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아빠는 오빠와 함께 9시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먼저 서울에 올라갔다.
오빠 학교 주변에 하숙집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사 주고 내려온다고 하였다. 여느 날과 다르게 소화는 엄마와 아빠, 오빠가 서울 가는 것을 과수원 초입까지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아줌마와 아저씨의 집으로 향했다.
“아줌마! 아저씨! 계세요?”
“응. 소화구나! 추운데 어서 들어오거라.”
아줌마는 방문을 열면서 소화를 맞이했다. 아저씨는 방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졸업 축하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는 졸업선물이야.”
“졸업선물요?”
“별것은 아니야.”
소화는 서둘러서 포장을 풀었다. 그랬더니 까만 가죽장갑이 나왔다.
“정말 제 것이에요! 너무 맘에 들어요.”
소화는 얼른 손에 가죽장갑을 꼈다. 가죽장갑은 소화의 가느다란 손에 딱 맞았다.
“소화 손에 딱 맞네.”
“졸업선물까지 챙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엄마한테 들으니깐 읍내에 있는 법무사 사무실로 출근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그때 끼면 되겠다.”
“출근하든지 안 하든지 간에 꼭 끼고 다닐게요. 저는 다른 일을 하려고요.”
“그러면 사무실로 출근을 안 할 수도 있다는 거야?”
“예전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생각나세요?”
“물론이지. 미용 일을 하고 싶다고 했었는데 설마 그 일이야?”
“잊지 않으셨네요. 그 미용 일을 배우려고요.”
“미용 기술을 배우려면 돈도 만만치 않게 들어가고 힘들다고 하던데 괜찮겠니?”
“힘들어도 해야죠. 제가 하고 싶은 일인걸요.”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제 머리가 더벅머리잖아요. 머리 감아서 물기가 있을 때는 그럭저럭 봐줄 만한데 마르면 다시 부스스해지는 게 싫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차분한 머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가 중3 졸업식을 앞두고 머리를 깎으러 미장원에 갔는데, 원장님이 졸업하니깐 특별히 이쁘게 해 준다면서 고데기로 머리를 만져준 적이 있었어요. 그때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제가 원했던 머리였거든요. 그래서 생각했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미용사가 되고 싶다고요.”
“그런 생각하고 있었는지 몰랐네. 예산 읍내에서 하겠네?”
“예산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집을 떠나려고요. 집에서 다닌다면 지금의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엄마와 아빠는 알고 계신 거야?”
“오늘 오빠와 서울 올라갔는데 내려오면 알게 되겠죠. 엄마한테 편지 써 놓고 왔어요. 그리고 저도 지금 가려고요.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이렇게나 빨리 간다는 거야?”
“그렇게 되었어요.”
“어디로 가는데?”
“서울이요.”
“서울이면 소철이와 함께 있는 거야?”
“그건 아니에요. 서울이지만 저는 다른 곳으로 갈 거예요.”
“서울이라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그러니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약속할 수 있겠니?”
“물론이죠! 절대 위험한 곳은 아니에요. 그러니 아무 염려 마세요. 언제나 제 편이 되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아줌마와 아저씨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고 제가 이만큼 잘 성장할 수 있었어요. 성공해서 꼭 찾아뵙겠습니다.”
소화는 아줌마와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나왔다. 그리고 비탈진 곳에 있는 ‘난쟁이들의 사과나무’로 갔다. 어제 내린 눈들이 과수원에는 녹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걸을 때마다 ‘뽀드득’ 거리며 소리가 났다. 소화는 미끄러지지 않게 발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올라갔다. 간신히 도착한 소화는 ‘난쟁이들의 사과나무’에 앉은 눈들을 가죽장갑 낀 손으로 ‘툭툭’ 털었다.
“안녕! 오랜만에 왔지. 사과가 열렸을 때는 매일 오더니 사과를 다 수확하고 나니 너무 안 와서 서운했지. 사람의 마음이 그런가 봐. 뭔가 얻을 것이 있으면 오는 수고로움쯤은 아무것도 아닌데 빈손이면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오지를 않게 되는 것 같아. 한동안 너무 안 와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그동안 너로 인해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어. 네가 주는 사과를 먹으면서 힘을 낼 수 있었거든. 지금 서울에 올라가면 언제 내려올지 모르겠지만 이 과수원을 생각하면 네가 가장 먼저 떠오를 거야. 내가 다시 찾아올 그날까지 잘 있어. 그리고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안녕.”
소화는 사과나무를 몇 번이나 쓰다듬고 나서 집으로 갔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한테 쓴 편지와 함께 스킨과 로션을 화장대 서랍 안에 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집을 나섰다. 그동안 받은 용돈을 저축한 통장과 도장, 그리고 가족사진 1장이 든 가방에는 최소한의 옷가지만 챙겼다. 한낮이라도 2월의 날씨는 아직도 추웠다.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을 낀 소화는 예산역을 향해 출발했다.
예산역에 도착한 소화는 12시 비둘기호를 탔다. 소화는 가방을 선반에 얹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직 이날을 기다리면서 준비해 왔는데 막상 떠나고 있는 상황이 되자 마음이 복잡해졌다. 소화는 자신이 데미안에서 나오는 새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에게 있어서 알은 전부인데 이 알을 파괴해야 새로운 세계로 갈 수 있듯이 자신도 엄마와 아빠가 있는 집을 떠나서 새로운 미지의 세계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소화가 창밖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옆자리에 아저씨가 앉았다. 아저씨에게서는 지독하게 담배 냄새가 났다. 기차를 타기 전까지도 담배를 피웠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한두 번 헛기침하더니 이내 코를 골면서 잠을 자기 시작했다. 비둘기호 기차는 간이역마다 쉬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많은 짐을 싣고 타서 기차는 어느새 만원이 되었다.
코를 골면서 자고 있던 아저씨는 평택역에서 내리고 아줌마가 대여섯 살 된 여자아이를 데리고 탔다. 3명이 자리에 앉다 보니 좌석이 비좁았다. 가운데에 앉은 아이는 불편한지 자꾸 아줌마한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달래던 아줌마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는지 아이에게 인상을 쓰면서 협박하기 시작했다.
“너 자꾸 힘들게 할래! 가만히 좀 앉아있어. 그렇지 않으면 여기에다 놓고 내릴 거야. 그래도 괜찮아?”
강압적인 아줌마의 말을 들은 뒤로 아이는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갔다. 애처로울 정도로 조용해진 아이는 어느새 잠이 들어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목적지인 서울역에 도착하기 전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기차는 30분 연착되어서 서울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내려서 한가해지자 소화는 일어나서 가방을 선반에서 내리고 서울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전철을 탔다. 압구정에 있는 미장원에 가서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서울 중에서도 압구정으로 정한 것은 고1 겨울방학 직전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카드를 사러 서점에 갔을 때였다.
카드를 고르고 나서 책을 둘러보다가 소화의 눈에 띈 책이 있었다. 그 책은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라는 시집이었다. 이 시집을 본 순간 소화는 압구정에 가야만 할 것 같은 확고한 마음이 들었다. 압구정이라는 곳을 알지도 못하면서 이때부터 소화는 집을 떠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계획이라고 해 봐야 돈을 쓰지 않고 최대한 모으는 것이었다. 세뱃돈이나 친척들이 방문했을 때 주는 용돈 등은 무조건 통장에 넣었다. 고1 겨울방학 때부터 시작된 소화의 은밀한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