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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Jul 17. 2024

그 시절 죽도와 2024년의 지금

2020년이후 4년만의 새로운 기록

간판


백종원 선생님이 TV에서 그랬다, 회사는 간판을 두 번 바꾼다고. <한신포차, 닭발 잘하는 집>에서 <닭발 잘하는 집, 한신포차>로, 그리고 그 분야의 대명사가 되어 <한신포차>로 마지막 간판을 내건 식이다. 소비자의 눈높이에 맞춰 내 사업의 정수만 남기는 것이다. 만약 양양의 죽도가 가게였다면, 가장 첫 간판은 무엇이었을까? <죽도, 서핑 잘 하는 집>? 여기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면 <서핑 잘 하는 집, 죽도>로 간판을 변경할만 하다. 그 다음엔 <죽도> 만 남겨도 사람들은 왔을 것이다. 그만큼 죽도라는 곳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한 기대감과 설렘이 있다는 것이다.


기대감


2020년에 <그 시절 죽도와 지금​> 을 쓴 이후에도 난 매년 여름마다 죽도를 찾았다. 죽도만 간 것은 아니었고 하조대도 갔고, 속초도 가고, 고성도 들렀다. 그래도 여행의 첫 시작은 항상 죽도였다. 그만큼 나에게 양양으로 여행을 떠나는 길은 과정부터 모두 즐겁다. 여행길의 설레임이 곧 낯섬과 익숙한 기억으로 바뀌는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죽도에서 보냈던 시간들은 나를 다독여주는 시간이었다. 잔잔한 동해 바다는 눈을 뜨고도 명상하게 했고, 여러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여러 각도에서 바라 볼 시간을 주었다.


변한 것들


다만 죽도는 훨씬 더 빨리 변하고 있다. 빠르게 바뀌어가는 동네를 보니, 발전하는 것인지, 후퇴하는 것인지 이젠 혼란스러운 시점을 넘기고 있다. 이젠 죽도가 나를 잊었구나 하는 느낌이다. 나름 너를 매년 찾고 있는 나인데, 넌 이젠 날 아는척도 할 수 없을만큼 변했구나.


죽도해변의 모래사장이 눈에 띄게 줄었다. 필요 없어 보이는 나무 데크가 생겼다.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 설치물들은 아늑했던 죽도 모래사장을 먹어치웠다. 모래사장 끝는 파라솔들이 공사장에 철근이 박히듯 일렬로 서 있다. 여느 해수욕장과 다름 없는 꼴을 하고 있다. 예전엔 흐린 하늘에도 고요한 자태를 보이던 죽도 해변이 이제는 을씨년스럽기 그지 없다.


새로 올라 선 건물들은 이기적이게 뒤에 있는 키 작은 집들의 바다 조망권을 뺏었다. 죽도만의 영험함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컨테이너들을 겹쳐 놓은 가게들은 이곳에 값 싼 느낌을 풀풀 날린다. 길가에 있는 쓰레기 더미들은 더 커지고 더 많아졌고, 해가 넘어가면 인구해변 앞 소주집들이 장사를 시작한다. 우리 집이 가장 신나고 헌팅 성공률이 높다는 것들을 자랑한다. 노골적인 호객은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내 한숨 소리는 귀 아픈 음악 소리에 금방 뭍혀 방향을 잃는다. 뭐, 이미 죽도는 나를 잊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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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지 않은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죽도를 찾는 이유는, 이곳엔 변함 없이 내 낭만의 온도를 데워주는 곳들이 있기 때문이다. 죽도에서 보내는 첫 날 저녁은 꼭 슈러스에 들러 네그로니를 한 잔 마신다. 네그로니를 마시며 늘어선 서핑 보드를 바라보는 것이 나만의 숭고한 리츄얼이다. 내 낭만 나침반을 맞추는 작업이랄까. 내가 본 슈러스 사장님은 누구에게나 막 친절한 사람은 아니지만 동해 바다처럼 변함 없이 그 곳에 계시는 분이다. 슈러스와 같이 죽도의 낭만을 이어가는 곳들 덕분에 나 같은 타지인이 오랜만에 죽도를 찾아도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 이번에도 월요일에 죽도를 떠났다. 이제는 아침에 공사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새로 생긴 호텔들과 숙박형 레지던스들은 완공 후 영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경관은 예전만치 못하니, 적어도 이곳의 주차난이나 숙박난이라도 해소했으면. 그런데 이러한 ‘공급’이 진짜 죽도를 위한 것이었을까? 왜 우리는 결국에 멋을 죽여야할까? 왜 우리는 헤리티지가 없고 멋이 없게 할까?


하나 더, 4년 전의 죽도에서 보았던 것을 보았다. 형광색 조끼를 입고 거리의 쓰레기를 줍고 다니시는 어르신들. 주말간 젊은이들이 놀다 버린 쓰레기들을 줍는 노인들. 그래, 이것은 시니어 일자리일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노인분들이 아침잠이 없으시니 일찍부터 소일거리 하시면서 용돈도 버시는 것이다. 근데, 이 지저분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자식뻘의 젊은이들이 돈을 쓰며(=돈을 벌며) 버린 쓰레기들을 동네 주민 어른들이 줍고 다니신다는게. 가정집에서도 자기가 어지른 것은 자기가 치우도록 교육 받는데, 어째서 이곳은 더 무책임하고 미성숙해지는가. 왜 내가 알던 죽도가 이렇게 되었는가.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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