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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Sep 04. 2020

[단편] 그녀의 봄 나들이 - 2

결혼, 권태 그리고 다시 두근거림에 대하여...

 ‘흠... 부부 권태기인가?‘  

 남편과 진아는 언제부터인가, 특별히 사이가 나쁠 것도 없고 무슨 말싸움을 크게 한 적도 없이 그냥 무덤덤한 사이가 되어 버렸다.

 서로에게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느껴지지 않는다.

 남편과 마지막 섹스가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어느 날, 와인을 함께 하면서 (한참을 고민 끝에) 슬며시 물어보았더니 왠지 자기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는다고 한다.

 진아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약간은 당황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마음이 상하지도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아들 우석을 출산한 이후, 남편은 섹스에 흥미를 잃었는지 그저 애무도 없이 들어와 성의도 없고 감동도 없이 곧바로 사정을 해 버리고 잠들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이후에는 그야말로 남매처럼 오순도순 손만 잡고 자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남편으로부터 ‘유부남 킬러’에게 짜릿한 성적 흥분을 느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을 들은 진아는 갑자기 자신이 정말 여자로서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는 이상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식탁에 남아 있는 와인을 모두 마셔 버렸다.

 기분이 좀 더러웠다.

 그녀는 인터넷 접속을 하려다 그만두고, 잠을 자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남편이 들어간 안방이 아니다. 아들 우석의 방으로. 



 진아 팀장은 본사 영업부에서 근무하다 2년 전 강남지점으로 옮겨 일하고 있다.

 원래부터 강남 지점은 임원이 되기 전 거치는 코스로 인식될 만큼 회사에서 핵심 사업장이었다.

 그런데, 이 ‘물 좋은’ 지점이 작년에 주의관찰 대상으로 지정될 만큼 실적이 급격히 떨어졌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회사에서 파견된 경영관리팀 진단에 의하면 경쟁사 대비 영업력에서 크게 밀렸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지점장이 일 년 만에 교체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지점장이 부임했다.

 이번에는 여지점장이었다.

 신임 지점장은 작년에 분당 지역에서 실적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가 실적 부진으로 낙인찍힌 강남지점에 구원투수로 긴급 투입된 것이다.

 40대 후반, 미혼, 작은 키, 딱 부러진 얼굴 표정, 눈빛만 보아도 어느 구석 하나 허투루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지점에 오기 전 영업 상황을 미리 파악한 듯 보였다.

 프로답게 과거 실적에 대해 더 이상 책임을 추궁하거나 따져 묻지 않았다.

 오직 자신에게 부여된 앞으로의 달성 계획에만 세밀한 추진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녀의 목표 달성 방식은 유별났다.  

 가장 큰 특징은 디테일이다.

 새로운 지점장이 제시한 목표 설정이나 실적 점검은 여성다운 섬세함을 넘어 디테일에 엄청 강한 면모를 보여 주었다.

 예를 들면, 전임 지점장들은 ‘실적은 인격이다’라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다소 낯익은 구호를 모토로 삼았다.

 반면, 그녀는 ‘자산 확대는 생명, 수익은 인격’이라며 모토조차도 세분화시켰다.

 그리고 실적 점검 회의 도중에 수시로, 자신이 정한 ‘모토’로 직원들을 독려인지 격려인지를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점은 참석한 직원들이 ‘그 모토’를 아무리 들어도 질리기는커녕, 들을 때마다 매번 어떤 자극을 받았다.

 그런 걸 보면, 지점장은 확실히 사람을 끄는 어떤 마력이 있음에 분명했다.  

 지점장은 채권, 펀드, ELS 등 금융상품과 주식 매매 실적을 세세한 항목으로 분류하고, 매일 단위로 체크하고, 부진 실적이 발생하면 즉시 원인을 분석해 나갔다.

 살인적인 목표치와 매주 실적 점검으로 팀 간 경쟁을 유도했다.

 당연히 진아 팀장을 비롯한 지점 직원들의 스트레스 지수가 급격히 올라갔다.

 설상가상,

 그나마 일 좀 하던 황 대리가 육아 휴직에 들어가면서 영업 전력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3년 전 둘째를 출산한 그녀는 육아휴직 1년 과정에 들어가겠다고 진아 팀장에게 점심식사를 하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점 실적도 엉망인데...”

 “무슨 소리야. 당연히 가정이 우선이지.”

 팀장은 황 대리가 그동안 육아문제로 고민이 많았다는 걸 계속 들어온 지라 기꺼이 받아들이고 보내 주었다.

하지만, 그녀 후임으로 본사에서 보내 준 직원은 신입사원이었다.

 실적 부진으로 가뜩이나 쪼이는 이 시기에 전력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좀 심하게 말하면, 밥만 축내는 신입사원은 사실 없는 거나 마찬가지.

 거기다 그 신입 사원 직무교육(OJT)에 대한 부담까지 함께 짊어져야 했다.

 그 부담은 고스란히 영업 2팀 진아 팀장의 몫으로 떨어졌다.  

 강윤식 계장. 황 대리 후임으로 온 신입사원이다. 

그는 본사에서 연수과정과 간단한 금융상품 안내 등 실무교육을 마친 후, 수습 딱지를 갓 떼고 계장 타이틀을 달고 강남지점에 발령받아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윤식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크고 힘찬 목소리로 신입이 지점 선배 직원들에게 인사를 한다.

 지점장은 신입을 데리고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인사를 시켜 주었다.

 나이 서른에 키도 웬만하고, 멀끔하게 생겼는데 첫인상이 좋았다.

 외부 영업할 때 데리고 다니면 어디 가도 꿀리지는 않을 것 같은 외모였다.  

“진아 팀장, 이 친구 잘 키워서 큰 물건으로 한번 만들어 봐.” 지점장은 영업 2팀장에게 신입을 인계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팀장은 윤식 계장에게 처음에는 이용실적이 없는 이탈 고객(비활성 고객) 대상으로 안내전화를 한다거나 본사에서 금융 특판 상품이 내려오면 문자를 배포하고 응대하는 업무 등 주로 난이도가 낮은 일에 그를 투입하였다.

그러면서, 육아 휴직에 들어간 황 대리가 관리하던 고객들을 서서히 넘겨주기 시작했다.

몇 개월이 지나갔다.

 월요일 오전 9시경, 주식 시장이 개장되자마자 지점 창구 앞이 시끄럽다.

 한 고객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가며 육아 휴직 중인 황 대리를 찾는다.

 급히, 후임자인 윤식 계장이 상담실로 모시고 갔지만 수습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수룩한 신입이 응대하러 나온 걸 알게 된 고객이 자기를 ‘호구’로 안다며 지점장이 직접 나오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렇다고 지점장이 나갈 수는 없는 일.

 진아 팀장이 황급히 투입된다.

 고객은 지점에서도 유명한 소위 ’진상고객‘이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주식투자에서 이익이 나면, 본인의 탁월한 투자능력 덕분이다.

 반대로 손실을 볼 경우, 그 화살은 실적에 눈이 어두워, 순진한 고객을 유도해, 손해를 입힌 직원 책임이다.

 오늘도 똑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된다.

 무책임하게 종목을 권유한 당신들이 책임져라. 그런 위험은 투자할 때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끝 무렵에는, 감정적인 말꼬리 잡기가 이어진다.

 아침부터 진이 쭉 빠지는 지루한 싸움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인 그를 막 대하기도 어렵다.

 그는 엄연히 지점 수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주식투자 잔고 기준으로 100억 이상을 굴리는, 소위 ’슈퍼개미‘이다.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 모르는 신입을 대신한 진아 팀장은 밝고 환한 미소,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눈빛,

 남편이나 부모님한테도 해보지 않은 갖은 아양을 섞어 고객 분노를 삭인다.

 마지막으로,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가 번쩍번쩍하는 진상 고객 외제차량 꽁무니에 대고 허리를 굽히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윤식 계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팀장님! 제가 맡고 있는 고객인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 없어. 참 신입! 너, 어디 가서 함부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지 마. 여기 정글이야, 먹고 먹히는 정글이라고! 여기가 아직도 무슨 학교인 줄 알아?”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사무실로 올라가 버린다.

 그가 허둥지둥 뒤를 따른다.   << 계  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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