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 대한 이해 #3
어릴 때 가장 중요한 건, 재밌게 노는 거다.
놀이, 게임.
그때에는 어떻게 놀 지에 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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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6살 겨울(2004)에서 초등학교 3학년(만 9살) 겨울(2007)까지, 나는 경상북도 성주에서 살았다. 산이 있고 개울이 있고 그 앞에 돌밭이 있고. 학교 운동장이 있고 교회 마당이 있고. 다른 건 없었다. 초등학교에 전교생이 20명이 안되고, 입학할 때 입학생이 나 혼자뿐일 정도로 시골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누나(2살 위), 여동생(1살 아래), 남동생(3살 아래)과 그 친구들이랑 같이 놀았다.
음.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 처음에는 누나가 주도해서 놀이를 했었다. 근데 무슨 놀이를 하다가 답답해서 그 이후로는 내가 주도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뭔가 누나는 혼자 놀았다?(누나 미안해!) 여튼... 그렇게 나는 나보다 어린애들과 놀게 되었다.
그즈음에 부모님의 친구분이 자녀들과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체스를 처음 봤다. 기물들을 움직이는 걸 배우고 나중에 동생들이랑 했는데, 당연히 내가 이겼다. 어릴 때라서 발달 차이도 크고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라 질 수가 없었다. 문제는 얘네들이 한번 지고 나더니 다시 나랑 하지 않으려 한다는 거였다...
같이 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고민해야 했다. 참여하고 싶은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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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를 주도하는 자, 그러니까 놀이 참여자(플레이어)가 아니라 놀이 주최자(호스트)로서 게임을 바라보게 되었다. 게임에서 플레이어의 목적은 이기는 것, 승리다. 하지만 호스트의 목적은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좋은 게임이란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게임을 말한다.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만족시켜서, 다음 게임에도 참여할 마음이 생기는 게임을 만드는 것. 이게 호스트의 목적이고, 곧 나의 목적이 됐다.
좋은 게임을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가 지켜져야 한다. 피 나는 사람(몸이 상한 사람)과 눈물 나는 사람(마음이 상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 누군가 다치면 그대로 게임이 종료된다. 어른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애를 달래야 한다. 삐지는 것도 마찬가지. 그를 달래지 않으면 그는 다음 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게임은 단조로워지고 재미없어진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한 명씩 플레이어가 이탈하면 혼자 남게 되고 더 이상 게임을 할 수 없게 된다.
플레이어는 많으면 많을수록 게임이 다채롭고 재미있어진다. 예외 없이 모두를 데려가야 한다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누가 어떤 짓을 해도 놀이에 끼지 못하지는 않는다.' 이걸 지켜야 플레이어들이 놀이에 끼지 못할까 걱정하고 움츠러드는 ‘놀이 불안’을 겪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낸다. 그때부터가 재미있는 게임의 시작이다.
기본적인 두 가지가 충족됐다면 이제 게임의 룰을 정해야 한다. 재미있는 게임이 되려면 양측 모두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 균형이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황금 벨런스. 게임이 팽팽할수록 이기기 위해 플레이어들이 힘껏 뛰어다닌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처음에는 애들을 속여서 룰을 내게 유리하게 하기도 했을 거다. 호스트보단 플레이어에 가까웠을 테니까. 하지만 호스트에 가까워질수록 룰을 나에게, 나의 팀에게 불리하게 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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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나에게 누군가를 이기는 것은 너무 쉬웠다. 어린애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몸으로 하는 게 아니라 머리로 하는 거면 이겨먹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같은 조건에서는 내가 이기고 싶다면 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되면 그냥 이기는 건 재미가 없어진다. 내가 이기는 건 당연한 거니까. 재미를 추구하다 보니 점점 불리한 게임을 원하게 됐다. 그렇게 불리한 게임 속에서 정말 최고의 판단만을 해서 이겼을 때는 짜릿하다. 존재가 더 강해진 느낌.
하지만 그보다 더 짜릿한 부분은, 분명 내 팀에게 불리한 룰을 적용했는데도 모두 나와 팀을 이루고 싶어 했다는 거다. 생각해봐라 어릴 때 같이 체스를 하고 싶어도 못하던 때에서 모두가 팀을 하고 싶은 플레이어가 되었다는 것. 좋은 게임을 만들었다는 증거, 좋은 호스트가 되었다는 증거를 보면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분명 플레이어인데도 승패를 넘어선 무언가를 보고 나와 팀을 하겠다니, 드디어 너희도 내가 보는 세계에 다다랐구나, 날 이해하고 있구나!
물론 내 착각일 수도 있다. 내가 강한 플레이어였으니까 나와 팀을 하고 싶었을 수 있고, 어쩌면 그냥 내가 좋아서(?) 나와 팀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고.
그래도 좋았다고. 인정받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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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는 서로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공격은 예로부터 남의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수단이었고, 지금도 존재를 얻기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다(문장들 2에서 설명). 그러니까 게임에서 이기면 상대보다 내가 더 나은 존재라고 느끼는 거다. 절망하는 상대의 표정을 보면서.
하지만 게임은 가상, 가짜다. 합의(룰) 하에 가짜로 치고받는 것. 존재를 주고받으면서 적당히 즐기는 것. 그래서 호스트로서 나는, 승부욕이 없었다. 좋은 게임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과한 승부욕이 게임을 망친다는 것을 알던 나는, 사람들이 다 어떤 연기를 하는 줄 알았다.
어떤 가짜. 이기면 좋아하고 지면 분해하는 것들이 재미를 위한 적당한 연기라고 생각했다. 역할을 부여받고 그 역할에 대한 어떤 시늉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연기를 했다.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분해하고. 실제로 그런 감정이 들었다기 보다도 거기까지 하는 게 좋은 게임의 엔딩,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종종, 연기라고 하기에는 과하게 분해하는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을 볼 때마다 나는 ‘왜 이렇게 과하게 연기를 하지? 연기가 아닐지도? 내가 무언가 잘못 이해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했다. 최근에서야 이들이 진짜로 분해했다는 걸 알았다.
내 입장에서 승부욕이라는 건, 공격하고는 싶은데 공격받기는 싫어하는, 이기고는 싶은데 지는 건 싫어하는 그런 걸 바라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릴 때는 다소 이해가 안 갔었지만 이젠 좀 알 것 같다.
그들은 아직 자신의 세계가 없어서 호스트가 만든 세계가 가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 세계 안에서 지면 실제로 죽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죽기 싫어했기 때문에 그렇게 과하게 반응했다는 말이다. 지면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고 자신의 가치가 떨어지면 자신과 팀을 하려는 사람이 없을 것이므로 그것이 곧 죽음이므로 그렇게 반응한 게 아닐까. 나는 플레이어들에게, 놀이에 끼지 못할까 걱정하는 ‘놀이 불안’을 최대한 지워주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반면 나는 언제나 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불안을 느낀 적이 없다. 내가 놀자고 하면 나와 함께 놀아 줬다. 물론 많이 고민하고 정성 들여서 만든 게임을 가지고 놀자고 한 거긴 하지만 분명 많이 어설펐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나를 따라와 줬다. 그들이 어울려주지 않았다면 나 또한 불안에 시달렸을 거다. 지금 내가 가진 강한 자신감 및 자존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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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것은 지는 것이 아니라 재밌게 놀지 못하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재밌게 노는 것.
여전히 나는 이기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놀고 싶은 사람이다.
재밌게 놀 수 있다면 이기고 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