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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다멜리 May 25. 2021

칼 가는 남자

결혼하길 잘했어 싶은 나의 소소한 순간

                                                                                                                                                                       주방에서 남편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설거지, 주말에 아침 만들어 주기, 내가 식탁에 남긴 음식물 흔적 닦아내기, 행주 삶기, 보리차 끓이기, 젖병 소독하기, 가스렌지의 기름때 청소하기 등등. 내가 건성으로 하거나 미처 살피지 못하는 것들을 메꿔준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감동시키는 것은 남편이 칼을 갈아줄 때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칼은 칼 가는 아저씨가 갈아주는 것인 줄 알았다. 혹은 도마에 붙어있는 작은 칼갈이로 엄마가 칼을 가는 것을 보기도 했다. 그런데 남편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가, 그리고 아버지가 칼을 가는 것을 보며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부엌칼은 남자들이 갈아주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평소에는 남편에게 부탁하는 것을 잘 못하는데 칼을 갈아달라고 할 때에는 나도 모르게 여린 여자가 된다. 내가 쉬이 할 수 없는 일이어서 남편에게 기댈 수 밖에 없다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다. 나로서는 정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위험해 보여서 남자가 해 줘야만 할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부탁을 하며 그 동안 잊고 있던 나 자신의 여성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듬직하게 칼을 갈아주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남자다움이 느껴진다. 확실히 행주를 삶을 때나 가스렌지 묵은 때를 벗길 때보다는 터프하지 않은가? 게다가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평생 남편이 칼을 갈아주겠지' 하는 상상을 하게 되고 새삼 결혼한 여자의 안정감이 밀려온다. 남편은 칼을 갈아주고, 나는 그 칼로 맛있는 요리를 하고, 남편과 아이는 그 음식을 맛있다며 먹어주는 일련의 '정다운 우리집' 메커니즘이 그려지는 것이다.


"저 과도는 어때?  갈아줄까?" 식칼을 다 간 남편이 묻는다. 행복한 상상에 빠져 있던 나는 "응!"하고 기뻐 대답한다.


칼 가는 소리에도 딸아이는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다. 남편이 갈아놓은 과도를 꺼내 과일을 깎았다. 샛노란 참외껍질이 기분 좋게 잘려나가고 하얗고 말간 속살이 매끄럽게 드러난다.


"칼 잘 들어?"


"응!"


외마디 대답에도 지금 느끼고 있는 모든 행복감이 감춰지지 않고 여실히 드러나고 말았다. 두근대는 내 맘을 알 턱 없는 남편은 내가 건넨 참외를 받아들고 무심하게 아삭 배어 문다.


"와, 참외 맛있네"


나는 빈 포크를 물고 있는 남편에게, 남편은 TV 속 야구 중계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아주 보통의, 한가로운 오후였다.                 

                   



Photo ©️ wu yi,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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