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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롱 Jan 05. 2025

이토록 연약하고 아름다운 일상


끄적이다가 쓰지 못한 글이 있었다. 추웠던 어느 저녁 엄마가 급작스레 우리집에 들이닥쳤던 이야기.



  

  10년 전 부모님이 경주로 이사한 이후로 부모님이 용인에 있는 우리집에 온 적이 없었다. 대충 헤아려보자면 아마 엄마의 이번 방문은 12년만이 아닌가 싶은데. 운전을 해서 혼자 서울에 왔던 엄마는 이모네 집도, 보고싶다고 당장 오라는 친구네 집도 아니라, 우리집에 오고 싶다며 전화를 했다. 엄마가 온다는 소식에 다급하게 청소기부터 꺼낸 주나 씨와 나는 거의 멘붕 상태로 엄마를 맞았다.

  무서웠다. 구석구석 생활의 때를 벗겨내지 못한 채 살아가는 내 너저분한 꼴을 드디어 엄마에게 다 보이고 말게 됐다는 게. 캄캄한 밤 눈길 운전을 해서 도착한 엄마와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데 엄마가 그러는 거다. 내가 엄마를 보면 화부터 낼 줄 알았다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면 어떡하냐고 할까봐 무서웠다고. 우리는 그 동안 서로의 어떤 모습을 간직해두고는 그걸 내내 마음쓰며 살아온 걸까.


  엄마는 나중에 아빠가 죽으면 나랑 살아야 할 텐데 내가 구박할까 봐 두렵다고 했다. 당연하지, 엄청 구박할 건데, 하니까 그러면 엄마 사는 동네 근처에 요양병원이 있다면서 거기에 가야겠다고 했다. 나도 이제 정말 늙었나 봐. 예전엔 안 그랬는데, 이제 너희들을 자주 보며 살고 싶어. 볼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가까이 두고 자주 보고 살면 좋겠어. 그렇게 말하며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빨개지는 엄마 얼굴이 낯설고 예뻤다. 엄마가 이렇게 예뻐 보인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낯설었다.

  자정까지 엄마랑 기분좋게 맥주를 마시고, 맥주 마시는 틈틈이 아빠한테 잘하라는 말을 한 백 번은 한 것 같다. 그 동안 엄마 뜻에 아빠가 맞추며 살아왔으니 이제는 엄마도 아빠 마음 읽어주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마음 속으로는 아빠가 오래 살아야 내가 엄마랑 같이 살지 않을 수 있지, 생각하면서. 엄마는 내가 하는 말에 그래, 맞아, 그래그래, 하고 대답했다.

  잠이 들었다가 새벽4시에 깨서 나가보니 엄마는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맥주를 마셨더니 잠이 안 온다고. 그래서 거실에 이불 깔고 엄마랑 둘이 뒹굴대면서 세 시간쯤 이야기를 하다가 두 시간을 더 자고 일어났다. 자욱하게 안개 낀 아침. 엄마는 혼자 있는 아빠가 걱정된다면서 내가 끓여 준 죽을 한 그릇 먹고, 숙취 해소 컨디션을 벌컥벌컥 마시고는 막 내린 커피까지 한잔 마시고 돌아갔다.

  사실 더 많은 말을 쓰고 싶었다. 엄마를 바라보면 갈래 갈래 갈라지던 마음에 대해서. 엄마가 두려우면서도 좋았던, 아니 엄마가 정말 좋아질까 봐 두려웠던 이상한 마음에 대해서.


  그러고는 꼭 이틀 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계엄령이라니,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난다고?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그 다음엔 너무 무서웠다. 평소 잘 들어가던 커뮤니티에 접속이 되지 않았다. 숨쉬듯 당연한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감각. 뉴스를 보면  내가 고민했던 모든 것들이 얼마나 배부르고 행복한 고민이었는지, 아니 그건 고민도 아니고 그냥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평온한 모습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 평화와 사랑과 끈질긴 미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자잘하고 보잘 것 없는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그래서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 유난히 길었던 그 밤, 온몸에 돋는 소름을 감각하며 느꼈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평범한 하루를 지키기 위해 애썼는지. 그걸 지키지 못한다면 내가 엄마와 보냈던 그날 밤 이야기를 쓰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라고 생각하기엔 나는 너무나도 나약한 사람이라서.



이제서야 더 아름다워 보이는 장면들.



"오 주피터여! 왜 저는 쉽게 변하고 시듭니까?"

아름다움이 묻자

신이 대답했다.

"쉽게 변하고 시드는 것만을 아름답게 만들었느니라."


- 괴테, <사계 여름> 중에서





내 아름다움의 목록은 다시 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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