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너(runner) 이준우의 글
나의 러닝 이야기는 이별로 시작한다. 한 사람과의 작별, 두 인간이 우연 속에서 만나 짧게나마 썼던 스토리가 귀결되며 남긴 공허감이 나의 러닝의 첫 스타팅 포인트가 되었다. 공허감으로 표현함이 맞을까, 공허감보다 오히려 너저분하게 쌓인 옛날 잡지들처럼,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안 쓰는 장난감들처럼, 나는 켜켜한 먼지 속의 과거에서 환기구를 찾고자 했다.
난 왜 러닝을 시작했을까. 어쩌다 한 번 숨차게 뛰는 뜀박질같이 나를 안심시키는 운동이 아니라, ‘아 나는 뛰어야 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결심했던 그때를 다시 찾아가 본다. 2020년 5월, 당시 교제하던 여자친구와 종지부를 찍고, 미리 계획할 새 없이 처분 가능한 시간들(disposable time)이 처음으로 많이 주어졌다. 이에 덤으로 온갖 상념과 욕심들이 내 평온했던 일상에 빠르게 침투했고, 나는 이러한 상실감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나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 시점에 나는 애플 워치 5를 샀고, 당시에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가벼운 신발 아디다스 노마드 R1이 있어서 달리기를 시작할 마음을 먹을 수 있었다. 마침 광화문으로 출퇴근하는 시점이어서 상황이 자연스레 준비가 되는 느낌이었다, 내가 뛰기만 하면 되었다. 6시에 퇴근을 하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닥터드레 비츠 헤드폰을 멋있게 끼고 경복궁 둘레길로 향했다.
퇴근길에 나선 직장인들 사이에서 반대편 경복궁으로 향하던 기분이 좋았다. 퇴근 시간의 광화문 사거리는 퇴근 차량과 버스로 바빠진다. 돌담길과 기와도 노을빛을 비추기 시작하는 즈음, 나는 뛴다. 고개를 들면 하늘이 있고, 내 옆엔 돌담길과 가로수가, 그리고 바닥은 돌바닥이 몰입을 도와준다. 수백 년의 세월에도 나와 같은 러너들을 만났을 역사가 나를 이해해 주는 느낌이 든다. 그럼 나는 안심하고 내 호흡과 내 기분에 집중한다. 고민들을 머릿속에 가득 싣고 출발한 내 러닝은 경복궁 둘레 코스를 밟으며 이리저리 방황한다.
경복궁을 두 바퀴를 돌면 5킬로를 채울 수 있다. 이걸 미리 염두에 두고 경복궁의 담을 올렸을까, 하는 생각을 뛸 때마다 했다. 조선시대에는 측량법이 근대화되지 않아 오차가 많았다고 한다. 거리를 잴 때 척(尺), 보(步), 리(里)를 주로 사용하였다고 하며. 흔히 쓰는 자는 일반적으로 주척(周尺)을 썼다. 주척의 단위는 ‘6척을 1보, 360보를 1리’라 하여 3,600보를 10리(약 4㎞)로 나타냈다(출처). 그렇게 경복궁 코스의 기본 러닝 거리는 5킬로이거나 약 12.5리였다.
보통 광화문을 바라보고 오른쪽 방향으로 많이 뛰었는데, 동십자각을 지나치면 좌측으로 건춘문이 나타나고, 여기서 반대편까지 꽤 가파른 경사로가 시작된다. 국제갤러리 시점부터 경복궁 코스의 가장 가파른 지점이 시작되는데, 이 청와대로 진입 구간이 내가 제일 싫어하는 구간이다.
짧은 보폭과 팔꿈치 스윙으로 추진력을 유지하며 경사로에 오른다. 심장이 엄청 뛰기 시작한다. 몸이 무겁다는 느낌으로, 그냥 걸으라는 유혹을 가장 많이 받는 때다. 걸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다, 하지만 무릎을 들어 올려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견딘다.
올라오면 앞에 청와대 춘추관이 보인다. 헉헉 거리며 올라온 보람이라도 되듯, 더욱 고즈넉한 경복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앞, 그리고 건너편 길엔 총을 든 군인들과 경호원들이 내 러닝을 지켜본다. 이 지점은 호흡을 추스르는 시간이다. 왼쪽에 건청궁 대문이 보이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청와대 정문을 향해 살짝 인사를 날려준다. 안전하게 뛸 수 있게 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이제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이쯤 되면 어둑어둑하기도 하고, 반대편에서 저녁 식사로 나온 정부 관계자들이 있기 때문에 속도를 내지 않고 조심스레 지나간다. 그렇게 효자동 삼거리를 끼고 내려오면 속도를 낼 수 있는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이 일직선 코스는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된다. 그래서 근육에 낀 긴장을 조금 풀고, 호흡은 자연스럽게 가지고 가속을 즐긴다. 그렇게 영추문을 지나고 국립 고궁 박물관 입구에 다다른다. 여긴 신호등이 있어 사람들이 서 있기 때문에 속도를 줄여야 한다.
이렇게 광화문 방향으로 틀어 나오면 광활한 하늘에 진 노을을 마주하며 뛸 수 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새로운 그림은 다시금 내 몸에 활력을 주고, 또다시 정신을 환기할 수 있게 도와준다. 몸은 힘들지만, 여기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지나쳐야 하는 구간이다. 광화문 앞에는 수문장과 사진을 찍으려는 관광객들이 많다. 여기서 내 러닝 폼이 흐트러진다면 수문장이 지키고 있는 광화문과 자연스러운 배경으로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또 첫 lap을 멋지게 끝내기 위해서라도 잘 달려야 한다. 이렇게 다시 동십자각을 만나고, 난 이걸 한 번 더 한다.
두 바퀴를 1킬로에 5분 30초 대로 뛰었다면 엄청 잘 뛰었거나 엄청 노력한 날이다. 그래도 기록보다 내가 경복궁을 두 바퀴 뛰었다는 사실은 더욱 중요하다. 뛰기 전 의지만을 가지고 시작한 나와 그 의지를 성실히 이행한 내가 떳떳하게 만나서 수고했다고 인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회사를 옮겨 판교로 내려와 살고 있는 내게 경복궁을 매일 뛸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사직로, 삼청로, 청와대로, 그리고 효자로로 이루어진 이 코스는 차량도 거의 없고, 러너에게 수많은 광경을 선사하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훌륭한 코스다. 단단하게 쌓인 돌벽, 그리고 키가 조금씩 다른 기와들, 그리고 멀리 보이는 북악산 자락은 뛰면서 하는 내 이야기를 한 글자도 빠짐없이 다 들어주었다. 친하진 않지만 지혜로운 어른 같은 이 경복궁 코스는 내가 러닝의 재미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한 고마운 코스다.
재미는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러닝은 쉽지만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 뛴다는 것’이 재미있지 않으면 고차원적인 근거를 대며 뛰면 좋다고 말해도 먹히지 않을 거다. 계속 뛰는 사람들은 그 재미를 몸으로 알고 있다. 나의 경우, 러닝슈즈를 신고 산뜻하게 뛰기 시작하는 그 처음 느낌이 중요하다. 가볍게, 위트 있게, 만만하게 시작하는 그 느낌 그대로. 그때 내 몸이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설레한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이 느낌은 오래가지 않는다. 오히려, 뛰는 동안 내가 느끼는 이 피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다독일까 생각을 하다 보면 명상이 끝난다.
<GRIT>을 쓴 안젤라 더크워스도 끈기 있게 하려면 우선 그게 재미있어야 한다고 한다. 맞다, 재미없으면 오래 하기 어렵다. 단순하다, 재미있으면 또 하고 싶다. 그래서 경복궁 코스를 추천한다. 재미있거든!
essay by 이준우
photo by 이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