먹을 것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아공 유학 | 05. 강제 단식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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