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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W Oct 24. 2019

월세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까지

미적대는 것을 아주 사랑하는 나는 대학에 입학한 지 11년이 지나서야 졸업 영화를 찍고 학사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은데 '무려' 학사 학위를 취득하는 데 11년이 걸린 것이다. 빠른 사람들은 대학원도 너끈히 마쳤을만한 시간이다.


대단한 생활고라거나, 신상에 무슨 일이 있었다거나 하는 사연이 있었는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물론 찔끔찔끔 밴드를 한다거나 촬영을 다닌다거나 영상 음악을 만든다거나 했지만 그게 졸업을 미룰만한 이유는 아니었고 그냥 뭔가 내보이고 평가받는 것이 두려웠다. 아무도 내가 만드는 영화를 기대하지 않는데 혼자 지레 겁먹고 웅크려 있다 시간만 훌쩍 떠나보낸 거다. 그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이해시키는 데 계속 실패하다 한참을 함께 했던 사람마저 훌쩍 떠나보내고는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때가 왔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인간인지.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졸업장이 눈에 보일 때쯤이 되니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소한 월세는 낼 수 있는 인간이 되자고 마음을 먹은 것이다. 졸업을 못하고 방구석에서 비비적대던 동안 제대로 된 수입은 없었고 그 푼돈이나마 졸업 영화를 찍으려면 차곡차곡 모아야 했다. 잔고는 느리기는 해도 계속 쌓여갔지만 여행 한 번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미 몹쓸 인간이 그 돈과 시간들을 여행에 써버리면 더 몹쓸 인간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타와 페달은 잘도 사고팔고 했네? 아무튼.


다행히 부모님의 큰 도움을 받아 전셋집에 살고 있어 다달이 월세가 나가지는 않았지만, 그 전세라는 것도 내겐 참 쉽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학업과 일을 병행해서 월세를 내고 살아가는 친구들도 꽤 있었는데, 그들이 해내던 일이 내겐 왜 그리도 버거웠는지, 그들에게도 몹시 버거웠는데 그냥 대단하다는 말로 쉽게 퉁쳐버린 건지, 나도 그랬어야 했던 건지 아직도 모르겠다.


여하튼 전역 이후 전세에 살기 시작한 약 9년의 시간 동안 나는 계약이 만료되어 새 집을 찾을 때마다 어떻게든 전세금을 지키기 위해 날을 세워 잘 알지도 못하는 등기부 등본들을 들여다봐야 했다. 서울 바닥의 모든 부동산과 건물주는 내가 의심을 해야만 하는 잠재적 사기꾼이었고 내가 아무리 착실히 모아도 십 수년은 걸릴 것 같은 금액은 아무것도 아닌 푼돈같이 느껴졌다. 게다가 그게 부모님이 평생 동안 애써 모아두신 돈이라고 생각을 하면 전세는 고사하고 월세도 못 내는 인간인 내가 지독하게 미워질 수밖에. 내 집에 살면서도 떨쳐지지 않는 얹혀사는 기분은 언제나 무거웠다. 종종 어머니께서 위로를 한다고 해주시던 '당장은 네가 여력이 안 되니까'라는 말도 의도와 상관없이 참 아팠다. 그런 말을 한다는 것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야기를 들을만한 상황을 내가 만들었다는 생각에.


그 와중에 전세는 또 만기가 되었고, 졸업 이후의 행보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던 나는 섣불리 집을 구할 수도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는 해도 넘어가 서른둘에 겨우 졸업을 했고 답답하며 게으른 데다 오라는 데도 없고 집마저 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이 한심한 인간에게도 도움의 손길들이 있었다. 동네 친구는 옮기다 벽지에 흠집이 났을 때 필요 이상으로 느껴질 만큼 사색이 되기는 했지만 10년간 산더미처럼 쌓인 짐들을 맡아주었고 또 한 친구는 기꺼이 자신의 방 하나를 내주었다. 방을 내어준 친구는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영상 촬영감독인데 내가 그의 집에 머문 약 3주간의 시간 동안 나는 그가 집에서 쉬는 걸 두 번쯤 봤다. 항상 아침에 나가 밤 열 시가 넘어 들어오는 그를 보며 '저렇게 사는 거구나...' 싶으면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도저히 자신이 없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렇게 보증금을 돌려받고 찍은 영화의 배급 신청서를 쓰며 더부살이 기간을 보내던 중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리가 난다고. 강화도였다. 물론 지원을 한다고 해서 100% 붙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강화도가 어디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는 주제에 나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덜컥 강화도로 이사를 했다. 여차하면 고구마를 캘 각오도 조금은 되어 있었고.


내 힘으로 월세를 내기 시작한 첫 집. 지금도 그렇지만 처음에는 더욱 무시무시한 위용을 자랑했다. 오른쪽 아래 귀퉁이에 입주와 동시에 밥을 챙겨준 고양이의 모습이 보인다.


여기서 내가 구직에 실패했다면 틀림없이 더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었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재미난 이야기를 쓸 기회는 내게 없었다. 1년짜리 계약직이지만 채용이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들 당연히 다 하는 일에 여러 사람 도움을 구걸해가며 겨우겨우 월세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먹기 위해, 눕기 위해 아침에 눈을 떠 일자리로 가야만 한다는 콘셉트가 가혹하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지만, 그리고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겨우겨우 월세를 내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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