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D-30 하프 마라톤 훈련 일지>
나의 첫 마라톤 레이스가 있고 한 달이 지났다. 그날까지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그날까지의 기억과 기록의 힘을 빌린 회고록이다.
러닝을 시작한 2020년부터 내가 주로 뛰던 거리는 5K, 길게는 10K 정도였기 때문에, 내가 마라톤에 출전할 생각도, 내가 뛸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도 점쳐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회사 일로 동아일보 자회사와 사업 논의를 하면서 동아 서울 마라톤을 알게 되었다.
작년 12월 8일 사전 접수가 열렸을 때는 풀코스 3천 명만 접수를 받았다. 본접수까지 기다리기는 귀찮았고, 10K는 너무 만만하고, 릴레이 풀코스를 신청하기엔 교류하는 러너들이 없었다(난 lonely runner였다). 그래서 고민 없이 풀코스를 신청하였다.
큰 일을 결정하고 나니 절반은 뛰었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음만은 벌써 마라톤 풀코스 완주자였다. 그 의욕과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부응하려면 적어도 계획에 공을 들여 조금이라도 이행했어야 하는데, 난 연습하지 않는 최악의 러너였다. 근거는 숫자에 있었다.
서울 마라톤 풀코스 완주 커트라인은 5시간이다. 5시간은 300분, 42.195 킬로미터를 300분 안에만 들어오면 된다. 그러기 위해선 1시간에 8.44K를 뛰어야 하고, 이것은 1킬로를 약 7분 6초 안으로만 뛸 수 있으면 달성 가능한 숫자다.
> 42.195(km) / 5(hour) = 8.439km / h
> 8.439km/h = 7 min 7 sec / km
> 결론: 내 평균 페이스를 7분 6초 미만으로 유지할 경우, 최악의 경우에도 4시간 58분대에 턱걸이 완주 가능!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경기를 한 달 앞둔 2월 18일, 오전 11시에 20K 장거리 훈련을 하러 탄천으로 나섰다. 서울 마라톤을 준비하면서 단 한 번 진행한 장거리 훈련이었다. 블랙커피와 함께 토스트로 아침을 챙겨 먹고, 에너지 젤과 아미노 바이탈을 챙겨 차에 올랐다. 오전 기온은 약 5도 정도였고, 아래는 반바지, 위는 여러 겹으로 레이어링을 하였고, 목과 머리도 보온에 신경 썼다.
완주할 자신은 있었으나 20K는 나에게 미지의 거리였기 때문에 이날의 목표는 무리하지 말고 완주하는 것이었다. 스타트부터 7K까지는 6분 30초/KM 페이스로 달렸다. 워터보틀을 들고뛰며 중간중간 수분을 보충했다. 몸에 거슬리는 느낌은 없었고 춥지도 않았다. 7K ~ 15K 구간에서는 몸이 풀려 자연스럽게 조금씩 가속하여 6분대 페이스를 유지하였다. 이때까지도 괜찮은 훈련 강도라 생각했는데, 문제는 17K부터였다.
15킬로 지점이었던 탄천교 부근에서 U턴하여 스타팅라인인 불정교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이매고등학교를 지나면서 배가 진지하게 고프기 시작했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고 다리가 무거워졌다. 팔 치기로 가속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몸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지만 다리는 조금씩 가동범위를 줄여가고 있었다. 고개는 계속 바닥을 향하며 주변 시야가 점점 눈에 들어오지 않고, 수시로 멍을 때리는(zoned out) 나를 발견했다. 나를 계속 깨워야 했다.
19K 지점에서 이미 내 정신은 많이 혼미해졌다. 아, 몸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느낀 비상 상황이었다. 여기서 더 뛰면 위험할 것 같다고 나를 설득시켰고, 걸어서라도 완주하자는 생각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미 오한이 온 상태였고, 정신줄을 꽉 잡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계속 눈이 감겼다. 몸이 추워지니 자꾸 잠이 밀려왔고, 있는 힘껏 의식을 챙길수록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길에서 기절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 때쯤, 내 러닝 앱에 하프 마라톤 거리를 완주했다는 알람이 표시됐다. 기쁨은 무슨, 나 혼자 주차한 차까지 갈 수 있을까? 에 겁이 났다.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옆길에 주저앉은 채 겨우 소연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날 좀 데리러 와달라고.
이날 저녁, 풀코스는 커녕 하프 마라톤도 제대로 못 뙬 수 다는 생각이 조금 자리 잡아버렸다. 무릎까지 상당한 통증에 시달리니, 내가 지금까지 러닝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레이스까지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시간, 뛰어야 하는 거리인 42.195K가 너무도 위협적으로 몸 깊숙이 느껴졌다. 내 신체의 한계를 경험해 보니 오래 뛰는 것으로 무슨 큰 일 나겠어? 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다행히(?) 이게 내 몸뚱이 하나로 겪은 레슨이지, 만약 내가 조직을 운영하며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추진했다면 어땠을까. 야외 러닝의 재미 중 하나가 다양한 외부 변수에 대처하며 내 몸과 마음을 통제하는 것에 있는데, 동시에 외부 변수들을 안일하게 준비했거나, 내 몸과 마음의 통제력을 잃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겠다는 것을 느꼈다. 딱 딱 맞을리 없음을 알면서도 왜 사업 계획서를 만들고, 매출 시뮬레이션을 테스트하고, 가설을 테스트해야할까. 이것이 외부 변수들을 파악하고 대처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신체는 나의 핵심 자산이다. 난 상당한 계산 실수를 저질렀고 내 몸에 큰 물리적 피해를 입혔고, 나 자신의 신용 하락을 초래했다.핵심 자산을 이렇게 형편 없이 경영하면 바로 해고다. 완주는 커녕 몸 하나 가누지 못 한다. 특히 야외 장거리 러닝은 상당히 많은 변수를 인지하고 있어야 했다. 외부 미지의 환경에서 긴 싸움을 해나가는 모습이 마라톤과 인생, 그리고 경영이 닮은 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이키 러닝 코치인 Chris Bennett의 말처럼, 러닝은 뛰면서 아플 수(can hurt)는 있지만 고통을 받으면서 뛰는 것(running in pain)은 아니라는 말에 깊이 공감했다.
이날 몸소 겪었던 공포는 꽤나 오래갔다. 과연 난 마라톤에 나갈 수는 있을까?
essay by 이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