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이의 자장가

by 서은율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얀 마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꽤나 많은 분들이 추천해 주었지만, 잠들기 직전 보려다가 첫 장면에서 꾸벅꾸벅 졸곤 했는데, 졸면서도 귀가 번쩍 뜨였던 건, 영화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 'Pi's Lullaby'였다. 나중에 잠이 오지 않을 때 결국 이 영화를 완주할 수 있었는데 이 곡은 촉촉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선명했던 건, 서사가 주었던 처절함에 있었다.




유튜브 캡쳐



나는 번아웃이 자주 왔는데, 그것은 적어도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건 나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오리가 물속에서 발을 힘차게 젓는 것은 물 위에서 보았을 땐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방향과 방법이 옳고 그른 것을 떠나서, 홀로 삽질을 했을지언정 열심히 나날을 보냈던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번아웃과 무기력함이 나를 짓누르던 그때, 파이가 망망대해에서 벌이는 생존을 위한 사투는 나의 고민을 날려버렸고, 무기력은 아주 가벼운 것처럼 여겨졌다. 나는 다음 날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본 보험회사 직원에게 그가 얘기해 준 두 가지의 결말은 어느 쪽으로든 슬펐지만, 나는 적어도 일말의 희망을 걸 수 있는 첫 번째의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작년 7월 외할머니의 입관을 보고 돌아오던 길, 다시 <<라이프 오브 파이>> 원작을 펼쳤다. 창밖은 캄캄해오고, 눈이 침침해져 왔지만 마지막까지 놓을 수가 없었다. 통로 옆 좌석에 앉은 두 아이는 닌텐도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고, 나는 눈물을 훔치며 끝까지 읽어냈다. 귓가에 'Pi's Lullaby'가 스며들고 있었다. 배 위에 호랑이와 함께 서 있는 파이의 모습과 함께.


또, 영화의 첫 장면이었던 맑고 깨끗한 자연과 그곳에서 주어진 생을 무심하게 살아가는 생명체들의 활기찬 모습들이.


마음이 약해지거나 의지가 느슨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이 음악을 들으며 파이와 인도를 생각한다. 그러면 동기부여가 된다.


네가 엄살을 부릴 때가 아닐 텐데.

너와의 싸움에서 벌써 포기해 버리려는 거야?

아니, 그럴 순 없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운명을 알아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