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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연 Nov 03. 2019

세속적이고 가벼운 종교에 대해서

종교가 무엇입니까?


이 간단한 질문에 나는 매번 고민을 했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는 불교셨고, 이모들 중에서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도, 천주교 신자도 많았지만 내 부모님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가끔 외할머니를 모시고 절에 가고, 이모를 따라 교회에 갔지만 그 어떤 것도 마음을 울리지는 않았다는 것 같다.

나 또한 종교라는 것을 가져보고 싶어서 여러 번 시도해봤다. 교회에도 가고, 절에도 다니고, 심지어 이슬람교나 유대교에도 흥미를 가졌다. 하지만 결국 어떤 것도 내게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을, 지켜야 할 교리가 있다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선천적인 무교는 다 이런 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유독 좋아한 공간들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절이었다. 산속의 절에 가면 특유의 향이 나고, 그 조용함이 무척이나 좋았다. 불상의 인자한 표정을 보면, 누군가한테 보호받는 기분이 들어서 행복해졌다.

물론 절을 나오면 그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금세 잊었다. 그런 가벼운 애정이었다.



내가 일본에서 살고, 여행을 하면서 만난 것은 셀 수 조차 없을 만큼 많은 신사와 절이었다. 일본에서 종교를 가진 사람은 매우 적지만 많은 사람들이 절이나 신사를 가곤 한다. 그것은 종교라기 보단, 습관에 가깝고, 신앙이라기 보단, 알고 지내는 신에 대한 인사에 가까웠다. 알고 지내는 신에 대한 인사로 동전을 던지고 그 무엇이든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돈을 내면 신이 내 기도를 들어줄 거라는 세속적인 기대. 그 기대가 당연하고 비난받지 않는다.


나는 이 세속적이고 가벼운 종교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던 공간인 절과, 절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신사들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원할 때만 가고, 내가 원하는 만큼만 돈을 내고, 누구도 어떤 교리를 들이대며 강요하지 않는 종교. 사람들의 마음이 담긴 곳에 작은 도리이(신사에 가면 있는 빨간색 기둥) 하나만 두면 신이 산다고 믿는 순진하고 귀엽기도 한 이 종교는 어느새 내 생활이 되어있었다.


이 재밌는 종교 때문에 생긴 취미가 朱印, 한국어로 읽으면 '주인' 모으기였다.

御朱印(고슈인)은 무로마치 시대부터 존재한 것으로 여겨지는, 신사 혹은 절에서 받을 수 있는 도장을 뜻한다.

お守り(한국어로는 부적 등으로 번역하지만, 이 단어의 뜻은 '지켜주는 것'이다.)로서 기능한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그런 걸 깊게 믿고 모으는 사람은 없을 거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지만, 그보다는 스탬프랠리 같은 존재에 가깝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서 내 멋대로 모으는 스탬프랠리.


벌써 2권째가 된 주인장.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맨 오른쪽 사진의 왼쪽 주인, 혼노지의 주인이다.


御朱印帳(고슈인쵸, 한국어로는 주인장)라고 불리는 이 수첩은 주인을 모으기 위한 수첩이다. 신사마다 각자의 디자인을 만들고, 문구회사들도 이 수첩을 제작해서 판매한다. 그래도 굳이 산다면, 가기 힘든 곳에 있는 신사의 예쁜 디자인이 좋지 않겠는가. 내가 갖고 있는 주인장 또한, 에노시마의 바다가 멋지게 그려진 에노시마 신사의 주인장과, 별자리가 그려진 화려한 大将軍八神社의 주인장이다.

이 화려한 주인장을 뽐내며, '신사 많이 다녀봤어요'라는 얼굴로 주인을 써달라고 내밀면, 주인장을 잘 모르는 일본인들과 외국인 관광객들이 신기하게 쳐다보고는 한다.

보통 주인을 써주는 가격은 300엔. 그 자리에서 바로 멋지게 써주는 붓글씨와 신사마다 다른 도장은 내 수첩 안에 추억이 되어서 돌아온다. 신기하게도 나는 내가 주인을 받았을 때의 장면을 모두 기억한다. 그 신사는 사람이 많았지, 이 주인은 여성분이 써주셨지, 그날은 비가 왔지.. 주인을 받지 않았다면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을 그 추억들은 그렇게 차곡차곡 내 수첩과 내 기억 속에 쌓이고 있다.



그것뿐이겠는가, 신사에 갈 때마다 사는 부적은 내 모든 가방에 달려있다. 신사마다 그렇게 예쁜 부적을 만들어내는 건 정말 매번 신기하다. 교통안전, 여행, 일, 등등 의미를 담아서 매번 부적을 사는 나와, 그것을 선물 받던 친구들이 이젠 내게 부적을 선물해준다.


오늘도 네가 안전하게 잘 지내기를.

여행지에서 이 마음을 떠올린다는 것은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


너무 예쁜 부적들. 이 중 둘은 선물로 받은 부적이다.


이 가벼운 취미는 내 삶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새로운 곳을 갈 때 만나는 신에게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하며, 붓글씨로 추억을 사고, 부적으로 마음을 산다. 이건 종교일까? 아니면 그저 취미일까? 사실 그건 처음부터 구분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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