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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by 서은율


초등학교때 친했던 친구의 집에 어쿠스틱 피아노가 있었기에, 친구는 수시로 학원에 배워온 곡을 들려주었다. 아직 기억에 남는 건 콩쿨곡인 '소나티네 Op.20 No.1 1악장'과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친구를 보며, 엄마 아빠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하지만 아빠는 안 된다고 하셨다. 내가 자꾸 조르자 마지 못해 그럼 다녀보라고 하셨는데, 바이엘 한 달 배우다가 그냥 그만둬 버렸다. 초등학교 5학년이 피아노를 시작하기엔 늦었다, 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내 또래 아이들은 체르니 40번을 치고 있었고, 나보다 한참 어린 아이들이 바이엘을 배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을 시작하든 이른 나이인 열두 살인데, 피아노를 배우기 늦은 나이라고 생각했다니!


성인이 되어 돈을 벌면서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집 근처에 문화센터가 있어서 일주일에 두 번씩 3년을 다녔는데, 그러는 동안 디지털 피아노를 구매해서 매일같이 연습했다. 결혼과 동시에 피아노를 멈췄다. 한두 달 다시 배우기 시도했다가 멈추고 태교하면서 배웠다가 또 멈췄다. 마음처럼 연속적인 배움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취미 생활을 가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나의 첫 어쿠스틱 피아노는 친구(앞에 등장한 친구는 아님)가 오랫동안 간직해왔던 영창 피아노다. 친구는 피아노를 안친 지 한참 됐다고 했고, 중고 가격으로 구매해서 조율을 해서 결혼을 하고 몇 번의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사용했다. 그러다 인도로 해외이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시 팔았다.


인도에서 산 디지털피아노는 카시오페아다. 나는 어린 애들을 앉혀놓고 종종 치곤 했는데, 둘째가 스스로 앉지 못했던 때에도 내 무릎에 앉아 건반을 누르며 놀았다. 복귀할땐, 지인에게 중고로 팔고 왔다.


한국에 돌아와서 남편 지인분이 집에 있는 피아노를 안 쓴다며 주셨다. 한동안 그걸로 잘 쓰다가, 또 둘째 침실을 만들어주면서 이 어쿠스틱 피아노는 드림을 했다. 그리고 딸 아이의 방에 가와이 디지털 피아노를 놨다. 처음으로 흰색 피아노를 샀다. 지금 이 디지털 피아노는 내 서재에 있다. 우리집에서 제일 많이 연습하는 사람이 나니까, 제 위치를 찾아온 셈이다.


나는 작년 3월부터 지금 선생님을 만나서 일주일에 두 번씩 피아노를 배우고, 매일 집에서 1시간 이상 연습을 한다. 실력은, 이십대에 배웠을 때보다 더 못하다. 지난 시간 동안 손도 굳고 뇌도 굳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늦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10년, 20년을 더 배울 거라 생각하면 한참 남았다. 비록 열 두살에는 늦었다 생각했지만 말이다.


살아오는 동안 나의 세계관 혹은 관점은 여러 번 바뀌었다. 좀 단순해지고, 목적지향적이고 계획적이게. 한편으론, 피아노는 혼자 파고들어야만 하는 나의 기질과 맞다는 생각도 든다. 책을 보듯 피아노 악보를 본다.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듯 손가락 하나 하나를 세워서 피아노 건반을 누른다. 손끝에 힘을 준다.


처음 내가 가장 못했던 일이 어깨에 힘을 빼는 일이었다. 지금도 긴장하면 목, 어깨, 팔, 손목 전체에 힘이 들어가서 한 음을 누를 때마다 신중해진다. 그래서 한 곡을 치고 나면 진이 빠진다. 수영을 하면서 힘을 빼는 법을 조금씩 터득하고, 피아노 칠 때도 조금은 힘을 빼는 법을 알게 됐다. 사실 이건 배운다고 되는 건 아니었다. 선생님이 아무리 설명해주셔도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내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이건 어느 순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힘이 빠진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작년 다시 시작했을 때보단 자연스러워졌다. 내 수준에 맞게 어려운 악보를 내려놓고 쉬운 악보로 진도를 나간다. 나에게 필요한 건 기본기다. 내가 되고 싶은 기대치가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다.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선생님의 피아노 교습법을 좋아한다. 그래도 유명한 작곡가들의 악보집을 한 권씩 모으며 미래를 꿈꾸고 있다.


깊이 빠질 수 있는 하나의 취미가 있어서 오늘도 난 행복하다. 슬픈 날은 슬픈대로, 화난 날은 화난 대로 피아노 건반에 손을 얹는다. 뚝딱거리며 흐름이 끊기는 걸 보면서 마음의 상태를 알아챈다. 한번은 걸러내고, 정화시켜서 피아노에서 일어난다.


피아노 선생님 곁에 오래도록 있고 싶다. 내가 이사가거나, 피아노 선생님이 이사가지 않는 이상은 계속 배우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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