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쯤 수렁에 빠진 경험이 있다. 혹독한 시련이었고, 일상이 완전히 파괴되었다.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날들이었다. 긍정확언으로도 간절한 기도로도 죽을 만큼의 노력으로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 수렁에 누구나 이유 없이 빠질 수 있다. 그럴 땐 납작 엎드려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는 게 상책이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버둥댈수록 더 깊이 빠질 뿐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몰랐다. 이유가 반드시 있을 거라 믿었고 그걸 찾아내려고 애썼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일이 꼬일 때의 문제가 뭔지 아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리대로 받아들이자...라고 마음을 먹어도 순리가 뭔지 모르겠는다는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어려움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는데 어느 방향이 납작 엎드리는 건지, 어느 방향이 버둥대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오는 때가 있다.
대혼돈 속에서 고민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두 번째 화살을 쏘게 된다. 인간은 의미를 좋아하는 존재, 인간인 나는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해 이런 일을 겪게 된 것인지 곱씹으며 인과 관계를 밝히려 한다. 과거의 한순간을 끌어와 그때의 나를 탓하고 벌한다. 스스로를 꾸짖으며 아프게 다그친다. 벌어진 문제에 덧칠을 해 찬란한 색깔을 입히는 꼴이다. 낙담과 실망 속에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비슷한 갈림길에서 정반대의 선택을 한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겠어! 그런데 더 깊은 수렁으로 가는 길이었다. 어라? 이 길도 아니었어? 그러면 대체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답은 무엇이란 말인가?
끝없는 추락 속에 삶은 우연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과관계라는 게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있는데 한낱 미물인 인간의 사고로는 알아챌 수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인간의 삶이란 인간이 알 수 있는 규칙 안에서 돌아가지 않는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홀가분한 동시에 엄청난 불안이 몰려왔다. 지금 수렁에 빠진 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면 이유가 뭐지? 인풋과 아웃풋 사이에 규칙이 없다면 미래를 어떻게 대비하지? 공부를 하면 성적이 오르고, 밥을 굶으면 살이 빠지고, 노력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누려온 나는 여태 그게 규칙인 줄 알았다. 당연히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노력이 부족하다 여겼고, 가난한 사람들은 돈을 열심히 벌지 않은 탓인 줄 알았다.
지나온 날들을 곱씹어봐도 죽도록 열심히 살아왔고 이렇다 할 실수는 떠오르지 않는데, 그 어느 때보다 더 노력하고 공을 들인 일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을 때 절망보다 앞선 것은 황당함이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신이 준 시련이라기엔 줄줄이 실패가 이어졌고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아는 규칙이 산산조각 났는데 다른 규칙은 찾을 수가 없다면 눈앞에 펼쳐진 문제를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것이다. 이렇게 남은 평생을 살아가야 한다니 막막함을 감당할 수 없었다. 불안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극도의 불안에 결국 규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규칙이 있으리라 믿고 더 많은 경우의 수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규칙이 없는 완전한 자유를 감당할 수 없었기에 더 촘촘한 그물을 치기로 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안을 수없이 많이 세워두니 예상을 벗어나는 일은 줄어들었다.
나는 조금씩 안심하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피곤할 정도의 철저한 대비에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는 것이 새로운 규칙이 되어, 다가오는 불안을 열 배 백배로 확대해 대비해야 했다. A에서 Z까지 준비를 해도 A'가 나타날 것이 두려워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잠을 못 자니 예민해지고, 세상만사가 눈에 거슬린다. 그럴 때 아이를 바라보면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 미래에 극심하게 불안해졌다. 또 다른 수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