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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n Mar 04. 2020

행복한 나, '을'

팥이 아닌 빵으로 살아간다는 것

"남들은 다 받았다던데요.."


큰 용기와 함께 입을 열었다. 물론 최주임의 매서운 눈매를 바라보진 못했다.

"고객님. 그거 드리려면 제 수입에서 까야되는 거예요."

서슬 퍼런 안경테를 움찔대며 뾰로통한 답이 돌아왔다.


"곤란하시면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주시는 건 줄 알고 여쭤봤어요."

"네. 다음에 재고 생기면 챙겨 드릴게요. 싸인은 여기에 하시면 됩니다."


남들은 새 차 구입할 때 딜러에게 이런저런 땡깡을 부려 골프가방도 받고 호텔 숙박권도 받는다는 풍문을 들은 기억이 있어 흉내 한번 내보았다. 물론 본전도 못 찾은 체 어색하게 웃으며 최주임의 날카로운 손톱이 가리키는 계약서 공란에 스륵스륵 사인을 한다. 왠지 모를 미안한 맘에 손도 제 멋대로 움직여 평소 싸인과는 꽤 다르다. 최주임은 한시라도 빨리 자백 진술을 받아내고 싶은 경찰관 마냥 안경테를 만지작대며 내 손을 말없이 보챈다.

"여보. 이거 저거 뭐 많이 챙겨준다지? 골프가방은 기본으로 준다던데."

"나 골프도 안 치는데 무슨 필요가 있어. 그래도 차는 튼튼한 놈으로 잘 골라준다더라."

한국산 자동차가 튼튼한 건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지만, 떠오르는 변명이 딱히 없었다.


"아니 그래서 방향제 같은 거라도 하나 못 받아냈어?"

"그 사람도 나랑 같은 월급쟁이인데 너무 야박하게 할 필요 없잖아. 젊은 친구가 잘 웃고 인상도 좋더라고."

"알았어. 얼른 들어와. 설렁탕 먹어."

"마이 페이보릿."


어제도 설렁탕을 먹었다. 그것 조차 애들이 먹고 남긴 잔여 국물이다. 흥에 겨운 척 전화를 끊었지만 모두에게 또 '을'이 되어버린 내 처지가 즐겁지만은 않다. 40년이 넘었음에도 영 즐겁지가 않다.

직장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사람과의 관계를 명확히 규정해주는 '직급'이라는 것이 있으니 말이다.

"좋은 아침. 난 새벽에 손흥민 경기 봤더니 졸려 죽겠어." "안녕하세요."

손흥민을 공통된 화제로 세련되게 아침 첫 대화를 풀어가려 했으나, 아마도 요새 후배 직원들은 축구에 관심이 없나보다. 그래도 꽤 밝은 미소로 받아주니, 난 이곳 직장이 싫지만은 않다.


"이런 부탁 미안한데, 이거 번역 좀 해줄 수 있을까?"

"하아.. 번역 극혐인데.. 내일까지 드리면 될까요?"

"응! 그럼 부탁할게."


자리로 돌아가는 내 심장이 터질 듯 두근 거린다. 컨디션 난조로 교체되어 나가는 손흥민의 심장처럼.

철저히 '을'의 입장에서 삶을 살아왔고, 여생도 그렇게 보낼 가능성이 매우 높은 나로선 이 상황이 아쉬울 때도 있다. 응당 권리를 주장해도 이상할 것 없는 상황 조차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고, 삼강오륜에서 공자님이 원하신 수준 이상으로 수그리는 이 성격은 여간해선 변하기 힘들 것이다. 나라고 왜 사람들 앞에서 당당한 표정도 지어보고, 적정한 수준의 '갑' 위치에도 서보고, 유리한 위치에서 목소리 한번 크게 내어보고 싶지 않겠는가. 인생을 살아오면서 딱히 떠오르는 성공의 기억과 무용담 없는 삶의 발자취가 나를 더욱 움츠리게 만들었을 뿐.

 

그러한들 나는 중요하다.


나를 포함한 모든 '을'과 어쩌면 더 뒤에 숨어 있을 수도 있는 '병, 정'까지 모두 중요하다.

세상에 '갑'과 같은 생명체만 가득하다면 부서지기 십상이다. 모두가 팥빵 속의 팥과 같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주인공인 팥을 감싸 안고, 신비감을 더해주는 빵의 존재가 없이 팥만 가득하다면 빵의 형태로 제과점에 진열될 수 조차 없다. 그저 볼품없는 축축한 팥 덩어리가 될 뿐일 것이며, 제 아무리 팥에 환장한 사람일지언정, 잡기도 힘든 팥 덩어리를 두 손에 담은 채 고개를 조아리고 먹고 싶진 않을 것이다.


팥빵은 빵이 있을 때 비로소 제과점에 다소곳이 누워 풍채를 뽐낼 수 있듯, 이 세상도 빵과 같이 든든한 '을'의 존재들이 있기에 오늘도 소멸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아닐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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