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반성의 시간
지금까지 나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더 알고자 하는 마음에, 혹은 아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글을 썼다. 이번 글은 아마 내가 어리석었다고 말하고 싶은 첫 글이 될 것 같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 사태는 내가 알던 것들이 틀릴 수 있고, 가졌던 가치 판단 기준을 원점으로 돌려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 나는 내가 신봉하는 가치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상책이라고 믿어왔다. 대중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디어나 메이저 언론사의 말을 무조건 맞다고 수용하지 않고, 나름의 정의로운 경험들을 바탕으로 판단의 원칙을 세워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나는 이번 계엄 사태를 겪으며 무엇이 애국이며 무엇이 보수이고 무엇이 진보일까에 대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더 나아가 신념을 가진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정의로움이란 어떤 무게감을 가진 단어인지, 그리고 그것들을 지켜낸다는 것이 남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나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대한민국에 보수 사상을 가진 당파가 이끄는 정책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는 대통령 당선이 집권당의 한판승이라고 생각했다. 입법기구인 국회의 역할이나 정당 의석 수 등의 것들에는 무지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왜 대통령과 여당이 추진력을 못 얻고 의견 대립만 난무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번 사태를 보며 우리나라는 아직도 붕당 정치와 같은 시대말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 구시대적 당파 싸움이 이어지는 작금의 상황은 한 명이 죽어야 다른 한 명이 사는 치킨 게임에 불과하다. 마치 순수한 사상을 가졌다고 착각하는 서로가 각자가 가진 정의의 도끼로 찍어 죽이려는 모습이다.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치졸한 흙탕물 말싸움이 지속될수록 대의가 무엇인지 정치의 본질을 잊게 된다.
이번 여당의 행보를 보면서 보수주의는 곧 여당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깨졌다. 야당의 그간 행보를 봐도 야당은 진보주의를 바탕으로 한 집단도 아니었다. 만약, 보수와 진보가 그 어휘의 뜻대로 확실히 성립할 수 있다면 모든 사회가 발전하고 영속하기 위해 보수와 진보의 접근법 모두 필요하다. 국가가 주체성을 갖기 위해 흔들리지 않아야 할 가치는 지켜야 하고, 동시에 국가가 독자적인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진취적인 모험을 장려해야 한다.
국가도 생명력이 있다.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쇠퇴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면 더더욱 하나의 이념이 지배해야 할 이유는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수와 진보는 모두 한 국가를 부흥하게 만들 국가적 결정의 이념 프레임워크일 뿐, 결국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옳고 그름이 아닌 차선과 차악이 있을 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와 교류라는 절차를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소폭 진전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은 서로 대비되면서 공존해야 하기에, 지금과 같이 서로를 음해하려는 모습들은 그 어떤 이념과 사상도 대표하지 않는, 애매한 당파들끼리의 자리싸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군 통수권자가 절차와 정의를 무시한 채 계엄을 선포한 이번 원인이 오래전에 상실된 통섭에 있다고 본다. 초정치적, 범사상적인 교류와 열띤 토론이 사라진 지금이야말로 내가 가진 신념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의로움이 대체 무엇인지를 모두가 자문해 볼 때다.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닌 내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정의하는 신념과 정의로움 또한 나의 말과 행동 속에서 발현한다. 국가를 지키는 방법은 수없이 많다. 국가를 지키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나의 합법적인 신분을 보면 된다. 군인이라면 복무신조가 내 신념과 정의의 기초가 될 것이다. 공직자라면 공무원의 의무, 신조, 헌장이 정의로운 행동의 기초가 된다. 자연인들은 자신이 소속한 곳의 규칙이 정의로움의 기본 틀을 제시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속하지 않은 곳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다름이 아니라 규칙상 옳지 않은 것이라면 그 또한 절차 속에서 교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또 중요한 것이 있다, 같은 팀끼리 포용하는 용기이다. 같은 팀이면 골을 많이 넣어 이기는게 중요하지, 내가 혼자 공을 오래 드리블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다.
쿠데타나 독재 정치에 비해 민주주의가 사회 개선에 비교적 느린 이유가 절차를 통한 거버넌스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합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사회적인 비용을 최소화하여 더 나은 곳에 자원이 배분되게 할 수 있다. 다만 사회적인 비용이 발생하는 시점이 지금 당장일 수도 있고 몇 년, 혹은 몇 십 년 뒤에 부담해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결과론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정의롭지 못했던 것이 지금은 정의로운 경우는 거의 없다. 이번 일이 그렇다. 외신은 윤 대통령의 독단적인 계엄 선포로 인한 사회, 경제적 비용을 대한민국 국민들이 할부로 치러야 할 것이라고 진단한 바 있다. 우린 그 비용을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을 포함한 충암고등학교 출신의 몇 지도자들은 잘못된 정의(justice) 의식을 공유했다. 본분을 잊고 절차를 무시했다. 동덕여대의 몇 학생들은 왜곡된 신념을 공유했다. 학생으로서 지녀야 할 도덕성과 책임의식 없이 인과 관계를 무시했다. 서로 다른 두 집단은 공통적으로 절대 정당화될 수 없는 무력을 동반했다. 절대다수가, 상대방이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절차를 독단적으로 없앴다. 이게 우리나라의 지금 모습이다. 연약한 정신에서 나오는 비겁한 하책들이다. 뒤처리 비용은 국민들과 동료 학생들이 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통해 반성한다. 알고리즘의 홍수 속에서 나는 과연 흔들리지 않는 가치를 수호하고 있는가? 동시에 진취적인 미래를 마주하기 위해 모험을 하고 있는가? 필요할 때 진실을 말하고 반대의 목소리를 들을 용기가 있는가? 내 가족을 위해 내 사회와 국가를 위해 나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가?
Not all heros wear capes, and they are in service of the people.
글 이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