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시대에는 아이를 어른의 축소판으로 여겼고 그에 따른 엄격한 훈련을 실시했다. 현대시대의 우리는 아이가 그저 몸만 작은 어른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아이의 뇌는 미숙하며, 특히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전두엽은 미발달된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어린 아이는 타고난 기질대로 산다. 호기심이 많게 태어난 아이는 산만해 보이며, 조심성이 많게 태어난 아이는 소심해 보인다. 그 산만함이 열정과 창의력으로 발휘되는 건, 소심함이 진중함과 준비성으로 발휘되는 건, 한참 나중의 일이다. 우리에겐 현명한 기다림이 필요하다.
인간의 뇌를 단순화하여 표현하자면 1층에는 정서의 뇌가 있고 2층에는 이성의 뇌가 있다. 어린 아이의 뇌에는 1층만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1층의 모양은 아이마다 다르다. 이게 아이의 기질이다. 조절력은 2층에서 담담한다. 1층이 흔들림 없이 안정되어야 2층을 튼튼히 지어 올릴 수 있다. 2층 공사는 출생부터 시작하여 성인기까지 계속된다. 고작 몇년간의 세상살이로, 윽박지르는 훈육으로, 하루아침에 뚝딱 생기는 것이 아니란 걸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건 정서 뇌의 안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안한 아이는 불안을 수요해 주면 덜 불안해한다. 예민한 아이는 예민함을 인정해 주면 덜 까칠하게 군다. 의존적인 아이는 어리광을 받아줄 때 차차 스스로 해 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다. 마음이 편해져서겠지. 엄마라는 안전기지가 맘속에 단단히 자리잡는 거겠지.
나는 고양이와 강아지를 키운다. 우리집 고양이는 집에 손님이 오면 아침부터 밤까지 숨어 있는다. 우리집 멍멍이는 밖에서 다른 개들을 만나면 얼음이 되어 벌벌 떠는 왕쫄보다. 너무 심한 순둥이라 사람 자식이었으면 속 좀 탔겠다 싶다. 난 얘들을 보며 날 것 그대로의 '기질'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매일 느낀다.
반려동물은 마냥 예쁘다. 얘들과 나는 그저 행복하게 사랑하며 공존한다. 그 비결을 생각해 보니 '잘' 키워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서이다. 더 멋지게 '변화'시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진정한 사랑이다. 처음 낯선 집에 왔을 때 불안해하던 놈들이, 이제는 아무데서나 발랑 뒤집어져 코를 골며 자는 모습에 내 마음에까지 편안함이 전염된다.
동물들은 영원한 아기지만 사람은 한해한해 2층 뇌가 자란다. 부모는 아이의 미숙한 모습을 보며 '이대로 사회에 나가서 어떻게 살지?'라고 앞서 걱정하지만 그때의 아이는 지금과 다르다. '지금 고집을 꺾지 않으면 나중에 더 힘들 거 같아'라며 미리 억지 부릴 필요 없다.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역할은 2층 뇌가 방해 없이 건설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1층 뇌가 흔들리지 않도록 사랑의 눈빛만 퍼부어 주면 된다. 아이 마음이 편할 수 있게 해 주면 된다. 적어도 미취학 시기에는 그렇다. 정서가 안정되고 자기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자존감 높은 아이는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된다. 이후에는 부모가 아닌 그 자존감이 아이를 키운다.
예민한 아이를 어떻게 키웠냐는 질문을 받으면,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뭉개뭉개 떠올라 말문이 막히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부담감을 안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본질은 사랑이었다.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수용'이다. 수용의 또 다른 이름은 '기다림'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