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 오브 알프스에서 생긴 일

#18

by Dean

막 해가 떠오르고 있던 산 위의 정박지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아름다웠다. 눈 앞의 산등성이와 들판은 일출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저 멀리로는 엄청난 크기의 하얀 산맥이 지나가고 있었다. 밴라이프를 하면서 몇 번 꺼낸 적 없던 카메라를 꺼내 들고 정신없이 사진을 찍어댔다. 카메라 장비에 아무런 욕심이 없던 내가 이 날은 눈 앞에 펼쳐진 모습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카메라가 원망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우리가 멋모르고 잠을 잤던 곳은 '뷰 오브 알프스 (View of Alps)'라는 곳이었는데 그 이름처럼 눈 앞에 펼쳐졌던 하얀 산맥은 알프스였다. 유명한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보이는 뷰 오브 알프스는 그 풍경에 반해 꽤나 소박한 곳이었다. 이 정도의 풍광을 가진 곳에 의례 있을 법한 최첨단 주차장도 없었고 관광안내소나 레스토랑도 없었다. 오히려 좁은 국도 옆으로 포장이 되지 않은 공간이 주차장을 대신하고 있었고 한 켠에는 간단하게 눈 앞의 산맥을 따라 솟은 산봉우리의 이름을 안내하는 안내판이 전부였다.

_MG_6498.jpg 뷰 오브 알프스의 일출

한참을 사진과 영상을 번갈아가며 찍어댔지만 눈으로 보는 것보다 절대 아름답지 않다는 걸 깨달은 후 난 문을 닫았다. 혜아에게도 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몇 시간 자지도 못한 혜아가 어두운 밴의 문을 열었을 때의 반응이 너무나 궁금했다.

영국에서 밴라이프를 시작할 때부터 혜아는 길가에 놓여 있는 자갈돌만 봐도 행복해했다. 내가 한 거라곤 운전한 거밖에 없는데 마치 수백만 원짜리 명품백을 사준 것 마냥 뿌듯할 정도로 혜아는 격하게 즐거워하고 감탄을 했다. 우리가 만나 밴라이프를 하기 전까지 혜아는 짧은 유럽 배낭여행 외에는 제대로 여행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집과 회사를 왔다 갔다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던 혜아는 길가의 소만 봐도 신나서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고 별 볼일 없는 길 한편의 성벽에 올라가도 흥분해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런 혜아가 이 풍광을 보면 어떨지 정말 궁금했던 난 이미 깨우기 전부터 뿌듯한 것 같았다. 귀찮은 듯이 눈을 뜬 혜아는 역시나 문이 열리자 숨이 넘어갈 듯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까 전보다 해가 더 떠올라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이때다 싶어 우린 아침도 안 먹고 사진을 찍어대며 아침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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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아와 난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산을 타는 것도, 작은 언덕을 오르는 것도 그리 썩 찾아서 하는 편이 아니다. 하지만 사방이 언덕과 산비탈들인 뷰 오브 알프스 정박지 주변은 아침의 아름다운 풍광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우린 산책을 하지 않으면 큰 죄를 지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주차장 뒤편으로 올라갔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어서인지 두 국가의 차들이 뒤섞여 주차장 주변에 세워져 있었고 다양한 사람들이 익숙한 듯 차에서 내려 그곳으로 올라가고 있었기에 우리도 따라 올라간 것이었다. 위에 올라서니 끝이 없는 듯한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특이하게 생긴 소들이 무리 지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들판은 초록색 풀과 노릇한 땅의 색이 새하얀 산봉우리들을 배경으로 마치 그래픽 합성이 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혜아는 그 넓은 들판을 이리 뛰어갔다가 저리 뛰어다니면서 신이 나 있었고 덩치 큰 소 무리들 옆에 조심스레 앉아 손을 흔들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들판의 끝자락은 절벽에 가까웠는데 절벽 저 아래에는 회색 빌딩들이 가득 세워진 도시 제네바가 보였다.

한참을 들판을 따라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다 보니 혜아는 금세 녹초가 되었다. 사진 찍는다고 이곳저곳에서 점프도 하고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체력을 생각하지 않고 다닌 결과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해의 각도에 따라 달라 보여서 밴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아까웠지만 침대에 누워 쉬면서 떨어진 체력을 보충한 뒤 해가 질 때 즈음 혜아는 예쁘게 화장을 하고 난 가지고 있는 카메라들을 모두 챙겨서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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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해는 아까 갔던 들판 절벽 끝자락 제네바 근처로 지고 있었다. 담요까지 챙겨서 정박지 뒤쪽 언덕을 올라 몰려 있는 소들 사이를 뚫고 들판을 가로질러 절벽 근처에 자리 잡고 앉았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노을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처음으로 여유롭게 일몰을 즐겼다. 그리고 더 이상 어두워서 찍을 수 없을 때 즈음에야 우린 내일 또 찍어도 된다며 담요를 털고 일어났다.

해는 거의 다 넘어가 있었고 밴으로 돌아가는 거리는 꽤 멀었지만 여전히 주위는 밝아서 걸어가는 건 그리 힘들지 않았다. 들판의 중간에는 여전히 소들이 몰려 있었는데 웬일인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중간 즈음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낮에 혜아는 소들과 신나게 사진도 찍고 대화도 나눴지만 사실 지나가던 사람을 어떤 소가 들이받는 걸 보고는 살짝 겁을 먹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의 소와는 다르게 덩치나 생김새가 훨씬 더 크고 무서워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앞장서 걸으며 소들 사이를 먼저 지나가면 혜아가 뒤에서 따라오기로 했다. 나도 소들이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특히 한 마리가 유독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기에 약간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 녀석이 눈치를 챌 거 같아서 겨우 눈을 마주치며 소들 사이를 태연한 척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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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지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즈음 바로 뒤에서 생전 처음 듣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의식을 하기 전에 이미 내 고개는 뒤로 돌아가 있었는데 눈 앞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죽기 직전 겁에 질린 사람 같은 표정의 혜아가 오른쪽으로 뛰고 있었고 바로 뒤로 아까 날 뚫어지게 쳐다보던 소가 쫓고 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혜아는 소 머리에 받혀 얼마 가지 못하고 넘어졌고 소도 자기 몸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넘어진 혜아를 넘어가서 다시 혜아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이 정말 순식간에 벌어지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소리를 치며 혜아에게 다시 달려들려는 소를 향해 다가섰다. 소가 주춤하자마자 혜아는 벌떡 일어나 내 뒤로 도망 왔고 우린 꽤나 빠른 걸음으로 소 무리에서 멀어졌다. 그때의 비명소리와 넘어지던 순간의 모습은 아직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큰 충격이었지만 밴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났다. 다른 동물도 아니고 크고 둔한 소에게 쫓기다니.


하지만 밴으로 돌아와 좀 진정을 하고 보니 혜아의 양쪽 허벅지 뒤쪽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다. 넘어진 혜아의 허벅지를 밟고 지나간 듯 했다. 그제서야 혜아는 서럽다며 펑펑 울었고 일몰 사진이 자시고 다 필요 없다며 다음 날 아침 뷰 오브 알프스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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