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7월 국무총리 훈령 제81호 <한글기계화 표준자판 확정에 따른 지시>로정부는 민간에서 오랜 기간 한글타자기 개발에 뛰어들었던 많은 개발자들의 노력을 부정하고 탁상 행정으로 눌러버렸다. 이것이 필자가 생각하는 한글기계화 역사의 두 번째 변곡점이었다. 한글 표준자판으로 수동타자기는 네 벌식을, 전신용 텔레타이프는 두 벌식으로 공표됨에 따라 타자기의 대중적인 보급은 기존에 공병우 타자기나 김동훈 타자기에서 '경방기계공업주식회사'(이후 경방크로바)와 '동아정공' 같이 정부 표준자판을 기반으로 대량생산 체재를 갖춘 공장 위주로 그 중심축이 넘어가 버리게 된다. 정부에서 한글 표준자판을 공포하기 전만 해도 민간의 타자기 시장은 속도 중심의 세 벌식 타자기와, 체재 體裁(활자의 심미성) 중심의 다섯 벌식 타자기로 수요에 맞는 양분화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나로 통일된 자판은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로 통일된 한글 자판을 원했다. 때문에 공병우박사도 김동훈 선생과 타자기 회사의 합병과 자판을 하나로 통일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의 노력을 했으나, 결국 두 사람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일방적인 한글자판 통일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정부가 만든 표준자판이 선택된다. 정부의 행정력은 단숨에 세 벌식과 다섯 벌식을 시장에서의 고립상태로 몰아갔다. 그리고 시장에는 새로운 공급자들인 경방기계와 동아정공이 나타나 시장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타자기 마니아들이 타자기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타자기들이 바로 경방크로바의 크로바 타자기 또는 동아정공의 마라톤 타자기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로 타자기에 푹 빠지게 되면서, 당근마켓을 통해 가장 먼저 구입한 한글 타자기가 크로바와 마라톤 타자기였다. '타자기 사용자모임 카페'를 가입하게 되면서 카페 내에서 선배 마니아들의 타자기 구매 후기나 댓글 등을 통해서 하나, 둘 타자기에 대한 정보를 보면서 배워가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타자기에 입문했을 당시, 필자가 가장 궁금했던 점들이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지금도 여전히 타자기 카페에 가입한 입문자들이 많이 질문하는 내용이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사실 이 질문들의 명확한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질문의 궁금증 해소시켜 주는 가이드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질문 1. 크로바 타자기와 마라톤 타자기 중 어느 타자기가 더 (성능이) 좋은가?
질문 2. 두 벌식이 좋은가? 네 벌식이 좋은가?
질문 3. 크로바 타자기와 마라톤 타자기의 타건감의 차이
질문 4. 타자기 모델명 뒤에 붙는 DLX, TR 등의 의미
초보일 때 가장 궁금했던 점은 위 4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그리고 조금 더 타자기를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아래와 같은 추가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질문 5. 크로바나 마라톤 타자기 중에 일본 타자기 디자인과 동일한 것이 있는데, 카피모델인가?
브라더 타자기와 비교한다면 성능의 차이가 얼마나 있을까?
질문 6. 가장 처음 생산한 1세대 모델은 무엇인가? (세월이 꽤 지났는데) 소장가치가 있는 것인가?
질문 7. 리본스풀이 호환이 되는가?
질문 8. 왜 큰 활자나 타입페이스가 다양하지 않은가?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러 타자기를 수집하며 직접 사용해 보고, 리서치했던 타자기 정보들을 종합했을 때, 필자가 궁금증을 해소한 내용을 중심으로 질문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보았다. 궁금증을 해소하기에는 경험이 아직 부족하여 답변이 충분하지 않을지도 모르나, 정성을 다했다는 것은 자신할 수 있다.
크로바 타자기와 마라톤 타자기 중 어느 타자기가 더 성능이 좋은가?
이 질문을 가장 첫 번째로 배치한 이유는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질문의 수준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 와 같은 맥락의 질문처럼 어느 한쪽을 시원하게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입문자들은 한정된 예산과 한정된 선택지에서 타자기를 선택하고 구입해야 하는데 고민이 될 것이다. 누군가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명쾌하게 어떤 답을 던져 주어서 그 선택을 대신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이를 명분 삼아 나의 선택을 더욱 합리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크로바냐? 마라톤이냐? 어느 한쪽을 명확하게 정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로 필자의 생각에 크로바 타자기와 마라톤 타자기는 성능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한국은 이미 1970년대에 들어와서 타자기를 대량생산 하기 시작한 후발주자였다. 모든 기술력은 해외 제조사와 기술제휴를 통해 확보했고, 일부 중요부품은 자체 생산이 어려워 수입을 해야 했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해외의 많은 타자기 제조사들이 가격경쟁력 제고를 위해 더 값싼 부품을 넣어서 원가 절감을 하기 시작한다. 때문에 타자기 대부분의 내, 외장에 금속부품보다는 플라스틱 부품이 많이 사용된다. 크로바나 마라톤은 주로 대중적인 보급 기종의 타자기를 주로 생산했다. 때문에 성능은 보급기종으로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해외처럼 제조사가 가진 타자기에 대한 어떤 철학이나 미학적 가치를 반영하여 만들지는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올리베티 발렌타인 타자기처럼 뉴욕현대미술관 MoMA에서 마라톤이나 크로바타자기가 전시된 광경을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출처. 유튜브 Time traveler 시간여행자. 90년대 동아정공 마라톤 타자기 생산 라인
하지만 1970년대 한국의 역사를 찾아보라. 한국은 정말 미친 듯이 일 했다. 1970년에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이 있었고, 1973년이 되어서야 1인당 국민소득이 북한을 앞지르고 1974년에 세계평균 1인당 국민소득을 추월하게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아래 70년대 말이 되어서야 한국경제는 세계 17위의 무역국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한다. 그런 시기에 마라톤타자기와 크로바 타자기는 정부의 한글표준자판 확정을 발판 삼아 공장을 세우고, 노동자들은 빨리빨리를 외치며 타자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시대적 상황이 이러하니 더 아름답고 성능 좋은 타자기에 대한 고민보다는 더 빨리, 더 많이 생산이 가능한 타자기를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고를 수가 없는 것이다. 미세하게 보면 크로바나 마라톤 각각 브랜드만이 가진 약간의 장점과 단점은 어느 정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타건감? 타자기 카페에서도 이런 질문이 올라왔을 때, 누구도 어느 하나가 더 좋다는 식의 직설적인 답변을 댓글로 달아 준 회원은 한 번도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만큼 고수회원들에게도 어려운 질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크로바를 선택하든 마라톤을 선택하든 둘 중 어떤 것을 택하더라도 그것은 나쁜 선택이 아닐 것이다. 입문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어떤 것이라도 일단 사서 경험해 보라)
알고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경우는 그냥 직진이었다. 크로바가 좋을까? 마라톤이 좋을까? 그런 고민 없이 당근마켓에서 싸게 올라오는 타자기를 무작정 샀다. 그렇게 크로바 탑스타 Topstar 10S 두 벌식과 마라톤 Marathon 88TR 네 벌식을 약 3만 원에 구입하여 이렇게 저렇게 무작정 사용을 해 봤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금씩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더 좋은 타자기는 없을까?"
"이건 왜 다 플라스틱을 만들었을까? "
"너무 약해 보이는데,,, 이거 쓰다가 부러지면 어떻게 고치지?"
그런 질문들이 내 안에서 올라오기 시작할 때 외국산 한글 개조 타자기를 알게 된다. 가장 먼저 접하게 된 것은 스미스코로나 클래식 15 한글 네 벌식이었다. 역시 외산이라 그런지 국산과 차이가 분명했다. 그 뒤로 한글로 개조된 올리베티 레테라 32, 올리베티 스튜디오 46, 에리카 모드 48, 브라더 JP1 바리안트 등의 외산 타자기를 만졌을 때 타건감이나 내구성, 디자인의 차별점을 더욱 잘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두 벌식이 좋은가? 네 벌식이 좋은가?
이 질문 또한 명쾌한 답을 주기 참 곤란한 질문 중에 하나이다. 왜냐하면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주관적이고 세밀한 취향까지 파악을 해야 가능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사용자마다 성향이나 취향이 모두 제각각이기 때문에 이번 질문에 대한 답변도 미리 언급하자면, 내 취향과 어떤 자판 배열이 가장 잘 맞는지 두 가지 다 사용해 보고 결정하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이 좀 필요할 것이다. 필자의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처음에 두벌식 타자기로 입문을 했다. 두벌식 자판은 현재 우리가 PC에서 사용하고 있는 두벌식 자판의 자음, 모음의 배열이 동일하기 때문에 초심자들이 처음에 적응이 빠른 편이다.
두벌식 표준자판 이미지 출처. 컴퓨터할배의 헬로우드림 블로그
그런데 점점 깊게 들어가면, 사실 말이 두 벌식이지 네 벌식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받침이 있는 글씨를 쓸 때마다 [받침] 기능의 shift버튼을 계속 눌러야 한다. 계속 사용을 하다 보면 받침버튼을 정말 많이 눌러야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필자는 이 shift버튼을 계속 눌러야 하는 행위가 좀 반감이 들었는지, 네 벌식은 shift버튼 누르는 횟수가 줄고 쌍자음 초성 입력 할 때도 일일이 하프스페이스를 쓰지 않고 바로바로 입력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일찌감치 네 벌식으로 자판을 전향한다. 그 후로 지금까지도 네 벌식을 주 기종으로 쓰고 있다. 그런데 막상 네 벌식을 써 보니 네 벌식도 shift버튼 누르는 행위가 그렇게 많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약간의 차이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두 벌식이 입력이 더 편한 부분도 있었다. 그러니 이 질문도 마찬가지의 맥락이다. 두 벌식냐? 네 벌식이야? 왈가불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세 벌식도 있고, 다섯 벌식도 있는데, 뭐가 더 좋네 마네 하는 소모적인 논쟁은 이제 의미가 없다고 본다. 생각해 보자. 우리가 타자기를 치는 이유가 무엇인가? 유능한 타이피스트가 되기 위함인가? 난 그저 글 쓰는 행위에 내 감각을 오롯이 집중하는 그 무아지경의 감각을 즐기고 싶은 것이지 엄청나게 빠른 유능한 속기사가 되기 위해 타자기를 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필자가 결론에 이른 가장 좋은 자판은 내가 평생에 걸쳐 꾸준하게 사용할 수 있는 편한 자판이다. 그것이 두 벌식이든, 세 벌식이든 무엇이든 관계없다.
크로바 타자기와 마라톤 타자기의 타건감의 차이
필자도 타자기를 한 대 두 대 만져 보면서 점점 궁금증이 증폭되는 부분이 바로 타건감이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이건 주행질감과 같은 맥락이다. 조수석에 타고 느끼는 승차감이 아니라 내가 운전석에 앉아서 직접 자동차 몰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이다. 액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자동차가 반응하는 엔진의 출력과 토크, 시트를 통해 느껴지는 노면의 느낌과 코너링에서 느끼는 승차감처럼 타자기를 치는 감각이 이 타자기에서는 어떻게 내 손 끝에 전달될까? 하는 궁금증이다. 내 손가락으로 키캡을 어느 정도의 압력으로 눌렀을 활자대가 반응하면서 종이에 활자가 찍히는지? 활자가 둥글대를 때릴 때 키캡을 누르고 있는 내 손끝으로 미세하게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며, 잉크리본을 거쳐 종이와 둥글대를 때리는 소리 등등 이런 감각들이 '타건감'이라는 감각을 형성하는 요소들인데, 내 차는 이미 타 봤으니, 다른 차는 주행질감은 어떤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준중형세단은 몰아봤으니 고급중형제단도 몰아보고 싶고, 속도 중심의 로드스터차량도 몰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다시 돌아와서 크로바를 써 보니 마라톤은 어떤 감각을 줄지 궁금한 것이다. 필자도 그 궁금함으로 카페에 질문을 올리기도 하고, 다른 이들의 질문 아래 달린 댓글들을 일일이 읽어가며 정보를 모았다. 결국 그 궁금증 때문에 크로버와 마라톤의 대부분의 기종을 수집해서 써 보았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크로바는 302나 747, 707 기종은 다르지만, 크로버 810이나 크로버 813 같은 일본 실버리드와 제휴한 기종에서는 그 특유의 톡톡 튀는 듯한 경쾌한 타건감이 있었다. 마라톤 기종 또한 특유의 깊이감과 내리 꽂히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손으로 느끼는 감각을 글로 전달하려니 참 어렵다. 아무튼, 이런 타건감을 좌우하는 건 타자기의 하우징 재질(금속이냐 플라스틱이냐)에서 오는 무게감도 있을 것이고, 기본적인 타자기의 체급도 무시 못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덩치가 큰 기종으로 갈수록 타건감이 더욱 묵직하면서도 안정적이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필자가 스탠더드 타자기를 많이 수집하게 된 것도 그런 묵직한 타건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끝으로 크로버타자기는 810이나 탑스타 10s 같은 기종을 써 보면 특유의 타건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추천한다. 마라톤은 기종이 참 다양한 편인데, 그중에서 타건감 좋은 기종을 추천한다면, 마라톤 10TR Speedy와 마라톤 913을 추천하고 싶다. 10TR은 마라톤 기종 중에서 가장 크기가 작은 기종인데도 가볍지 않고 편안한 타건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둘 중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913을 고르겠다. 913은 포터블 기종 중에서도 약간 크기가 큰 편이다. 대부분의 포터블이 아반떼 정도의 크기라면 913은 아반떼와 그랜저의 중간인 소나타 정도의 체급이라 할 수 있는데, 안정적이면서 손 착착 감기는 듯 한 찰진 타건감이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항상 마라톤 기종을 추천할 때 913을 추천한다.
타자기 모델명 뒤에 붙는 DLX, TR 등의 의미
알고 보면 정말 별 의미도 없는 것에 우리는 때때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는 것 같다.
DLX는 DeLuxe의 약자이다. 하지만 이니셜의 뜻처럼 호화스럽거나 사치스러운 기능과 디자인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TF는 Tab(Tabulator) 기능과 Fast spacer Key 가 들어가 있어서 들어간 것이다. 알고 보면 별거 없는데, 모르면 괜히 뭔가 좋은 기능이나 성능 때문에 붙여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환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