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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Apr 30. 2022

『이방인』에 대한 단상

그것은 이제 나에게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보는 놀음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는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덜 외롭게 느껴지도록,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이방인』에서 뫼르소가 우리에게 그토록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평준화시키기 때문이다. 이건 어떠한 해석이 아니라 실제로 『이방인』이라는 소설 내 곳곳에서 습한 바람이라느니 많은 상징으로서 나타나고 있다. 죽음은 실제로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이건희가 생전 그토록 많은 돈과 권력을 갖고 있었어도,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호령했었어도, 결국 그들은 모두 죽었고 그들이 했던 모든 행동들은 그들의 죽음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뫼르소는 이와 같은 생각을 일찍이 갖고 있었으며 바로 그랬기 때문에, 자신의 애인이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도,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만약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여기서 끝났다고 한다면, 『이방인』이라는 소설은 그저, 인간성이 소실된, 마치 뫼르소의 무신경한 그것과 매한가지로, 다른 인간에 대한 가학적인 폭력으로 점철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범지구적 '뫼르소적 기절'에 대한 하나의 비유, 풍자소설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방인』이라는 소설은 오늘날 칭송받는 정도까지 그 위치에 올라서지 못했을 것이다. 『이방인』은 아마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느낌의 소설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카뮈의 뫼르소는 저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간다.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모두 평준화시켜버리는 그 죽음에서 뫼르소는 더욱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 모든 인간은 결국 '사형수'라는 사실은 뫼르소로 하여금,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삶은 유한한 것이기에 그곳에는 어떠한 가치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라는 하나의 역설을 깨닫게 된다.

삶의 유한함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들의 무가치성을 명령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인간은 그러한 무가치성 속에서 끊임없는 고뇌에 빠지기도 하고, 무가치성 속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으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치기도 한다. 또한 뫼르소는, 나 자신이 유한한 것이기에,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유한한 것이므로,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하나같이 모두 소중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뫼르소는 이전에는 이 세계의 무관심 그 자체에 대한 상념으로, 어쩌면 좌절, 혹은 그 자신도 무관심으로 이 세계를 응대해왔지만, 깨달음의 순간 이후에 뫼르소는 이 세계의 무관심함에 대해 그 안에도 어떠한 '정다움'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이 세계가 모두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는 똑같은 정도로 무가치한 것이기에 거기서 어떠한 동질감, '형제애'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뫼르소는 자신이 깨달은 이러한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다는 성질,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죽음이 시작되며, 죽음에 대한 깨달음에서 다시 삶이 시작되는, 이러한 필경 하나의 진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상념들을 다른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저 사실에 의하면 죽음이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나쁜 것이 아니기에, 어머니가 죽었을 때 양로원에서의 노인들의 황혼에 접어든 '울음소리', '한숨' 소리가 아닌,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와서 사형을 당하는 자신을 '증오의 함성'으로 맞아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그저 뫼르소라는 '소시오패스'를 다룬 소설로 알고 있지만, 위와 같은 뫼르소의 입을 빌린 카뮈의 생각은, 뫼르소가 진정 삶의 양 극단을, 삶 그 자체를 온전히 받아들인,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한 명의 인물이며, 『이방인』이라는 소설은 현재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실로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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