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안정감의 양면성
도로 위에서 운전하는 일이 늘어난 탓일까? 최근 몇 년간 길거리에서 앰뷸런스를 마주치는 일이 잦아졌다. 코로나19 시국에는 의료체계가 붕괴직전까지 갔으니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최근에는 의료계 파업으로 응급실이 부족한 탓에 이리저리 헤매는 구급차를 더 자주 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앰뷸런스의 소리는 응급상황이라는 것을 모두가 짐작하고 남을 만큼 강렬하다. 그 소리가 듣기 좋을 리 없지만 그렇게라도 주위를 환기시키지 않으면 엉망진창(?)인 서울의 도로사정에서 골든타임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나는 몇 년 전 교차로를 질주하는 앰뷸런스에 주행을 양보하다가 뒤에 따라오던 트럭에 받힌 적이 있다. 잔뜩 막히던 교차로 신호대기가 풀리자마자 냅다 튀어나오던 트럭이 급정거한 내 차를 발견하지 못한 탓이다.
거두절미하고 나는 앰뷸런스와 도로 위에서 마주치는 일을 반기지 않는다. 무언가 위급한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 자체가 반갑지 않다. 최대한 그들을 배려하고 양보하지만 앰뷸런스를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개운하지 않다. 그 소음도 한몫한다. 그런데 내 아들은 앰뷸런스를 발견할 때마다 나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곤 한다. 자신은 앰뷸런스를 마주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곰곰 따져보니 나와 아이는 모두 앰뷸런스에 대한 공통적인 기억을 갖고 있지만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 아이는 유난히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에 간 경험이 많다. 그런데 그때마다 대부분 동승한 사람이 나였다. 나는 앰뷸런스 안에서 마음을 졸이며 아이를 지켜보았고 내 아이는 앰뷸런스에 타고서야 비로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그 이후부터 아이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야 마음이 안정되었고 나는 사이렌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애간장을 태우던 기억이 떠올라 불쾌했던 것이다.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지나가고 있는 것을 볼 때마다 든든하고 편안해진다는 모 작가의 이야기를 들먹이지 않아도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는 앰뷸런스와 소방차는 중요한 사회안전망이다.
그 존재 의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들을 자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또 누군가 나와 같이 애간장을 태우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마음이 편할 리 없다. 그 소리는 유난히 요란하며 무언가 큰일이 났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드는 것 같다. 나는 어머니, 조카, 아내, 딸, 아들, 심지어 동료 직원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많이 누군가의 응급상황으로 인해 앰뷸런스에 동승했다.
세상에서 나보다 더 많이 앰뷸런스를 타본 사람은 119 구급대 직원 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 내가 제일 불안한 건 언젠가 내 몸이 앰뷸런스에 누워 있는 날이 올 것만 같다는 것이다. 나는 구급차와 응급실이 익숙하다. 그런데 구급차와 응급실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건 낯설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