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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장동 Sep 07. 2020

[단편] 그녀의 봄 나들이 - 5 (끝)

결혼, 권태 그리고 다시 두근거림에 대하여...

 지점장은 연구대상이다.  

 지점 직원들은 그녀를 보면서 저렇게 독하고 워크홀릭이며 독신인 그녀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지, 어떤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푸는지 궁금해 했다.

 그녀가 전에 근무했던 분당지점 직원들에게 슬쩍 물어보면, 모두 말할 듯 말 듯 주저하다가

 “그냥 겪어 보면 알게 돼.”라는 식으로 얼버무렸다.

 결국, 시간이 흐르자, 궁금증은 자연히 해소되었다.

 지점장이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방식은 다소 의외인 저녁 회식이었다.

 그녀는 금융권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다소 쎈 편인, 소맥을 섞은 잔을 들고 회오리바람을 일으킨다던가, 파도타기라는 영화에서나 나오는 방식으로 직원들을 반쯤 무장해제시킨 후, 본격적인 회식을 시작했다.

 요즘과 같이 술은 둘째 치고 저녁 회식조차 꺼리는 젊은 직원들도 어쩐 일인지 그런 지점장의 회식 문화에 호기심을 느끼며 열광했다.

 소맥을 직접 만들어 직원들에게 건네주는 지점장 얼굴에는 진지함이 그대로 묻어났다.

 그 진지함이 자못 과해 어떤 때에는 장인匠人정신이 느껴지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술자리가 이어지면 가끔 예상치 않은 문제가 일어나곤 했다.

 지점장이 분위기에 취해 너무 달리는 날은 어이없게도 ’필름이 끊기는 사고‘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진아가 친구 혜원을 만나고 난 후 어느 날, 실적이 예상보다 점프-업 되는 결과가 나오자 지점장은 아침 회의 자리에서 본인이 직접 쏘겠다며 즉석 회식을 제안했다.

 그리고 지점장은 초반부터, 마치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소맥을 말면서 분위기를 띄었다.

 거기에 직원들이 가세하여 술자리가 달아올랐다.

 진아 팀장은 연말 회식 때처럼 지점장이 또 필름이 끊겨 젊은 남자 직원들에게 업혀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두세 시간이 흐르고 2차 노래방까지 화끈하게 놀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지점장은 어느덧 소파를 벗 삼아 잠들어 있었다.

 노래는 중단되었고 열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처음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모두 어쩔 줄 몰라 허둥댔지만, 이제는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후, 약속이나 한 듯 능숙하게 자리를 마무리한다.

 영업 3팀 현민 팀장이,

 “야! 윤식 계장 뭐해? 빨리 지점장님 업고서 집에 모셔드려..”

 “네. 알겠습니다.”

 지점에서 막내인 그가 저번처럼 지점장을 모시고 가기 위해 가슴이 풍만한 그녀를 등으로 업으려 할 때였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진아 팀장이 갑자기 흥분하면서 소리쳤다.

 “윤식! 안 돼. 너, 더 이상 하지 마. 김 대리, 이번에는 네가 모셔드려.”  

 순간,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얼결에 갑툭이 되어버린 진아 팀장,

  뻘쭘해진 윤식 계장,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결국, 대신 김 대리가 서둘러 지점장을 등에 업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고 떠났다.

 직원들도 각자 집을 향해 흩어질 무렵, 진아는 저만치 앞서 혼자 터벅터벅 걸어갔다.

 노래방에서 자기가 왜 윤식에게 그렇게 소리를 질렀는지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냥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점장은 다음 주 수요일, 법인기업체를 대상으로 지점에서 실시할 예정인 투자설명회 진도를 체크하고 있다.

 올해 실적 증가에 재미를 본 지점장의 중점 사업 중 하나다.

 다른 직원들은 그럭저럭 마감까지 진도를 뺄 수 있었다.

 하지만, 윤식 계장은 여전히 고전 중이다.

 그가 맡은 금융상품 소개 자료의 실적 집계가 본사 리서치 팀으로부터 늦게 도착되기 때문이다.

 사업 설명회는 수요일 오후 4시.

 자료는 빨라야 월요일 오전에 도착할 예정이다.

 자료 작성은 늦어도 화요일까지는 완료되어야 한다.

 2년 차 직원이 그 짧은 시간에 금융상품 분석과 최근 실적을 믹스해서 자료를 완성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지점장은 선배 직원 중 누가 월, 화요일 이틀간 윤식 계장과 야근하면서 함께 자료 작성에 참여할지 물었다.

 ‘내 일도 아닌 남의 일에 야근까지! 그것도 연이어 이틀씩이나!’

 모두 지점장 눈빛을 피했다.

 상황은 진아 팀장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아들 우석이 눈에 밟혔다.

 시어머니의 탐탁지 않아하는 눈빛, 시니컬한 남편 표정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결국,  

 “제가 함께 하겠습니다. 어차피 같은 팀인데 제가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지원자가 아무도 없자, 그녀는 떠밀리 듯 손을 들고 말았다.  

 다음날, 그녀는 실적 보고를 위해 지점장실에 들어가려다, 누군가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밖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남직원 두 명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윤식 계장이었다.

 그가 지점장에게 설명하고 있는 뒷모습이 보였다.

 단정하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 뚜렷한 목선, 떡 벌어진 양쪽 어깨.

 그 어깨로 인해 지금이라도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재킷, 단단하고 굵직한 허벅지, 그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지금 그녀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문득, 오늘 아침 화장실 세면대 위에 한 움큼 빠져있던 남편 머리카락이 뜬금없이 떠올랐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마치 불쾌하게 끈적이는 무언가를 떨어내고 싶다는 듯이.  

 한편, 투자설명회 자료 작성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결국 선배인 진아 팀장이 주로 작성하고 윤식 계장은 회사 리서치 자료실이나 인터넷 조회로 부수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연이틀 밤늦게까지 작업을 이어갔다.

 서류 작성 중간에 둘은 휴식시간을 가지며 짬짬이 가벼운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역시 젊음이 좋긴 좋구나!, 무언가 함께 동참하고 싶고 빨려 들어가고 싶은 느낌!' 

 뭐, 그런 감정들이 살짝 열린 그녀 틈바구니 어딘가로 자꾸 스며든다.

 마침내 화요일 늦은 밤에야 자료 작성이 완료되었다.

 둘은 지점 문을 잠그며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잡기 전 윤식은 갑자기,

 “팀장님. 도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저, 혹시 제가 감사 표시로 이번 주 금요일 저녁에 뮤지컬 공연 어떠세요? 팀장님도 아주 맘에 들어 하실 뮤지컬인데...”

 잠시 침묵.

 잠시라고는 하나 영겁永劫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그녀 퇴근을 기다리는 아들 우식. 시어머니 잔소리, 남편의 축 처진 뱃살과 탈모, 고작 유부남 킬러에게 훅 갔다는 남자,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남편에 대한 실망감 그리고 사라진 여자로서의 자존감

               V  S

 펄떡거리는 윤식의 근육과 떡 벌어진 어깨, 매끄럽고 탄력 넘치는 피부, 굵고 선명한 목선, 든든한 허벅지, 달라붙는 여자 동기생들과 지점 여직원들, 그리고 다시 ’여자‘로 돌아가고픈 욕망

                           .
                           .
                           .
                           . 

 “안 돼, 나 가정 있는 유부녀인 거 볼라? 무슨 불타는 금요일도 아니고.”

 그녀는 짐짓 화를 낸다.

 “이번 주 금요일에 첫 공연을 시작하거든요. 주연이 조승우, 차지연인데, 첫 회라 메인 캐스팅이 모두 출연한데요.“

 그는 몹시 아쉬운 듯 다시 권한다.

 그녀가 고민한다. 잠시 후,  

 “흠... 뮤지컬이라... 그것도 첫 회 뮤지컬에 조승우, 차지연이 주연이라! 내가 생각 좀 해보고...”

 하면서 새초롬히 툭 던진다.

 그를 뒤로 한 채 혼자 택시를 탄다.

 밤늦은 시간, 택시는 한강 다리를 건너 강변북도로 접어들더니 마치 무엇에 뛰어들 듯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하늘에는 깨진 유리조각 파편 같은 별빛들이 흩뿌려져 있다.

 진아는 무심히 창밖으로 명별明滅하는 그 별빛들을 바라본다.

 그때, 갑자기 알 수 없는 무슨 맥박 뛰는 소리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잊힌 소리가, 그녀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은밀하게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무슨 소리지?’

 그녀는 당황했다.  

 심장이 쿵하는 소리였다. 




진아는 누적된 피로를 풀고자 금요일 하루 휴가를 냈다.

 지점장은 법인업체 설명회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면서 손수 커피를 한 잔 타 주었다.

 그리고 고생했다며 주말까지 푹 쉬고 오라는 덕담을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에게,  

 “참. 요새 남편하고 사이가 좋은가 봐.” 하면서 웃는다.

 “.... 무슨... 말씀이신지...”

 “에이, 몰라서 물어? 진아 팀장이 얼마 전부터 부쩍 화장에 신경을 쓰잖아. 안 하던 마스카라도 자주 하고. 오늘은 은은하게 향수까지... 부러워“ 하며 윙크를 보냈다.

 그녀는 당황하여 얼굴을 붉히며 자리로 돌아왔다. 

 
 퇴근시간이다.

 핸드백을 들고나가려 일어선다.

 문득, 저편에서 아직도 모니터를 바라보며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는 ‘그 남자’가 그녀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잊은 게 생각난다.

 건물 밖으로 나온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검색한다. 이윽고,

 “아, 안녕하세요. 원장님, 저 진아예요. 너무 오랜만이죠. 네.. 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이번 금요일 저녁에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요... 네... 내일 목요일 저녁에 피부 확실하게 땅겨 주는 걸로...이왕이면, 열 살 정도는 어려 보이게 만들어 주세요.... 그럼요... 풀 케어 패키지로 예약 좀 부탁드려요.” 




 하루 종일 햇볕이 쨍쨍하고 따사로운 봄 날씨였는데 그녀가 전화 통화를 하는 사이 흐릿한 하늘로 변했다.

 그러더니 약한 여우비가 살포시 내려앉기 시작했다.

 진아는 하늘을 힐끗 쳐다보더니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 여우비를 한 번쯤은 괜찮겠다, 싶어 지하철역까지 졸금졸금 내리는 비를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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