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 송기주 조선글 타자기
한글기계화 톺아보기 두 번째는 1914년 이원익 언문타자기에 이어서 1934년 두 번째로 발명된 한글타자기인 송기주 조선글타자기로 계속 이어가 보려고 한다. 그전에...
'현존 최고의 한글타자기'는 송기주 타자기를 언급할 때 항상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2022년 10월 미국에 이원익 '언문타자기' 실물이 미국의 오논다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면서, 1914년에 개발된 최초의 한글 타자기인 이원익 타자기가 현존 최고로 오래된 타자기의 타이틀을 가져가게 된다는 언급을 했다. 현존 최고 타이틀이 다시 원 위치를 찾아간 것이다. 톺아보기(1)에서 2022년 10월 16일 자 디지털타임스의 칼럼 [홍성철의 까칠하게 세상 읽기]를 통해서 홍성철교수(경기대 미디어영상학과)가 이원익 언문타자기가 미국 오논다가 카운티 역사박물관에서 보유하고 있다고 했지만, 근거가 될 만한 사진이나 자료를 칼럼에 제시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어찌 보면 큰 뉴스거리가 될 이슈임에도 언론이나 정부 관련 기관에서 관심을 보인 곳은 없는 듯하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왜 정부기관이나 언론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칼럼을 쓴 홍성철교수는 칼럼 이후 후속 움직임이 왜 없는 것인가? 필자는 이 또한 의문이기도 했다.
이번 연재글 정리를 위한 취재를 하면서 필자는 의문을 풀게 되었다. 정리하자면 22년도에 홍성철 교수가 쓴 칼럼은 타자기수리 및 복원 전문가인 안병조 님의 2019년 6월에 게시한 블로그 글(https://blog.naver.com/ssabj/221570280057)을 참고하여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병조 님과 직접 통화로 확인한 결과, 안병조 님도 홍교수의 칼럼에 대해 이미 알고 있고, 자신의 블로그를 참고하였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원익 타자기는 정말 미국 오논다가 카운티 역사박물관에 실물이 존재하는가? 맞다. 사실이다. 안병조 님 말에 따르면 2019년 경에 구글에서 검색 중에 이원익타자기에 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고, 그 단서를 통해 계속 자료를 파고든 결과 결과 이원익 타자기 일부 사진과 오논다가 카운티 역사박물관에 그 실물이 소장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2019년 6월경 그의 블로그에 올려진 이원익 타자기 사진은 당시에 검색으로 찾은 사진이라고 한다. (현재 이원익 타자기를 검색하면 나오는 사진들은 거의 대부분이 이때 안병조 님이 올린 사진을 가져다 쓴 사진이라고 한다)이 후 안병조 님이 계속 미국 오논다가의 박물관 측에 이메일 등을 보내며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소통의 어려움으로 타자기에 대한 정보를 확인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3년 전 인 2021년도 경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교포 중에 영어로 박물관 측과 소통이 가능한 분을 알게 되었고, 그분 덕분에 박물관 측에 의뢰하여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현지에서 사진촬영을 의뢰하여 이원익 타자기의 실물사진을 유료로 제공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저작권에 대한 서류작성도 했다고 한다. 그 사진을 자료로 그는 현재도 스미스 프리미어 NO10 타자기를 구해서 이원익 언문타자기를 복원 중에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최초의 한글타자기인 이원익 언문타자기는 미국에 그 실물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국내에 있는 송기주 타자기가 현존 최고最高라는 타이틀은 이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사실은 확인은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일단 지금 브런치 연재로 쓰는 이 글 외에도 언론사에 이 사실을 알릴 필요가 있다. 한글기계화의 위대한 문화유산이 미국에 실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를 알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 개인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 같다. 대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정부차원에서 기관 대 기관으로 접촉하여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한국으로 들여올 수 있다면 들여올 수 있도록 하고, 그게 어렵다면 한국으로 가져와 기획전시라고 열어서 우리 국민들이 언문타자기의 실물을 보면서 한글기계화 역사를 바로 알고, 그 가치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재미교포인 송기주 선생이 미국에서 개발하여 한국에서 상용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던 두 번째 한글타자기이다. 다행히도 국립한글박물관에서 현재 소장하고 있는 실물은 송기주 선생의 아들인 고, 송병훈 옹이 한국전쟁 당시 피난길에서 아버지의 타자기를 알아보고 구매하여 보관해 오다가, 그의 사후 손주인 송세영 씨가 보관하다가 2014년 국립한글박물관 개관 당시 기증하였다. 그리고 2019년 11월 4일 문화재청에서 송기주 타자기를 국가등록문화재로 예고한 후 19년 12월 30일 송기주 타자기는 제771호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이 된다. 송기주박사는 1900년 평안남도 생으로, 1921년 연희전문학교 농과를 졸업하고, 1924년까지 교편을 잡았다. 1924년 미국으로 떠나 1년간 하와이에서 체류 한 뒤 1925년 휴스턴에 있는 텍사스 주립대학교로 진학하여 생물학을 전공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그는 시카고대학교 지리학과의 교수 굿(John Paul Goode) 교수의 문하로 옮겨 지도 제작을 배우고, 지도 제작사 랜드 맥날리에서 지도제작 및 도안 일을 하게 된다. 송기주는 평소에도 타자기에 취미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에 있는 동안 타자기 열풍을 직접 느끼면서, 어쩌면 우리 한글도 이 문명의 기계를 이용하여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한 것이 한글타자기 개발의 계기라고 그는 밝혔다. (조선일보 1934.1.24.2면/ 동아일보 1934.3.1. 조간 12)
송기주 타자기는 두 가지의 모델이 있다. 첫 번째는 1927년 가로로 풀어쓰기 방식의 두벌식 한글타자기를 개발하였다.
원형이 되는 타자기는 하몬드 타자기( Hammond Typewriter Company – manufacturer 1905–1913, New York, USA)를 사용했다. 오른쪽 사진과 같은 타자기이다. 이는 1929년 1월 17일 동아일보에 朝鮮文橫書(조선문횡서) 打字機發明(타자기발명)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아래는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발췌한 당시 신문보도 내용이다.
신문기사에 하몬드타자기의 사진이 함께 실려있으나, 당시 인쇄물의 질이 지금과 같지 않아서 사진 속의 타자기가 송기주가 개발한 한글 타자기 인지? 그냥 이런 타자기를 사용했다는 의미에서 하몬드 타자기의 사진을 인용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의 신문기사를 지금 2024년에 이렇게 편안하게 검색하여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한 일 같다. 당시 신문을 보면 한글에 한자를 같이 병행하여 사용하고 있다. 글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세로로 써 내려가는 방식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로로 쓰는 지금의 글쓰기 방식과는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한글이지만 지금과는 맞춤법 표기가 사뭇 다른 부분이 많아서 이런 다름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있다. 타이프라이터를 '타이부 라이트'라고 표기한다거나, 인쇄기계를 '인쇄긔계'로 쓰는 것도 신기하게 보인다. 지금 사람들은 신문만 봐서는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우니 네이버에서 친절하게 한자까지 한글 문장으로 읽기 편하게 정리까지 되어 있다.
기사 내용을 보면 송기주는 횡서법 한글타자기를 1929년 미국 특허국에 특허신청을 했고, 조선타자기판매회사와 조선문개량협회를 조직하여 이를 홍보하고 있다고 하며, 타자기의 가격은 사무실용이 백십오 원, 여행용이 구십칠 원 오십 전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한글과 타자기" 책에서 김태호 교수가 정리한 내용을 보면 송기주는 횡서용 한글타자기 발명하여 미국에서 특허를 출원 신청을 하였으나, 승인은 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필자는 1929년 동아일보 신문기사에 송기주 타자기의 구조나 작동방식, 활자의 견본 같은 것이 언급되지 않아서 그 부분이 가장 아쉽다. 타자기는 현존하는 것이 없다고 하지만 다행히 이 풀어쓰기 타자기의 서체 견본은 남아 있어서 가로로 풀어쓰기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다.
송기주 한글타자기의 두 번째 모델은 1934년에 개발된다. 두 번째 타자기는 첫 번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량되었다. 두벌식에서 네 벌 식으로 바뀌었고, 가로로 풀어쓰는 방식을 가로로 찍어 세로 읽는 모아쓰기 방식으로 바뀌었다. 타자기의 원형은 언더우드 사의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 Underwood Portable Typewriter를 사용하였다. 글쇠는 자음 세 벌, 모음 한 벌의 네 벌 식이다. 1969년 한글표준자판으로 제정된 그 네 번식과는 다른 네 벌 식이다. 아래는 송기주 타자기에 대한 공병우 박사의 회고이다. 공박사의 회고를 통해 송기주 타자기에 대해 조금 알아보고 넘어가자.
다음은 김태호 교수가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송기주 타자기를 직접 조사하여 서술한 작동 메커니즘이다. 공병우 박사의 회고와 실제 조사결과에서 다른 점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에 있는 자료 중에 송기주 조선글타자기의 매뉴얼자료가 있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송기주 타자기는 언더우드 포터블 타자기인데, 매뉴얼에 보면 사무실용 모범타자기가 있다. 언더우드 넘버 3 스탠더드 타자기를 한글개조한 모델로 보이는데, 매뉴얼에 있는 사진으로 보아 시제품으로 제작한 실물이 존재했으리라 생각된다. 매뉴얼은 국립한글박물관에서 열람과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이 매뉴얼에서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매력 포인트는 매뉴얼 전체의 한글 표기와 맞춤법이다. 1934년 당시 사용했던 한글 맞춤법 그리고 타자기의 부분 명칭을 송기주선생이 표기한 설명은 정말 흥미롭다. 활자가 '찍힌다'는 표현도 있고, '박힌다'는 표현도 같이 사용된다. 지금은 다소 생소할 수 있으나 당시에는 타자기에 글자가 박힌다는 표현도 자연스러운 표현이라는 관점으로 매뉴얼의 한 구절 한 구절 세로로 꼼꼼하게 읽어 내려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 느낌도 든다.
아래는 70년 크로버 타자기의 매뉴얼에 있는 각 파츠별 명칭이다. 아래의 조선글타자기의 명칭과 비교해서 하나하나 읽어보면 한글로 각 파츠를 설명하기 위해 송기주 선생이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도 짐작이 간다.
타자기 사용법도 읽어보면서 지금의 한글맞춤법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위의 작동 메커니즘을 잘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은 아니지만, 송기주 타자기를 실제 작동하는 영상이 KBS TV쇼 진품명품 1393회 타자기 편에 자료화면으로 잠시 등장한다. 이 1393회에 감정을 의뢰한 타자기는 필자가 수집한 타자기를 의뢰한 것인데, 덕분에 자료화면에서 송기주 타자기 작동 영상을 덤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KBS TV쇼 진품명품에 타자기를 감정의뢰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다룰 예정이다. 아래의 영상은 송기주 타자기 작동영상이 나오는 부분만 편집한 것이다.
영상이 너무 짧아서 아쉽고도 아쉽다. 그래서 스페셜 영상을 하나 더 구했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타자기 사용자 모임' (약칭 타사모)에 능력자 마니아들이 많다. 그중 한 회원님이 직접 고안하고 개조한 세로 쓰기 타자기의 타이핑 영상도 비교해서 보면 좋을 듯하여 원저작자에게 협조를 받아 영상도 같이 첨부한다. 이 타자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한 사람은 아래에 있는 링크를 참고하기 바람.
송기주 타자기의 서체견본은 한글 풀어쓰기 교본(장봉선 엮음)에 있는 자료이다.
송기주 타자기의 개발부터 작동 메커니즘과 실제 작동영상, 서체 견본까지 정리했으니 이제 송기주박사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후의 행보들을 신문기사로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당시의 송기주의 한글타자기 발명에 대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기사를 시간의 흐름순으로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출처: 한글打字機完成(타자기완성) 1949.04.24. 동아일보
위 기사들의 내용대로 송기주는 한국으로 들어와 자신이 개발한 조선글 타자기를 상용화 보급 노력을 했다. 송기주 선생은 두벌식을 네 벌 식으로 개선하며 상용화를 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가격의 문제나 당시의 한자병기 등의 글쓰기 문화의 차이 등 수요처를 찾지 못하고 실패했다. 때문에 송기주는 미국에서 배운 지도제작법으로 한국의 지도 보급하는 일이하며 지냈다. 그리고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납북 이후의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래는 공병우박사가 송기주선생에 대해 회고하는 내용이다.
그동안 필자가 많은 자료들을 찾아보았지만, 송기주 선생의 납북 이후의 행적을 알 수 없었는데, 장봉선 선생은 어떻게 알았는지, 송기주 선생이 북으로 피랍 후 행보를 알고 있었다.
송기주선생 납북 후에 체코슬로바키에서 타자기 연구하시고 이후 어떻게 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북한의 한글자판 체계를 잡는데 역할을 하셨으리라 생각하고 싶다.
정리를 하다 보니 거의 송기주 타자기 특집이 된 듯하다. 그만큼 남아 있는 자료들의 양과 정보들이 많아서라고 생각한다. 1934년 이후에도 다른 발명가들의 한글타자기 만들기 노력이 계속 이어진다. 하지만 그 활동이 대부분 국내가 아니라 국외에서 이루어진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한반도에서는 한글 기계화 작업은 꿈도 꾸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따라서 초창기 한글 타자기도 재미 교포가 개발하고 교포사회 위주로 사용했을 뿐, 국내까지 널리 소개되어 사용될 기회조차 갖지를 못했다. 또 글쇠의 배열이나 타자 동작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능률면에서도 한계가 있었지만, 이런 노력들이 후세에 한글 기계화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디딤돌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한계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글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 했다.
1934년 송기주 조선글 타자기 이후에 개발된 한글타자기도 미국에서 활동하던 김준성 목사가 발명한 한글타자기이다. 1945년 레밍턴 영문 타자기를 한글 풀어쓰기 타자기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김준성은 목사이면서 교육자, 웅변가로 활약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 미국의 소리> 한국 아나운서로 활약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준성의 타자기는 두벌식 풀어쓰기 방식이다. 미국 레밍턴에서 만들어 광복 후 미군정시대에 300대가 국내에 도입되었으나, 한국전쟁 시 이를 다시 영문타자기로 개조하여 썼다고 한다.(정말 안타까울 따름이다) 필자가 정리할 수 있는 자료와 정보는 여기까지이다.
그동안 김준성타자기가 국내에 존재하는지 없는지 조차 알 수 없었다. 앞서 언급했던 홍성철교수의 칼럼에도 "김준성타자기"는 국내에 없다고 언급했다. 2010년 경 한 재미교표가 벼룩시장에서 구매한 사실을 블로그에 알렸으나 이후 소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참고사진의 출처는 춘하추동이라는 블로거의 글에 있는 김준성 타자기 사진인데, 이 사진의 출처를 밝힌 링크(파워펀치의 이야기, http://blog.daum.net/duhnco45/30 [출처] 우리나라 초창기 타자기 역사|작성자 춘하추동)를 가 보면 현재는 비활성화되어 있다. 때문에 사진의 출처를 더 이상 추적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실물이 존재한다. 마침 필자가 브런치에 한글기계화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 이 타이밍에 김준성타자기 실물이 나타난 것은 마치 하늘에서 기회를 준 것인지?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정리하고 있던 최근에 타자기수리, 복원가 안병조 님께서 연락이 왔다. 타자기 수리 의뢰가 들어왔는데, 아무래도 김준성 타자기인 듯 하니 한 번 봐 달라고. 핸드폰으로 보내온 사진을 보니 위 참고사진과 그대로 일치했다.
근거가 있어야 하니 안병조 님을 통해 제공받은 사진을 소개한다. 허락을 받고 사진을 올리는 것이니, 독자분들은 무단도용에 유의하여 주시길 바란다. 타자기 소유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다면, 언론에서 기사화하여 다룰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생각이다. 아무튼 조만간 필자는 김준성 타자기 실물을 만나러 갈 예정이다. 후기는 나중에 다시 정리하도록 하겠다.
도덩보(도정보) 타자기의 정보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도덩보 풀어쓰기 타자기는 한영 겸용이면서 닿소리를 오른쪽에 두고 홀소리를 왼쪽에 둔 것이 특징이다. 이 타자기도 김준성타자기처럼 풀어쓰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이탤릭체처럼 약간 비스듬하게 누운 글자체를 쓰고 있다. 아마도 나중에 풀어쓰기와 모아쓰기에 대한 글을 쓰면 다시 등장하게 될 듯하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필자가 좋아하는 헐미스 엠베서더인 스탠더드 타자기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스탠더드 타자기면 당시 가격으로도 상당히 고가였을텐데, 저런 시도의 배경도 궁금해진다. 업무용으로 그만큼 쓸모가 많아서였는지? 보면 볼수록 궁금증이 증폭된다. 그리고 저 동그란 키캡은 올리베티 스튜디오 44에 적용되는 키캡의 모양과 유사해 보이는 데 어떻게 헐미스 특유의 민트색이 적용된 저런 키캡을 만들 수 있었는지도 참 궁금한 부분이다. 모아쓰기 방식이 아니라서 그동안 필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도 이유이지만, 모아쓰기와 풀어쓰기에 대한 논쟁도 한글기계화 과정에 참으로 오랫동안 이어져온 이슈였기에 앞으로는 풀어쓰기 타자기도 자료를 많이 찾아봐야겠다.
한글기계와 톺아보기(2)는 여기까지 정리하고 다음 편으로 이어가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