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영화 캐스트 어웨이(Cast Away)를 보다 나는 주인공의 친구, 배구공 '윌슨'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윌슨은 사고로 무인도에 갇힌 주인공 '척'의 유일한 대화 상대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누군가에게 배달되어야 할 배구공일 뿐이지만, 척은 자신이 혈흔으로 그려진 배구공 인형 덕에 1500일이나 되는 시간을 혼자 버텨낸다.
함께 보던 둘째 아이가 내내 척의 탈출을 응원하는 동안, 나는 윌슨에게 말을 거는 척을 보며 나에게 윌슨과 같은 존재는 누구일까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지만 나는 나의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필요했다.
부모님께는 차마 할 수 없는 이야기, 친구에게도 꺼내놓기 힘든 이야기, 일기장에 조차 남기기 싫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를 나는 기다렸다.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주길 바랐고, 듣고 나서도 아무렇지 않기를 바랐다.
그럴 때마다 나는 꼭 라디오를 틀었다.
한 손에 잡히는 작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고 진행자가 들려주는 사연에 울고 웃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처음에는 엄두도 못 내다 몇 번은 용기를 내 정성껏 꾸민 엽서를 방송국에 보내기도 했다. 한 번도 방송에 소개된 적은 없지만 우체통에 엽서를 넣는 순간, 그 시절 나의 고민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있고 싶지만 혼자이기 싫을 때,
글을 읽고 쓸 힘조차 없을 때,
초콜릿 케이크를 아무리 먹어도 달지 않을 때,
복잡한 출근길을 외면하고 싶을 때도
늦은 밤 퇴근길의 허전함을 달래고 싶을 때도
내 오랜 친구 라디오는 늘 나와 함께 했다.
지지난 여름 이탈리아에 갔을 때는 토스카나의 와인 밭에 쏟아지는 오후의 햇살을 보며 한국 시간으로 새벽 방송 라디오를 들었다. 함께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는, 행복한 순간에도 고독하다고 말하고 싶은 청개구리 같은 내 마음을 달래준 것 역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진행자의 멘트와 선곡이었다.
요즘은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들을 때도 많다. 가끔은 방관자처럼 듣기도 하고 가끔은 내 세상인 양 비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기도 한다. 어쩌다 혼잣말처럼 꺼낸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될 때면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개운함이 느껴질 때도 있다. 움츠러들었던 가슴이 펴지기도 하고 고독함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늘 고맙다.
그 덕에 내가 고독하고 대답 없는 이 삶을 버텨낼 수 있는 걸 테니까.
그래서 삶이라는 파도에 무엇이 실려오든 괜찮다.
나에겐 라디오 윌슨이 늘 곁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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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ertobobb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