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lena Apr 14. 2021

사람은 변한다! 엄마도 그렇다!

1931년생 조현주 _ 83세에 찾아온 공황장애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81세가 되기까지 아파서 누워 계신 적이 거의 없었다. 37세에 막내딸인 나를 낳았을 때도 1주일 산후조리를 마치고 바로 목장 일을 하셨다고 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엄마가 앰뷸런스에 실려와 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 계셨다. 충격이었다. 엄마를 떠나보낼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었는데 세상 끝자락까지 간 기분이었다.     


10년째 투병 중이신 아버지를 간병한 공로패를 받지 못할지언정 생명까지 내놓을 뻔했다. 처음에는 무심한 신을 탓했다. 차츰 이성을 되찾으며 체구가 크신 아버지 간병생활로 무리한 탓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하루가 다르게 회복해 가시는 엄마를 보면서 처음의 충격도 엷어졌다.     


딱 10일 병원생활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신 엄마는 다시 아버지 간병을 시작하셨다. 아버지를 위해 삼시 세 끼를 준비하시고, 그 이듬해에는 명절 제사는 물론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까지 정성껏 차리셨다. 우리 5남매는 엄마가 건재하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무쇠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100살까지 거뜬히 사실 것이라 예측했다.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또 한 번 입원을 하셨다. 회복의 속도는 처음 입원 때보다 더디었다. 엄마는 점점 여위었다. 그때까지도 제 살기에 급급한 자식들은 엄마의 불안을 몰랐다. 몸만 아프신 줄 알았다. 워낙 강한 정신력을 가지신 분이니 아무 문제가 없는지 알았다. 우리 모두 엄마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다.

 

얼마 후, 엄마가 다시 입원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번에는 공황장애로 발작을 일으키셨다고 했다. 배우자의 상실이 그렇게 충격이었던가? 아버지의 빈자리에 똬리를 틀고 앉은 것은 죽음에 대한 불안이었다. 그 불안이 공포 수준까지 이르러 엄마를 숨조차 쉴 수 없게 만들고 말았다.      


정신병동 입원실에서 허공을 휘젓고 있는 엄마의 표정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청색 글자로 병원 이름이 새겨진 하얀 환자복은 엄마의 얼굴을 더욱 파리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가. 나의 아픔만 들여다보느라 엄마의 감정과 생각은 뒷전이었다. 엄마는 감정이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원망을 쏟아내고, 상처, 용서, 사랑, 자존감 회복을 운운했다는 사실에 괴로웠다. 죄송하고 부끄러웠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돌이켜보니 이미 엄마는 약해져 있었다. 다른 노인과 마찬가지로 지난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손맛 좋기로 소문났던 엄마의 음식은 짠맛 때문에 예전의 솜씨를 발휘하지 못하고 계셨다. 분명 밤새 코를 골며 잘 주무셨는데 한숨도 못 잤다며 푸념도 하셨다. 당신의 생각, 감정을 드러낸 적이 없던 분이 때때로 지난 삶이 바보 같았다며 가족을 위한 노고를 폄훼하기도 하셨다. 분노, 원망, 우울의 부정적 정서가 엄마를 잡아먹고 있다는 적신호가 곳곳에서 켜진 것을 몰랐다니. 자책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외롭게 죽음과 싸우고 계셨다.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지만 엄마 역시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며 온몸에 힘을 주고 버티기를 하셨다. 숱한 불면의 시간을 온갖 망상에게 빼앗기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셨다. 입 밖에 내면 자식들 걱정을 안긴다는 생각에 모든 것을 당신 혼자 감당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몸은 의지와 달랐다, ‘있는 그대로의 나, 딸 최정은을 사랑해달라고’ 수없이 부탁했던 나의 호소처럼 엄마의 무의식이 자식들을 향해 온몸으로 터져 나왔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 엄마가 아닌 나, 조현주를 봐줘!" 


엄마에게도 사랑이 필요했다. 되갚아야 하는 순간이 왔다.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엄마의 삶을 스스로 회한과 후회로 물들이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당신의 삶을 ‘눈이 부시게’ 다시 바라보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서울-부산을 수시로 오고 갔다. 엄마는 길바닥에 돈을 뿌린다고 걱정을 하셨지만 미술치료, 그림책 읽기 등 내가 배운 온갖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또 긴 여정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도록 엄마의 삶을 재구성하도록 도와드려야 했다. 가풍이 엄한 양반집 장녀로 태어나 조신하게 성장해야 했던 유년시설, 무능력한 친정아버지와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신혼생활, 금융 조합장이었던 할아버지의 파산 후 재산 정리, 목장을 일구면서 5남매를 키운 이야기 등 몇 번을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다. 그래도 끝이 없는 이야기들. 한 여인의 생애가 천일야화가 되는 지점이었다.     


다행히 엄마는 회복해갔다. 다시 당신의 자리를 찾았다. 씩씩하게 성당 레지오 활동도 시작하고, 자식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도 하셨다. 명절이 되면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을 챙기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제사까지 거뜬히 해내셨다. 죽는 그날까지 당신 힘으로 걸어서 화장실 가는 것이 목표라며 88세의 나이에, 그 병원에서 최고령자의 영예를 안고 무릎 수술도 받으셨다. 


올해 91세. 많은 것이 변했다. 55kg까지 감량되었던 체중은 예전처럼 65kg까지 늘었다. 주름살은 더 깊어졌지만 무표정이던 얼굴은 살짝 펴지기도 했다. 명분을 중시하던 분이 명절 제사도 없애셨다.  이제는 ‘고맙다’고 표현도 하신다. 나는 물론 오빠를 안아주기도 하신다. 놀라운 변화이다. 모두 엄마 스스로 만들고 계신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신체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시고, 귀는 잘 들리시지 않으며, 깨어있는 시간보다 주무시는 시간이 더 길다. 약봉지는 더 두툼해져서 오늘보다 더 건강한 내일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엄마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어쩌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져 있을 텐데, 아직도 엄마는 오늘이 최고의 날인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 


입버릇처럼 "자는 잠에 갔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함께 사는 오빠에게 웃으면서 잘 자라는 인사를 하지 않으신다. 자식 모두에게 엄마 임종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직 엄마는 죽음을 부정하고 계신 것일까? 엄마의 마감 연습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엄마가 하셔야 할 일이 아직도 남았다. 가슴 깊이 묻어둔 그것, 죽음의 수용이며, 용서와 회복이다. 직면하기 쉽지 않겠지만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엄마 자신. 그런 엄마가 당신 삶의 주도권을 잃지 않기 위해 내일도 눈을 뜨신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의 행복은 다시 올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