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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뜨로핏 Rettrofit Oct 16. 2024

EP2. 타자기, 다시 쓰기

사무기기에서 문화향유의 도구로의 기능 전환


타자기의 시대가 저물다.

 타자기는 미국에서 크리스토퍼 숄스 Christopher Sholes와 그의 조수 카를로스 Carlos Glidden가 함께 개발한 타자기를 레밍턴 사 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고 최초로 상용화하여 보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68년 초기 모델이 있었지만 실패했고, 1876년에 영어 대문자와 소문자를 쓸 수 있는 쿼티 Qwerty 배열의 자판을 채용한 타자기가 첫 상용화 출시되었다. 이것이 타자기 상용화 역사의 첫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135년이 지난 2011년 4월 25일 인도에 전 세계에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타자기 제조사 "고드레지 앤 보이스 Godrej and Boyce"가 폐업했다는 소식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적으로 언론에 보도될 정도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진출처.  LinkedIn Godrej & Boyce Mfg. Co. Ltd. 페이지

사진(오른쪽)은 전 세계에서 마지막으로 문을 닫은 타자기 제조사 고드레지 앤 보이스 Godrej and Boyced의 타자기이다. (참고링크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110427/36723149/1)


그럼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한국에서 타자기 상용화를 언급하자면 안과의사 공병우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필자의 견해로 대한민국에서 한글타자기의 상용화 역사는 불과 44년으로 미국에 비해 매우 짧다. 한글타자기 상용화 역사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두 번 있는데, 하나는 1950년 한국전쟁이고, 또 하나는 1969년 정부의 한글표준자판 공포이다. 필자는 한국전쟁 당시 공병우박사가 해군의 손원일 제독의 의뢰로 1952년 해군에 세벌식 한글타자기를 납품하게 된 것이 한글타자기가 처음으로 주문을 받아 대량 생산하여 보급된 상용화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한글기계화와 관련한 한글타자기의 역사적인 이야기까지 하려니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이 과정의 이야기들은 다음에 다루어 보려고 한다. 오늘은 사무기기로써 135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컴퓨터에게 밀려난 타자기의 활용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타자기가 컴퓨터에게 밀려서 회사에서 명예퇴직한 모습 AI로 만들어 봤다. 슬픈 장면인데 너무 귀엽게 그린 것 같다



타자기는 사무기기였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타자기가 사무기기로써의 그 역할과 기능을 상실한 것을 어느 시점부터로 봐야 할까? 그 시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의 1950년대부터 타자기는 이미 사무기기로 사용되고 있었다. 문교부가 상업고등학교 실업과에 <타자>를 교과목으로 배정한 것이 1963년부터의 일이고, 문교부가 국정 <한글 타자 교본>과 <영문타자 교본>을 발행하여 타자 교육에 보급한 것이 1979년의 일이다. 그러나 타자 교과목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폐지가 되었는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주관하던 타자 검정시험(한글/영문)이 응시자 수가 격감激減하여 1995년 9월 3일 마지막 시험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니 이를 근거로 볼 때, 필자의 생각으로는 1995년 이후부터 컴퓨터 보급에 밀려 자연스럽게 타자기 과목도 폐지되고 사무기기로써 타자기의 사용도 점차 사라진 것으로 생각된다.

동아일보 1995년 9월 5일 사회 13면 기사



젊은 시절 회사에서 타자기를 다루었던 그 시대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여전히 타자기를 문서 작성하는 사무기기로, 글 쓰는 기계로 인식하겠지만, 2024년을 살고 있는 지금의 10대~20대는 타자기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고, 30대 후반까지는 어린 시절 가족 중에 누가 타자기를 보관하고 있어서 그걸 본 기억을 가진 사람은 몇몇 있을 정도일 것이다. 이제 50대에 접어든 필자도 20대가 되어서 수동타자기도 아닌 전자 타자기를 그때 처음 접해 봤으니, 사람들에게 타자기가 본래의 기능을 잃고 사라진 지가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인 것 같다. 이제 타자기를 사무기기로 인식하거나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타자기를 처음 본 아이의 모습을 AI에게 그리도록 해 봤다.



이제 사람들의 인식과 기억 속에 타자기는 공간을 꾸미는 장식용 골동품, 전시장의 전시품, 드라마나 영화의 소품 정도로 취급되고 있다. 고장이 심하면 고물상에서 고철 취급을 받기도 할 것이다. 나는 아직 충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음에도 내 존재가 필요 없어진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타자기 입장에서는 비참하고 또 억울할 것이다. 필자는 그런 타자기의 상황이 마치 회사에서 더 젊고 능력 있는 직원(혹은 경쟁자)에 밀려서 정리해고 되거나, 스스로 명예퇴직을 선택한 직장인의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타자기의 상황처럼 여전히 사람들은 기술의 발달로 더욱 편리한 문명을 누릴 수 있지만, 인공지능과 로봇에게 밀려서 일자리를 위협받기도 한다. 이는 생계와 직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출처: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3051638

컴퓨터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타자기는 사무기기에서 하루아침에 폐품취급을 받으며 버려지기도 했지만, 또 어느 곳에서는 창고에서 보관되다가 산업유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아 지역의 산업역사박물관에 전시품으로 제2의 인생을 누리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전시장 한편에서 전시품으로 먼지만 쌓여가는 타자기보다는 본래의 기능을 발휘하면서 다시 쓰이는 것이 훨씬 더 좋아 보이지 않을까? 그 바람은 돌아온 복고열풍으로 이루어진다.   


출처. https://www.m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302



사무기기에서 문화 향유의 도구로

 컴퓨터에 의해 명예퇴직 당하듯 사무실에서 밀려난 타자기는 아마도 사무실이 아닌 어디 구석진 창고의 선반이나, 장롱 구석 어딘가에서 먼지를 덮어쓰고, 말라가는 기름에 뻑뻑해진 관절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며, 숨죽이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기에게도 제2의 활약을 할 기회의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2017년~18년부터 복고復古와 레트로 감성이 트렌드로 다시 급부상하면서, 타자기의 몸값과 인기가 다시 치솟았던 시기가 있었다. 필자가 타자기를 수집하기 시작한 2020년에 비해 지금 중고 타자기의 시세는 확실히 더 올랐음을 체감한다. 기성세대들에게는 레트로가 과거의 추억을 소환하는 것이지만, MZ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레트로 감성은 단순히 복고풍의 문화를 즐기고 소비하는 그 이상으로, 나의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과거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나마 경험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 이후 '레트로'는 사라지지 않고 느슨하게, 그렇다고 아주 뜨겁지도 않게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젊은 층을 중심으로 이제 레트로는 하나의 문화이자 즐길 거리로 이어져 오는 것 같다. 그 속에서 '타자기'도 아주 작은 영역에서 나마 조금씩 새로운 용도와 위상으로 복귀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출처. https://www.m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73



 과거에 타자기는 군이나 관공서, 보험회사, 무역회사와 같은 기업체, 소설가, 시인과 같은 문학 작가들에 의해 폭넓은 영역에서 문서 작성용으로 사용되어 왔다. 타자기의 시대는 갔지만, 그럼에도 아직도 일부 소수의 영역이기는 하지만 물류업체나 법률사무소 등에서는 (전동) 타자기를 사용하는 곳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서작성은 이제 컴퓨터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고 타자기가 쓸 글이 없을까?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타자기는 여전히 주기능인 글쓰기 기능으로 활약 중이다. 과거의 타자기는 업무를 위한 목적 지향형 글쓰기를 했다면 이제는 업무가 아닌 개인의 정신적 문화 향유에 쓰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로 '필사筆寫'를 들 수 있다. 아주 옛날 옛적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 필사는 가장 원초적인 인쇄기법 중에 하나였다. 책 하나를 복사하려면 손으로 일일이 직접 베껴 써야 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는 세상이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필사를 한다. 만년필 덕후들은 자신이 수집한 다양한 만년필을 활용해 다양한 펜촉과 잉크를 활용해 필사를 즐긴다. 펜촉(닙)이 종이 눌러지는 압력을 손 끝으로 느끼며, 종이에 스며드는 잉크의 색감과 향을 느끼며 감각하는 힐링의 시간이다. 마찬가지로 타자기 덕후들도 타자기로 필사를 즐긴다. 필사할 거리도 아주 다양하다. 좋아하는 시인의 시, 노래 가사,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의 문장 구절, 성경 등  필사하며 자신의 신앙심을 키우기도 한다. 만년필과 마찬가지로 타자기를 치는 행위도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사용하기 위해 몰입하고, 이 몰입의 과정을 통해 힐링하는 문화 향유의 대명사가 되어 가고 있다.



타자기로 노래가사를 필사한 사진



과거 타자수들의 타이핑은 그저 업무의 일환이었고, 생계를 위한 삶의 일부분이었다. 택시기사가 영업을 위해 운행하는 자동차처럼 타자기는 그저 하나의 툴 tool 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일이 아닌 취미로 타자기를 오롯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타자기는 이제 고된 노동에서 해방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타자수에게 하루 종일 문서 작업으로 혹사당하던 시간은 가고, 이제는 나를 애지중지 아껴주는 수집가의 사랑을 받으며, 이쁘게 단장을 하고 여유 있게 활자를 찍어내려가며 필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이제 타자기는 '필사'라는 행위를 통해 우리 삶의 정신적 가치를 높여주고 있는 문화 향유의 매개체가 된 것이다.


출처.  ‘탁탁 탁탁 팅’ 타자기 소리가 주는 힐링 (koreadaily.com)



사람마다 필사를 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그리고 필사의 장점도 많다. 필사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폭넓은 문화적 소양을 키울 수도 있다. 남의 좋을 글을 옮겨 쓰면서 자신의 글쓰기 능력을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 필자는 필사라는 행위를 통해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적 힐링 Healing을 즐긴다. 그래서 나에게 타자기는 힐링을 주는 안식처 같은 존재이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덩어리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정신적 안식처가 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필사 외에도 타자기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다. 필자는 아이들의 어린이집, 학교에서 오는 제출서류를 작성할 때도 타자기를 사용한다.



한지와 색지를 이용해서 부채에 필사한 문장을 붙여서 사용해 보았다


타자기로 편지를 작성해서 오랜만에 타자기 동호회 지인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타자기로 편지나,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서 전하기도 하고, 필사를 한 결과물로 액자를 만들어서 걸어두거나, 텀블러를 장식하기도 하고, 합죽선 부채를 타자기 필사로 꾸미기도 한다.



가수 비비의 밤양갱 노래가 한창 유행할 때 노래가사를 타이핑해서 텀블러 장식에도 활용해 보았다
밤양갱이 한창 유행할 때 김동훈 다섯 벌식 타자기로 세로 쓰기 필사한 결과물


여기까지는 타자기덕후가 타자기를 즐기는 방식이었다. 그러면 예술가가 '타자기'라는 매체를 가지고 예술작업에 활용한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최근에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가다가 조소희 작가의 개인전에 대한 피드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필자가 이미 이 전시 소식을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되었을 때는 전시가 끝나갈 무렵이라 직접 전시장을 방문하여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사진은 바로 아래의 사진이다. 스위스산 타자기 헐미스(헤르메스라고도 한다) Hermes 3000 2세대 모델이 내추럴 컬러의 나무 책상에 올려져 있는 장면을 보자마자...


"엇? 이건 뭐지...?"


그리고 타자기를 올려두고 사용하기 너무 좋은 책상이다. 나도 타자기 때문에 이런 책상을 늘 필요로 해 왔었는데,,, 처음에는 테이블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다음 위에 올려져 있는 여러 가지 오브제 Object 들... 전시에 대한 정보를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출처: 매스갤러리.  단어 몇 개와 이미지, 서정이 있는 편지 (massgallery.info)



조소희 작가의 작업에 대 자세한 내용은 링크와 검색으로 확인 가능하니 찾아보시라.  다시 돌아와서, 예술가의 손에 타자기가 있으니 그 결과물이 예술작품으로 발현이 된다.(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조소희 작가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20년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두루마리 휴지에 타자기로 타이핑을 통한 예술작업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이 사진을 보는데 정말 놀라움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오랜 기간 알고 지내는 지인(그녀는 전시기획자이다)과 조소희작가가 전시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경험이 있는 꽤 친한 관계라는 것이었다. 그 지인을 통해 조소희작가가 타자기로 어떻게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지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었다. 또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조소희 작가의 작업에 함께 방문하자고 하였다. 작가의 작업실 구경이라니 생각만해도 들뜬다. 작업실에 방문하게 되면 타자기와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많이 해 보고 싶다.  

출처: 조소희 작가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eel/C_zgGUevals/?igsh=MTkxeWRlYXFyMTd5dg==


여기까지 언급된 이야기 외에도 2024년이란 동시대 지금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 의해, 타자기는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무궁무진한 사연들이 존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기를 어떻게 즐기느냐에 따라 결과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한국에서 타자기의 생산이 중단된 1996년 이후 28년이나 지났지만, 타자기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서 일하고 있다. 나는 앞으로 타자기를 어떻게 쓸 것인다? 이 글을 읽는 타자기를 어떻게 활용하고 싶은 지?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 다음 편에서는 타자기 덕후들이 알아두면 좋을 한글타자기 기계화 역사와 관련한 몇 가지 에피소드들을 정리해 볼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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