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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b n Wrestle Jan 24. 2021

저는 비키지 않을 겁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로사 파크와 마틴 루터 킹

로사 파크, 평범한 흑인 여성


1913년 2월, 앨라배마 주 터스키지에서 선생님인 흑인 어머니와 목수인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Rosa Louise McCauley로 왜소한 체구를 가진 그녀는 6살 때부터 재봉을 배웠다. 당시 여성이 할 수 있는 직업은 이렇게 단순한 노동 수준에 멈춰있었기 때문에 가정에서 자연스레 어머니가 가르쳐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부모님의 별거로 어머니를 따라 앨라배마의 주도 몽고메리로 이사를 간다. 여기서 여자 실업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스쿨버스는 백인 학생들만 태웠고, 흑인 학생들은 걸어서 등교해야 했다. 피부 색깔만 보고 차별이 서슴지 않던 세상에 태어난 어린아이들은 이러한 인종적 차별이 당연해 보이는 세상에 의문만 가득한 채 살아간다.


실업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로사 파크는 흑인 전용 주립대에 입학해 중등 교육을 받는다. 이 시대는 남자도 고등교육 대신 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드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그리 큰 특이한 점은 없었다. 그녀는 아쉽게도 중등교육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아픈 어머니와 할머니를 보살피기 위해 중퇴한다.


젊은 날의 로사 파크


아메리카 남부 연합과 흑인 참정권


1860년에 링컨이 미합중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노예 법 등 여러 부문에서 갈등을 보였던 남쪽 지역 11개 주가 연방에서 탈퇴한다. 그리고 탈퇴한 주들이 결성한 아메리카 남부 연합국이 남북 전쟁을 일으켰다. 군사력에서 열세였던 남부군이 4년간의 전쟁에서 패배하는데, 재건기를 거쳐 20세기 초반에 와서도 흑인들이 투표권을 갖는 방법을 매우 어렵게 만들어 의도적으로 흑인들의 참정권을 제한했다. 당시 백인 민주당이 집권하여 무력으로 흑인들을 제압했고, 사실상 흑인들이 선거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남부 주에서는 백인들의 민주당이 오랫동안 입법권을 갖게 된다. 이렇게 차별주의자들이 다스리는 남부의 주들에 악명 높은 Jim Crow 차별법들이 생겼고, 시내버스와 같은 공공시설, 그리고 상업 시설에서의 흑인 차별 대우가 법에 의해 용인된다. 이때 흑인뿐 아니라 빈곤층에 속한 백인들도 비슷한 차별을 받는데, 공공연한 차별을 자행하도록 만든 차별법들은 1965년이 되어서야 <Voting Rights Act>를 통해 사라진다.


남북 전쟁 때 구성된 남부 연합국의 첫 수도가 로사 파크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앨라배마 주의 몽고메리였으니, 그녀가 겪어야 했던 지독한 인종 차별적 관행들을 조금 상상해볼 수 있다.


NACCP, 그리고 로사 파크의 사회활동가로서의 활동


그녀가 19살이 되던 해 몽고메리에서 이발사로 일하던 남편, Raymond Parks를 만나 결혼한다. 그녀는 결혼 후에도 재봉사, 비서 등 다양한 일을 했는데, 남편이 그녀가 고등학교에 입학해 고등 교육을 받도록 열렬하게 설득했다. 당시 고등 교육을 받은 흑인은 흑인 전체 인구 중에도 불과 7% 정도에 불과했는데, 이런 상황에 교육의 힘을 이해하고 여성이었던 로사 파크의 총명함을 순수하게 지지했던 남편도 대단하다.


남편 Ray는 NAACP의 멤버였는데, NACCP는 1905년 미국에서 구성된 가장 오래된 흑인 인권 단체다. 정식 명칭은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로, 흑인을 포함한 모든 유색 인종의 권리를 향상하기 위한 단체다. 이 단체는 정치, 교육, 사회, 그리고 경제적인 차별 속에서 흑인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피난처와 안식처로 기능했다. NACCP에 소속된 멤버들은 각자의 어려운 생계 속에서도 차별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금전적으로도 지원하기도 했다. 당시 NACCP의 유일한 여성이었던 로사 파크는 1943년부터 57년까지 약 15년간 NACCP의 백오피스 운영을 맡게 되는데, 이런 비서직(?)은 당시 여자들의 일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가 맡게 되었다. 그녀가 보좌했던 NACCP의 단장 Edgar Nixon은 ‘여자는 주방 외 다른 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흑인이었다는 점에서 참 아이러니하다. 이 얘기를 들으면 그들의 인종 평등권 운동이 흑인 남성의 권리 신장 운동의 성격이 은근 더 강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축도 해본다.


몽고메리의 버스 탑승법과 당시 관습


몽고메리 버스

1900년도의 몽고메리에서는 버스 탑승자들을 피부 색깔별로 좌석을 구분해 운영하였다. 기사들은 버스에 올라타는 승객들의 피부색을 보고 여기 앉으라, 저기 앉으라 지정했는데 사실 그때 법은 이랬다, ‘버스가 꽉 차 더 이상 앉을자리가 없을 때 승객은 앉은자리에서 일어나거나 다른 자리로 가는 것을 금지한다’. 하지만 이 법이 시간이 지날수록 당시 인종 차별적인 관습 때문에 변질되었다.


버스 앞 4줄은 오직 백인 승객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였다. 버스 맨 뒷 열에 ‘유색 인종’이라고 써 놓은 좌석을 만들어 놓았고 상황마다 이 팻말이 없으면 그만큼 흑인들이 덜 앉게 되었다. 흑인들은 푯말이 있는 곳에만 앉거나 자리가 없으면 버스가 그냥 가버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심지어 같은 열에 백인 승객이 있으면 흑인 승객은 그 열을 피해서 앉아야 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만약 백인들이 앉을자리가 없으면 흑인 승객들 보고 일어나라고 했으며, 맨 앞 줄에 백인 승객이 앉아 있으면 흑인 승객은 버스 앞 문으로 올라타 버스 값을 낸 후 다시 내려서 뒷 문으로 가 타야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서민의 발, 버스 승객의 약 75%가 흑인이었다는 점에서 생각해봐도 매우 놀라운 차별이다.


로사 파크, “일어나기 싫어요”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퇴근 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 로사 파크는 앞쪽 백인 전용 좌석 바로 뒷 열 유색 인종 전용 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정류장에서 사람들을 실으며 자리를 하나씩 채워갔다. 그렇게 백인 전용 좌석은 모두 차게 되었고 백인 승객들이 계속 탑승했다. 서 있던 백인들을 본 기사는 일어나 유색 인종 팻말을 더 뒤쪽으로 옮기기 위해 로사 파크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흑인 승객들에게 일어나 뒤로 가라고 말했다. 이동하라는 말에 다른 흑인 승객들은 군말 없이 일어나 뒤로 향할 때, 로사 파크는 서 있는 백인들이 앉도록 같은 열 창쪽 자리로 이동한다. 이를 본 기사는 일어나 뒤로 가지 않으면 법대로 경찰을 부르겠다 했고, 로사 파크는 그러라고 말한다. 그렇게 출동한 경찰들은 그녀를 연행했는데, 그때 그녀는 42세였다.


로사 파크의 머그샷


여러 매체에서 로사 파크가 그저 평범한 아낙네가 고된 노동을 끝내고 퇴근하는 길에 기사의 말을 듣지 않고 자리를 포기하지 않은 것이라 묘사한다. 이런 평범한 시민의 영웅적 이미지는 멋지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녀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자 인권 단체에서 10년을 넘게 일하며 준비된 실천가였다. 그녀의 전기 <My Story>에서도 그때 버스에서 백인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말했을 때, 마음속에 생긴 저항의 결단이 한겨울 밤 누빔 이불처럼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고 썼다. 또 그녀는 그때 육체적으로 힘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종 차별에 계속해 복종해야 하는 체제에 지친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많은 흑인 인권 단체들은 이러한 끔찍한 차별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규탄하고 항거해왔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도 이미 퍼포먼스 차원에서, 그리고 차별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기사의 이동 명령에 불복해 체포되는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로사 파크가 자리 양보를 거부하기 9개월 전에 이미 15살의 여학생 Claudette Colvin이 똑같은 행동으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체포될 당시 임신 중이었다는 사실을 들은 몽고메리의 흑인 리더들은 그녀를 저항 운동의 아이콘으로 삼기 애매하다는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로사 파크의 경우 지성인인 데다 남편과 함께 NACCP의 오랜 멤버였다는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어떻게 로사 파크가 미국에서 흑인 평등권 운동의 대모가 되었을까 하는 질문에 이 작은 불응 사건(?)이 불러온 나비효과 때문일 것이다. 그녀와 동시대를 살고 있던 그가 등장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과 MLK


체포 구금 후 보석으로 출소한 로사 파크는 다음 주 월요일인 5일 재판에 서게 되는데, NACCP를 포함한 흑인 운동권 리더들은 이번 재판이 적절한 임계점이라 보았고, 재판에 이의를 표명하기 위해 몽고메리 시내버스 탑승 거부 운동을 계획한다.


여성정치위원회의 후원을 받게 되면서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재판 바로 전날인 4일 일요일에 지역의 흑인 교회에서 보이콧 운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흑인 승객들의 처우가 크게 개선될 때까지, 흑인 기사가 채용될 때까지, 그리고 백인 전용 자리 바로 뒤쪽 중간 좌석은 선착순제가 될 때까지 버스를 이용하지 않기로 결의한다. 탑승 거부 운동의 첫 날인 월요일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약 4만 명의 흑인 시민들은 시내버스를 타지 않고 카풀을 하거나 걸어서 출퇴근을 하며 범시민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첫날이 성공적으로 끝난 것을 본 지도자들은 장기적인 보이콧 전략 수립을 논의한다. 이때 몽고메리 개선 위원회, 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MIA)가 발촉되고, 이 단체의 첫 수장으로 당시 26살의 젊은 마틴 루터 킹을 임명한다.


마틴 루터 킹


로사 파크가 버스에서 체포될 때까지 마틴 루터 킹은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 1953년에 부인 Coretta Scott과 결혼하고 그는 앨라배마 몽고메리로 이사와 침례 교회 목사로 부임한다. 몽고메리에 온 지 약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지만 사회적 변화의 기류를 꿰고 있었고 당시 흑인 사회 운동 단체 지도자들과도 교류하고 있었다.


로사 파크가 저항의 횃불을 치켜들었다면 마틴 루터 킹은 이 횃불로 차별의 산에 대형 산불을 냈다. 마틴 루터 킹의 결단력 있는 목소리와 청중을 사로잡는 웅변력은 전미 흑인 평등권 운동에 커다란 추진력이 되었다. 아래는 그가 MIA의 리더 자리를 수락하며 한 연설이다.


“더 이상 우리에겐 저항 외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수년 동안 우리는 엄청난 인내를 해왔습니다. 때로는 백인들이 우리가 이렇게 대우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우린 오늘 밤 이 자리에 섰습니다. 자유와 정의보다 못한 것들을 참게 만드는 이 고난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냅시다.”


수려한 언변을 무기로 한 그의 신선한 등장은 미국 전역을 역동하게 했다. 그의 리더십으로 이끈 몽고메리 시내버스 탑승 거부 운동은 약 1년 하고 몇 주동안 지속되었는데, 초반에는 시내 운송업체들의 고집도 있었다. 흑인 단체 리더들은 지속적으로 카풀을 조직하고 다른 흑인 택시 기사들이 버스비로 운행할 수 있게 지원하면서 보이콧 운동을 지속시켰다. 결국 급격한 매출 하락으로 지독한 경영난을 겪은 기내 운송업체들이 백기를 들었다. 1956년 11월 13일, 미국 대법원이 몽고메리의 탑승 차별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하면서 이 운동은 공식 종료된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차별법의 수정을 이끌어낸 가장 오래된 대규모 시민운동으로 여겨진다. 또한, 마틴 루터 킹이 보여준 리더십으로 이후 그가 미국 전역에서 발생한 시민 평등권 운동에서 핵심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버스 대신 걸어서 출근하는 시민들


이후 이들의 삶의 행보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지만 마틴 루터 킹은 여러 살해 위협에 노출된다. 그가 살던 집과 지역에 있는 흑인 교회 4곳이 KKK에 의해 폭탄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남부 크리스천 리더십 협회(SCLC)를 설립한다. 이 협회는 미국 남부 지역에 팽배한 인종 차별을 개선하려는 가장 영향력 있는 시민 평등권 운동 단체로 성장한다. 이 단체를 통해 1960년도에 많은 비폭력 평화 시민운동을 조직하는데, 그중 셀마-몽고메리 행진, 그리고 워싱턴 D.C. 링컨 메모리얼에서의 연설의 기반이 된다. #IHaveADream


로사 파크와 뒤 얘기하고 있는 MLK


로사 파크, 그녀는 어쩌면 이미 그녀가 맡은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녀는 12월 1일의 체포 이후 평등권 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사회 운동가들에게 행해진 경제적 보복으로 인해 그녀와 그녀의 남편은 몽고메리에서 직업을 잃게 된다. 몽고메리의 시민운동을 계속해서 대표할 수 있었던 그녀였지만, MLK를 포함한 다른 흑인 리더들과 평등권 운동 방향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계속되는 살해 위협을 받게 되는데, 결국 1957년 이 둘은 몽고메리를 떠난다. 버지니아주에 이어 디트로이트로 이주해 사회적 활동의 대모 역할을 이어가며 평범한 생계를 이어갔다. 1999년 미국 의회는 그녀에게 가장 높은 영예를 가진 골드 메달을 수여한다.


정리하며


Grass-roots democracy,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은 대중적인 민주주의를 뜻하는 용어로 1935년 미국에서 처음 나왔다. 풀뿌리처럼 땅에 깊이 박히기 위해서는 어떤 해에는 땅에 있는 해충을 없애고 자갈도 골라내야 하고 흙을 갈아엎기도 해야 한다. 그다음에 씨앗들을 뿌리고 싹을 틔우기까지 보살펴야 한다. 이러한 노력들이 긴 세월 동안 많은 활동가들이 바통을 이어받으면서 진행되어왔다. 로사 파크와 마틴 루터 킹 모두 장구한 저항의 역사 속에 각자의 맡은 파트를 다 한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한 사람의 파동이 주변 인물들에게 새로운 영감을 주며 변화의 파도를 이어 나갔다.


“Time had just come when I had been pushed as far as I could stand to be pushed, I suppose. I had decided that I would have to know, once and for all, what rights I had as a human being, and a citizen.”

Nah, I ain't movin'



essay by junwoo lee

photo by getty image, buzzfeed, montgomeryadvertiser


출처:

The Henry Ford - "What If I Don’t Move to the Back of the Bus?"

History.com - "Montgomery Bus Boycott"

History.com - "NACCP"

History.com - "Martin Luther King, Jr."

Britannica - "Martin Luther King, Jr."

Vox - "This 50-year-old article shows how the myth of Rosa Parks was made"

History.com - "Rosa Parks ignites bus boycott"

Wikipedia - "Rosa Parks"

Wikipedia - "Jim Crow La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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