톺아보기(2)에서는 송기주타자기(1934년)를 중심으로 해서 김준성타자기(1945년)와 도덩보타자기(1959년) 까지 다루어 보았다. 이번에는 조선발명장려회를 통해 시작된 한글타자기 기계화의 시작을 살펴보려고 한다. 조선발명장려회의 수상을 통해 시작된 안과의사 공병우의 세벌식 한글타자기와 김동훈의 다섯벌식 타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리고 이전 글에서 한글 타자기 상용화 역사의 커다란 두 분기점으로1950년 한국전쟁과 1969년 정부의 한글표준자판 공포 시점으로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한국전쟁 당시 해군에 타자기를 납품과 군에 타자수 양성을 통해 성장한 공병우타자기에 대한 이야기과 한국전쟁 이 후 한글타자기의 춘추전국시대와 같았던 60년대에 다양한 배열의 한글자판 난립과 타자기 1만대 시대를 거쳐 1969년 정부의 한글표준자판(네벌식) 공포로 인한 타자기 시장의 변화를 짚어보고, 두벌식 타자기의 정착까지 정리해 보려 한다. 필자의 기준에서는 오늘 연재글은 만족스럽지 못하다. 연재라는 약속을 지켜야 하기에 부족하지만 일단 글을 올리지만 조금 더 살을 붙이고 보완 할 예정이다. 어쩌면 톺아보기가 3편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4편까지 할애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1. 한글기계화의 서막, 조선발명장려회
조선발명장려회는 1945년 8월 광복 후,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의 근원이 될 과학발전 촉진을 위해 1947년 10월 미 군정청 상부무에서 창설하였다. 미 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 문교부장 유억겸, 조선상공회의소 회장 이동선 등이 창설에 참여했다. 조선발명장려회는 정부 보조금 40만환을 지원받아 한국전쟁 전까지 기관지 발행, 발명 시상 앙양(昻揚)을 위한 영화 상영, 강연회와 같은 좌담회 개최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한다. 조선발명장려회는 광복과 함께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새로운 특허법률 제정 노력과 더불어 공업 소유권(현, 산업재산권)에 대한 관심도 증대시키며 이끌었다고한다. 1947년 10월 "조선발명장려회"가 창설 후 약 2년 뒤인, 1949년 3월 한글 타자기 연구와 공업화를 도모하고자 한글타자기 현상 모집을 했다.
1949년 3월 13일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경향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보면 조선발명장려회는 충무로 1가 32번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1949년 3월 7일 오후3시 특허국 회의실에서 한글타자기 연구와 공업화를 중심으로 각 일간신문 편집국장과 연구위원, 관계당국 및 사게중진인사들이 모여 간담회를 진행하였고, 많은 참석에 성황을 이루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3월 말일까지 한글타자기를 공모한다고 했다. 한글타자기 현상 모집의 심사위원으로는 문교부(현재의 교육부)와 체신부(94년 정보통신부로 개편), 상공부, 교통부, 어학회, 공과대학, 기자회, 상공회의 소특허국, 타이피스트협회 등에서 권위자 추천하여 심사위원을 선정했다고 한다. 3월 13일에 현상공모 기사가 났는데 3월말일까지 접수마감이라면 거의 보름 남짓되는 기간이다. 공모 기사를 보고 지원을 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부족했을 것 같다. 공모 전에 사전 간담회를 거치며, 이미 한글타자기 개발이 민간에서 어느 정도 움직임이 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공모기간을 설정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든다. 그렇치 않고서는 이런 공모를 진행하면서 공모기간을 너무 짧게 보인다. 공모접수는 이렇듯 번개불에 콩구워 먹듯이 빨랐는데, 심사기간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심사숙고(深思熟考) 한 것 같다. 3월 말일에 접수 마감한 공모는 7월10일, 11일, 13일에 동아, 조선, 경향신문 순으로 거의 100일만에 당선자 발표 기사가 난다.
"공모기간 19일에 심사기간 100일"
기사에 따르면 표창식(시상식)을 1949년 7월 20일에 진행한다고 나온다. 당선자 발표 결과 1등 수상자는 없었고, 2등 공병우, 공동 2등 송재범-오병호(공동연구), 3등 장례세-김동훈이 선정되었다고 나온다. 신문기사를 보면 공모에 몇 명이나 지원을 해서, 어느 정도의 경쟁이 있었는지 가능하기가 어렵다. 심사기간이 거의 100일이나 걸렸는데, 출품자가 많아서 였을까? 한글타자기 공모인데,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약 보름정도의 기간에 한글타자기 개발 아이디어를 공모에 출품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렇다면 대부분 개발을 하고 있던 사람들 중심으로 지명 공모처럼 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때문에 짧은 공모 기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출품했을지도 좀 의문이다. 그러니 경쟁은 그렇게 치열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2가지의 의문이 생긴다.
의문 하나. 왜 1등을 해당자 없음으로 발표했을까?
100일에 걸친 오랜 시간 숙하여 심사한 결과치고는 납득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1등에 부합하는 해당자가 선정을 하지 않은 것인지? 다른 어떤 정치적 이유가 있었던 것인지? 알수 없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댓글로 의견을 남겨주셔도 좋을 듯 합니다.
의문 둘. 왜 송기주선생은 당시 국내에 있었는데, 출품하지 않았을까?
당시 송기주는 미국에서 타자기를 개발하여 한국에 들어 와 있는 상태였고, 그런 그가 타자기 공모를 몰랐을 리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으로 돌아온 송기주는 자신이 개발한 언문타자기의 상용화와 보급을 위해 고구분투하고 있었을 것이다. 1949년 4월 24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송기주는 기존에 개발한 가로로 세로쓰기 방식의 한글(네벌식) 타자기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타자기 완성" 이라는 기사를 내었다. 조선발명장려회 타자기 공모 심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다. 공모 출품 조건이나, 자격이 부합하지 않아서 였을지?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에 송기주 언문타자기도 출품을 했었다면 결과가 어떠했을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든다.
2. 한국전쟁이 만들어 준 기회
공병우박사가 1950년 한국전쟁 중에 서울에서 북한군에 피랍되었다가 가까스로 탈출해 부산으로 갔을 때, 자신을 찾는다는 광고를 보고 공병우 박사는 손원일 제독을 만나게 되고, 해군에 타자기 납품과 타자수 양성을 부탁 받는다. 이것이 1952년의 일이다. 나는 이 시점을 국내 국내 타자기 상용화 보급의 시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쟁 중에 타자기 대량생산 납품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미 그 전에 시제품까지 개발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병우박사는 1949년 3월 조선발명장려회의 한글타자기 현상 모집에서 2등으로 수상 후 한글타자기를 특허등록을 하고, 미국에 언더우드 타자기사에 제작을 의뢰한 후 미국 ECA(Economic Coperration Administration 경제협조처)의 원조를 받아서 타자기를 제작 보급하였다고 한다. 이 시점이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데, 이 때 언더우드에서 제작한 시제품 타자기는 3대였다. 때문에 이 시점을 한글타자기가 대량생산되어 상용화 보급이 된 시점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어쨌든 이런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중임에도 1952년 타자기를 해군에 대량생산하여 납품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개발한 한글타자기 상용화를 위해 공병우박사도 많은 노력에 기울였음에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전쟁상황이라는 환경과, 빠른 문서작성의 필요성을 느낀 해군의 손원일제독의 의뢰 덕분에 공병우박사는 노력의 결심을 얻었다고 본다. 해군에 세벌식 타자기를 납품하고, 타자수 양성까지 지원하면서 공병우박사는 세벌식타자기 상용화의 문을 열었던 것이다.
3. 한글타자기 춘추전국시대
타자기 제조사는 1969년 정부의 한글표준자판 공포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먼저 한글표준자판 공포 이전에는 공병우, 김준성, 김동훈, 장봉선 이 네분을 비롯해서 타자기를 개발했던 소규모 제조사들이 많았다. 타자기를 제작할 자재나 부품을 당시에는 자체 생산 할 수 있는 여력이 안 되던 시대였기에, 대부분 올림피아(독일)나 올리베티(이탈리아), 언더우드(미국), 스미스코로나(미국) 등 해외 타자기 제조사에 아웃소싱으로 한글타자기를 제작하여 들여와 판매하거나, 외산타자기를 한글타자기로 개조하여 보급하는 공방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60년대가 오면서 속도 중심의 세벌식인 공병우타자기 외에도, 네모꼴이 체재식 타자기를 지향하던 김동훈 선생의 모아쓰기 다섯벌 타자기, 장봉선 선생의 모아쓰기 다섯벌 타자기 등의 다양한 수요층에 맞춘 한글타자기가 양산 보급이 되면서 타자기 수요 10만대의 시대가 열린다. 1968년의 통계에 따르면 행정기관에서 사용되는 11,163대의 타자기 중 공병우식 타자기가 6,702대(60%), 김동훈식 타자기가 4,264대(38%), 그 외 타자기가 197대(2%)로, 공병우식 타자기와 김동훈식 타자기 두 제품이 시장의 98% 이상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4. 정부의 한글표준자판 공포
한글표준자판 공포 이 후에 공병우 박사의 경우, 나중에 그의 아들 공영길이 운영하던 타자기 제조사 유니온타자기제작소에서 정부표준 네벌식을 생산하기도 했었다.(여기에도 배경이 있으나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겠다) 국어학자 최현배선생의 외솔타자기를 생산하던 정음사도 있었다. 허나 규모면에서는 대량생산 체제의 공장을 갖춘 '경방기계공업주식회사'(이후 경방크로바)와 '동아정공' 이 두 회사가 정부표준자판인 네벌식과 두벌식 타자기의 대중적인 보급에는 큰 축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주)경방기계공업은 1978년부터 타자기(크로바302)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주)동아정공은 1981년(마라톤 379)부터 타자기를 생산했다. 참고로 <한글 기계화 표준자판안>의 제정은 1969년에 과학기술처에서 당시 통용되던 세벌식, 다섯벌식 타자기의 장점을 절충하여 네벌식 자판을 표준안으로 정했다고 일방적으로 공포하였다. 결국, 정부의 표준자판안이 공포되고 9년 뒤인, 1978에야 처음으로 정부 표준안이 적용된 네벌식 한글타자기가 경방기계공업사에서 첫 출시 된다. 그리고 동아정공은 후발주자로 81년에 네벌식 타자기를 처음 출시한다. 시작은 달랐지만 경방크로바와 동아정공 두 회사가 국내에서는 마지막 타자기 제조사로, 모두 1996년까지 타자기를 생산하다가 중단했다고 한다.
5. 타자기 시장의 몰락
문교부가 1963년부터 상업고등학교 실업과에 타자를 교과목으로 배정했으나, 타자교육이 활성화된 것은 그로 부터 5년 뒤인 1969년부터라고 한다.(69년은 정부에서 한글표준자판을 네벌식으로 제정 공포했던 해이다.) 1970년 문교부는 「타자능력검정시험규칙」을 공포했다. 제한시간 5분에 최저 정타수 1,250타를 치는 자에게 1급을 주었고, 그 밑으로 5급까지 두었다. 1979년 문교부는 국정 한글타자와 영문타자 교본을 발행하여 타자교육에 보급 했다고 한다. 하지만 타자교과목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폐지가 되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다만 추측컨데,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던 타자검정시험(한글/영문)이 응시자수가 격감으로 1995년 9월 3일 마지막 시험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응시자수가 1991년 1백 2만여 명에서 1993년 66만 명, 1995년에는 21만 2천여 명으로 해마다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고 하며, 95년 마지막 시험의 응시자는 7만 8천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볼 때,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략 1995년 이 후인 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 보급에 밀려 자연스럽게 타자기과목도 폐지되고 사무기기로써 타자기의 사용도 점차 사라진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