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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꽝쾅쿵 Oct 27. 2019

칸트의『형이상학 서설』 해제

※책 제목: 『형이상학 서설』(원제: 『Prolegomena zu jeden kűnftigen Metaphysik die als Wissenschaft wird aufreten kőnnen』)

※작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옮긴이: 백종현

※출판사: 아카넷

※이 글은 전공자가 쓴 것이 아니므로 수많은 오류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1. 서론                          

 혹자는 플라톤 이후의 서양 철학은 모두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에 칸트는 해당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양 철학은 칸트 이전과 칸트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칸트는 철학 중에서도 미학, 윤리학, 인식론에 크나큰 업적을 남겼는데 특히 인식론에 있어서는 경험론과 합리론의 오랜 논쟁을 종결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윤리학에서도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와 “사람을 오직 수단으로서만 대하지 말고 언제나 동시에 하나의 목적으로 대하라.”와 같은 정언명령을 남겼다. 이외에도 칸트의 업적은 수없이 많고, 또한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헤겔을 싫어하여 자신의 개 이름을 헤겔로 지었던 그 자존심 높고 냉정한 쇼펜하우어마저도 칸트를 인생의 스승으로서 여겼으며, 그의 불후의 저작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서문에는 칸트의 사상을 알지 못하면 책을 읽지 말라고 쓰여 있다. 그렇다면 칸트는 서양 철학사에 있어서 왜 그토록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향유하는 모든 학문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이성’에 의해 탐구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 이전의,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는 그 자신이 근간으로 하고 있는 이 이성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명료하고,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고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칸트 자신도 『형이상학 서설』(이하 '책')에서 이 사실에 대해 밝히고 있는데, 이제는 이성이라는 '탑'을 헐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볼 시간이 되었다고 말한다.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그러니까 인간 이성을 엄준한 '심판대'에 세운 최초의 노력이 바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하 '『비판』')이다. 『비판』에서 칸트는 인간 이성이 어떠한 작용을 하여 이 세계를 파악하는지, 그리고 그를 토대로 인간이 어떻게 학문을 발전시키는지 밝히고 있으며, 또한 이성의 '월권행위' 즉, 이성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칸트의 노력은 인식론의 측면에서 혁신적인 것이었고 인식론이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후대의 모든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현대에는 서양 철학의 판도를 바꾸었다고 평가받는 『비판』이 세상에 처음에 나왔을 때는 현재와는 달리 학계에서도 반응이 좋지 않았고 또한 대중적으로도 큰 반향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칸트는 편지에서 “대중성을 얻을 수 있는 어떤 기획을 구상하고 있음”을 밝히며 기존의 『비판』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비판』의 요약본을 펴냈는데 그것이 바로 『형이상학 서설』이다. 이러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다음 절부터는 책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논할 것인데, 먼저 밝혀둘 것은 글의 구조는 전적으로 책의 순서와 일치하며, 어느 정도는 칸트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논의가 진행될 것이다.

                              

2. 머리말                                          

이 『서설』은 생도(초심자)들의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장래 교사들의 사용을 위한 것이다. 그것도 이 교사들이 이미 현존하는 학문에 대한 강술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학문 자체를 처음으로 안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칸트는 책의 첫 문장을 이와 같이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인상 깊은 것은 이 문장이 칸트가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평소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려준다는 것인데, 이 문장은 책이 '서설'이라고 해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이해를 돕기 위한, 형이상학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을 위한 입문서로서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 아닌, 스스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을 '안출'하고자 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칸트는 “철학함이란 누군가의 사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누차 이야기했다고 한다. 즉, 이 책은 형이상학, 더 구체적으로는 철학이라는 학문을 스스로 창조해내려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라고 칸트는 첫 문장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칸트는 책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의 의도는 형이상학에 종사하는 것을 가치 있다고 보는 모든 이들에게, 그들의 작업을 얼마간 중지하고,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것들을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서, 모든 것들에 앞서 무엇보다도 먼저, “과연 형이상학과 같은 어떤 것이 도무지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하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 불가피하게 필요함을 확신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형(形), 즉 형태를 초월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형이상학을 영어로 쓰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Metaphysics). 형이상학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그에 대한 정의를 내리자면, 말 그대로 형-이상학, 즉 심리학, 미학과 같은 학문은 물리학과 달리 물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이상학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칸트가 말하는 형이상학이란 그러한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이 아닌, 선험적인, 그러니까 경험하지 않은, 경험할 수 없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을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예를 들자면, '신이 존재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경험을 통해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인간의 역사를 보여주며, “보거라. 이러한 일들이 인간에게 일어났는데, 이것이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가 아니라면 대체 무어냐.”라고 말하며, 신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정말로 관대하게 말해서 귀납적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연역적, 즉 인간의 이성을 이용해 선험적으로 얻은 답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알 수 있는바, 칸트는 이 책에서 “선험적인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하고 있고, 이 질문은 더 나아가 '선험적인 인식, 판단이 가능한가?'라는 질문도 내포하고 있다. 이어 다음 절에서 칸트는 형이상학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성에 대해 설명한다.

                            

3. 서설-모든 형이상학적 인식의 특유성에 대한 서언       

 칸트는 모든 학문이 그 각자의 특유성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학문의 한계 및 경계들이 서로 교차하여 학문에 대한 본성의 면에서 그 학문 자체가 철저하게 탐구될 수 없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측면에서 형이상학의 특유성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이상학의 특유성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중요하므로 유의하는 것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은,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을 모두 선험적 인식과 사고라는 측면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순수 이성은 순수 지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우선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천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그것들이 경험적일 수 없음은 이미 그 인식의 개념 속에 들어있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인식의 원리들은 결코 경험에서 취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형이하적이 아니라 형이상적인, 다시 말해 경험 저편에 놓여있는 인식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적 물리학의 원천을 이루는 외적 경험도, 경험 심리학의 토대를 이루는 내적 경험도 형이상학적 인식의 기초에 놓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적 인식은 선험적 인식, 바꿔 말해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으로부터의 인식이다.

                              

 위의 칸트의 말에서 새로운 개념이 파생되어 나온다. 인식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판단'과 같은 것이다. 판단은 논리학적으로 “~는 ~이다.”의 형식을 가지는데, 실제로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때에, 예를 들어 나의 앞에 놓인 볼펜을 인식한다고 했을 때, “이것은 볼펜이다.”와 같이 '이것'이라는 주어와 '~은 볼펜이다'라는 술어를 사용하여, 즉 판단의 형식을 사용하여 인식하기 때문이다(혹여나 앞으로 들 예시 중 어떤 것은 “~는 ~이다.”라는 형태를 띠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예시는 얼마든지 “~는 ~이다.”로 바꿀 수 있다. 예를 들어 ’둥근 사각형‘과 “사각형이 둥글다.”가 과연 다른 것인지 생각해보라.).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인식을 위한 판단에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판단들은 어떠한 근원을 갖든지 간에, 또 논리적 형식의 면에서 어떠한 성질의 것이든지 간에, 내용의 면에서는 판단들의 구별이 있으니, 그 내용에 따라 판단들은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 확장적이어서 주어진 인식을 확대하거나 한다. 전자는 분석판단이라고, 후자는 종합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분석판단'이란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어 있는 판단을 말한다. 칸트가 책에서 예를 든 것처럼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는 판단이 있을 때, 이때 주어는 '물체'이고, 술어는 '~는 연장적이다'이다. '물체'라는 개념에는 '연장성(공간을 차지하는 성질)'이라는 성질이 이미 내포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는 분석판단이 “한낱 설명적이어서 인식의 내용에 덧붙이는 바가 아무것도 없거나”라고 설명한 것이다. 칸트가 예로 든 위의 분석판단을 통해서는 인간의 이성 내에서 ’물체‘라는 개념에서 다른 어떠한 개념으로의 확장 및 결합이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칸트는 “모든 분석판단들의 공통원리는 모순율이다.”라고 말하는데 ’모순‘이란 두 가지의 명제가 동시에 참이거나 동시에 거짓일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데, 위의 예에서 '물체'는 연장성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술어가 '~는 연장적이지 않다'고 하면, 이 둘은 동시에 참이거나 거짓일 수 없다. 바로 이러한 모순율 때문에 “모든 물체는 연장적이다.”라고 하는 분석판단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종합판단’이란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고 외부의 다른 개념에 의해 주어와 술어가 결합되어 있는 명제를 말한다. 칸트는 이에 대한 예로 “모든 물체는 무겁다.”라는 판단을 제시한다. 물체라는 개념 안에는 “~이 무겁다.”라는 술어가 의미하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종합판단이 ‘외부의’, 즉 순수이성이 아닌 경험에 의해서 주어와 술어가 결합된다고 하여 종합판단이 무조건 후험적이지는 않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종합판단은 선험적 종합판단과 후험적 종합판단으로 나뉜다. 먼저 후험적 종합판단의 예로는 경험판단이 있다. 후술하겠지만, 경험판단이란 분석판단과 선험적 종합판단과는 다르게 경험을 토대로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 볼펜은 검은색 볼펜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주어인 ‘볼펜’이라는 개념 안에는 수많은 색의 볼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볼펜’이 ‘검은색 볼펜’이라는 것은 장담할 수 없고, 오직 이 ‘볼펜’을 써봄으로써, 즉 경험을 통해서만이 위의 명제가 타당한지 부당한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선험적 종합판단은 술어의 개념이 주어의 개념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선험적 인식, 즉 순수지성에 의해 술어와 주어가 결합한 명제를 말한다. 칸트는 이 선험적 종합판단의 예로 수학적 판단들을 들고 있다.


 수학적 판단들은 모두 경험에 근거해있지 않다. 만약 인간이 사용하는 수학의 개념, 즉 수많은 수학적 판단들이 경험적이라 한다면, 수학적 명제가 지니고 있는 필연성, 즉 x+7=10 이라고 할 때, x=3 이어야 한다는 판단은 필연성을 지니지 못하리라. 7+5=12 라는 판단을 생각해보자. 이 판단은 얼핏 보면 분석판단이라는, 7+5 라는 개념 안에는 12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7+5 라는 주어에서 7, +, 5를 아무리 개별적으로 분석한다고 해도 여기서 ‘12’라는 숫자는 생각할 수 없다. 12라는 숫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개념 및 인식이 확장되어 ‘12’라는 숫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리라. ‘12’라는 숫자는 순수이성에,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12’라는 숫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7+5=12 라는 판단이 후험적 종합판단일 수는 있어도 선험적 종합판단일 수는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는 ‘12’라는, 판단에 사용된 질료, 즉 자료가 경험(여기서는 학습)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저 판단은 후험적인 것이라고 하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의 순수이성에 ‘12’라는 숫자 자체는 각인되어 있지 않을지 몰라도, ‘더하기’라는 개념에 의해서 숫자 ‘12’가 뜻하는 개념은 각인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저 판단은 선험적 종합판단이라 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수학이 매우 정교한 약속 체계일 뿐이라는 견해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자들은 수학이라는 ‘약속’을 배운 후에 수학이라는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수학적 판단들은 후험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수학이 약속체계라는 것과 수학적 판단이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수학에는 임의로 정할 수 있는 약속과 임의로 정할 수 없는 약속이 있다. 임의로 정할 수 있는 약속이란 ‘∴’라는 기호에 대해 ‘그러므로’라는 뜻을 부여하는 것 등을 말하고, 임의로 정할 수 없는 약속이란 “같은 양에서 같은 양을 감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와 같은 판단 및 인식처럼, 임의로 약속을 정해서 그러한 명제가 타당한 것은 아닌 것들을 말한다. 오히려 임의로 정할 수 없는 약속들을 인간의 순수이성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에 대하여 논한 뒤,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이 조항의 결론은 이렇다: 형이상학은 본래 선험적 종합명제들만을 다루는 것이며, 이러한 명제들만이 형이상학의 목적이 되는 것이다.

                            

 위의 모든 논의는 바로 이러한 결론을 위한 것이었다. 형이상학은 우선 경험적인 것에 대해서는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또한 경험이란 지각 및 인식의 연속에 불과하므로, 만약 지각 및 인식의 작용에 대하여 명료하게 알 수 있다면, 후험적 판단에 대해서도 똑같이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판단, 선험적 종합판단, 후험적 종합판단 중에서 후험적 종합판단은 학문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리고 분석판단도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데, 이는 분석판단이 형이상학 및 여타 다른 학문을 위한 도구로서는 사용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자체, 즉 분석판단 자체에서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정리하면, 형이상학은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 선험적 명제를 인식하고, 바로 거기서 새로운 산출물을 얻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이 책이 목적한 바인 “형이상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선험적 종합인식이 가능한가?” 혹은 “어떻게 선험적 종합인식이 가능한가?(칸트는 수학과 같은 학문에서 보듯이 논쟁의 여지없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종합인식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모든 형이상학자들은 그들이 ‘어떻게 선험적 종합인식들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때까지는, 그들의 업무에서 공식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정직당해 있는 것이다.

                           

 이 절에서 칸트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논의의 진행방식에 대해 설명하는데, 칸트는 먼저 “순수이성에 의한 그러한 인식”, 그러니까 선험적 종합인식들이 있다고 전제를 한 뒤에, 이것이 순수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즉 선험적 종합인식들이 있다는 증거로서 순수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을 제시하는 분석적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 하필 칸트가 순수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을 증거로서 제시하고 있는지는 칸트 자신의 말로 대신하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이것들만이 우리에게 대상들을 직관에서 현시할 수 있고,, 만약 가령 이들 학문 안에서 선험적 인식이 등장하면, 진리를, 내지는 인식의 대상과의 합치를 구체적으로, 다시 말해 그 인식의 현실성을 보여줄 수 있고, 이 현실성에서 출발하여 그 인식의 가능성의 근거로 분석적인 길을 따라 나아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 어떻게 순수수학은 가능한가?                             

 여기 수학이라는 학문이 가지고 있는 특성에 관하여 논하기 위한 간단한 예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골드바흐의 추측’이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현재 풀리지 않은 난제로, 그 내용은 “2보다 큰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예를 들어 2+2=4, 5+7=12)”이다. ‘골드바흐의 추측’은 현재 ‘경험상으로는’ 참인 명제로 추측된다고 하는데, 이는 컴퓨터로 일일이 대입을 하여 얻은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수학에 있어서 경험상으로는 맞다고 하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일까?(칸트는 “그것은 단지, 사람들은 항상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 명제는 우리의 지각이 지금까지 미친 범위까지에서만 타당하다는 것만을 뜻할 것이다.”와 같은 말을 하는데 이는 방금의 물음에 대한 적절한 답이다.) ‘골드바흐의 추측’을 실제로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충분히 큰 숫자까지 성립하므로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골드바흐의 추측’의 의의는, 이것이 수학 특유의 직관적이고 명시적인 방식의 증명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 분석판단이 아닌 새로운 개념들에 의해 기존의 개념들이 결합되는 종합판단에 의해 풀릴 수만 있다면, 수학의 정수론, 특히 소수 그 자체에 대하여 혁신적인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칸트는 이와 같은 수학의 특유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릇 여기에 하나의 위대한 보증된 인식이 있으니, 그것은 이미 현재 경탄할만한 범위에 걸쳐 있는데다가, 미래에 무한한 확대를 약속하고 있고, 철두철미 명증적인 확실성, 다시 말해 절대적인 필연성을 동반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어떠한 경험적 근거에도 의거하는 바 없고, 그러니까 이성의 순수한 산물로서, 그러면서도 게다가 철두철미 종합적이다.

                        

 칸트가 이 장에서 궁극적으로는 목표하는 바는, 순수수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통해 선험적 종합인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순수수학은 선험적 직관을 근간으로 하기 때문에 순수수학의 가능성을 논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선험적 직관의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선험적 직관에 대한 고찰을 하려고 하면 먼저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일반적으로 ‘직관’이라고 하면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사물을 마주함으로써 생겨나는 표상(쉽게 말하자면 이미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만약 그렇다면 선험적 직관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직관이라는 것은 인간 외부의 사물을 마주해야 생기는 것이고, 이는 그 자체로 ‘선험적’이라는 말과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와 같은 문제를 다음의 대답으로 해결한다.

                                          

즉 한낱 이 감성적 직관의 형식에만 관련하는 명제들은 감관들의 대상들에 대해서 가능하고 타당할 것이며, 그와 함께 거꾸로, 선험적으로 가능한 직관들은 결코 우리의 감관의 대상들 외의 다른 사물과 관련할 수 없다.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외부 세계를 ‘감관(감각기관)’을 통해 인식한다. 그런데 이때 인간이 인식하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사물 그 자체’라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내가 나의 앞에 놓인 펜에 대해 인식한다고 해보자. 나의 눈, 즉 감관을 통해서는 이 펜은 보라색과 파란색이 어우러진, 매끄러운 굴곡을 가진,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지는 원통형의 사물로 보인다. 그러나 개의 경우 개는 인간과 달리 눈에 2종류의 수정체 세포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보라색과 파란색을 구별하지 못하고 펜이 오로지 보라색 혹은 파란색으로만 보일 것이다. 이와 같은 감각의 한계는 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아마 인간보다 훨씬 우수한 시각 능력을 가진 생물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펜이 우리보다 훨씬 다채로운 색을 가진 물체로 보일 수도 있으리라. 이와 같이 인간이 이 세계를 인식할 때에 인식이 되는 대상은 이 세계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단지 인간 자신의 감관을 통해서 얻은 표상들을 인식, 즉 직관할 뿐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직관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선험적 직관이란 인간이 감관을 통해 얻은 대상들의 표상을 인식하는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험적으로 사물들을 직관할 수 있는 것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일 뿐이며, 그러나 그로 인해 우리는 또한 객관들을 그것들 자체인 바대로가 아니라,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위와 같은 말은, 즉 “우리에게 현상할 수 있는 바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라는 말은 흡사 조지 버클리, 헤겔 등의 ‘관념론’과 유사하게 들린다. 관념론이란 조지 버클리가 한 말로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그는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영화 『매트릭스』로,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기계들이 인간을 평생 잠자고 있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컴퓨터 상의 가상세계로 인간은 이 매트릭스에 연결되어 자신이 실제로는 단지 잠을 자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가 현실인 양 자신이 잠을 자고 있다고 깨닫지 못한 채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간다. 즉, 관념론이란 외부의 대상이 실재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지각 안에서 혹은 인식 안에서일 뿐이라고, 인간 외부의 대상의 실재성을 단정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철학사조인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책에서 자신이 말한 저 말들이 관념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칸트는 인간을 둘러싼 외부의 대상이,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와 같이 사물 그 자체로서는 인식될 수 없고, 감관이 직관하는 대로만 인식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관념론에서는 외부의 감관의 대상의 실재성을 부정하지만, 칸트는 외부의 실재성은 긍정하되, 단지 그 실재성이 감관에 의해서 실제와는 다른 형태 및 형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칸트는 실제로 『비판』을 펴냈을 때에 다른 철학자들로부터 자신의 이러한 사상이 관념론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하여 혹평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칸트는 책에서 여러 지면을 이 오해에 반박하기 위해 할당하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위에서 선험적 직관이 감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선험적 직관이 ‘감성(쉽게 말해 감각)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감성적 직관의 형식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그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한번 ‘펜’이라는 물체에 대해 떠올려보라. 사람마다 펜을 떠올리라고 하면 그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른 형태를 띨 것이다. 어떤 사람은 책상 위에 놓인 펜을 떠올릴 것이고, 어떤 사람은 흰 공간에 홀로 떠있는 펜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사람의 손에 들린 펜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상상한 펜이라는 이미지에서 시간과 공간을 분리시켜보라. 만약 펜을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그 책상과 배경의 모든 것들을 지웠다고 해도, 즉 예에서 든 흰 공간에 홀로 떠있는 펜을 상상한다고 하더라도 펜은 아직 ‘흰 공간’에 있다. 또한 시간의 경우에도 우리로서는 시간이 ‘없다’라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바로 이러한 예를 통해서 인간의 감성적 직관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자신이 생각한 펜의 이미지에서 그 펜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이에 대해 거북하게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칸트는 시간과 공간이 인간에게는 어떠한 ‘개념’이 아닌, ‘형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절에서의 논의를 정리하며 다음과 같다. 순수수학은 그 특유성에 의해 선험적 종합인식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또한 그보다 앞서 순수수학은 선험적 직관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선험적 직관은 감성적 직관의 형식을 통해서만 가능하고, 이 감성적 직관이 가능하려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순수수학은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5.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                              

 이 절에서는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는데, 칸트가 대상으로 하는 순수 자연과학에서의 인식은 “선험적으로 가능하고 모든 경험에 선행하면서도 경험에 의해 그 실재성이 확증될 수 있는 자연인식”이다. 즉, 칸트가 말하는 자연인식이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물체의 합법칙성(예를 들어 인과관계, 실체성), 그리고 그중에서도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합법칙성(만약 경험을 통해 확증될 수 없다면 그것은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칸트는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합법칙성에만 주목한다.)에 대한 선험적 인식을 의미한다.


 위와 같이 순수 자연과학은 합법칙성, 즉 보편타당성 및 객관성을 지닌다. 그러나 우리가 여태까지 논한 감관 및 직관에서는 이 보편타당성, 그러니까 반성적 사고를 행하는 지성에 의한 객관성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이 가진 어떠한 선험적 조건에 의해 보편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질문이 이 절에서의 궁극적 질문으로, 다시 칸트의 말을 빌려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어떻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조건들이 동시에 그로부터 모든 보편적 자연법칙들이 이끌어져야만 하는 원천들인가 하는 것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먼저 새로운 용어들을 도입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경험판단’과 ‘지각판단’이다. 경험판단이란 선험적 판단(선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판단)과 대비되는 경험적 판단(경험을 통해서 얻는 판단)과는 다른 것으로, 객관적 타당성을 지닌 경험적 판단을 말한다. 이와는 달리 주관적 타당성을 지닌 경험적 판단이 지각판단이다. 그러므로 모든 경험판단은 경험적 판단이지만, 모든 경험적 판단이 경험판단이지는 않다고 할 수 있으며, 지각판단이 경험판단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적 타당성, 즉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타당한 보편타당성을 얻어야 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바, 순수 자연과학의 합법칙성은 바로 이 경험판단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지각판단과 경험판단에 대해 더욱 자세히 논의해보자. 지각판단은 단지 ‘나’의, 더 엄밀히 말해 ‘나’만의 지각들의 연결이다. 예를 들어 “방이 따뜻하다.”와 같은 판단들이 지각판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각판단에서는 판단의 보편타당성을 이끌어낼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절의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한, 경험판단의 보편타당성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칸트는 그 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데, 이는 다음의 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므로 숙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어진 직관은 하나의 개념 아래에 포섭되어야만 하는데, 이 개념은 직관에 관한 판단 일반의 형식을 규정하고, 직관의 경험적 의식을 의식 일반에서 연결하며, 그렇게 해서 경험적 판단들에 보편타당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선험적인 순수 지성개념이다. 이러한 개념은 한낱 직관에게 그것이 판단에 쓰일 수 있는 방식 일반을 규정하는 것 외에 다른 일은 하는바가 없다.

                          

이와 같은 칸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손에서 공을 놓으면 공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판단은 지각판단으로, 아무리 계속해서 손에서 공을 놓아서 공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이 판단이 보편타당함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즉 지각들, 그러니까 여기서는 ‘손에서 공을 놓는다’와 ‘공이 떨어진다’는 지각들이 ‘나’만의 의식 안에서만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손에서 공을 놓는다’와 ‘공이 떨어진다’가 원인과 결과의 관계, 그러니까 인과관계라는 개념 안에서 생각되면 이는 보편타당성을 얻고, 이때의 ‘인과관계’라는 개념이 바로 선험적인 순수지성개념이 되는 것이다.(한 가지 밝혀둘 것은, 직관은 오로지 감관에 의해 얻어지는, 무반성적인 것이고, 지성은 반성적인, 생각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저 판단은 “공은 그것을 받치고 있는 물건이 없으면 떨어진다.”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선험적인 순수지성개념을 판단들의 형태에서 찾아내려고 한다.

                                    

왜냐하면 직관들이 판단작용을 위한 이러한 계기들의 어느 것과 관련해서 그 자체로, 그러니까 필연적이고 보편적으로 규정되어 있는 한에서, 직관들 일반에 대한 개념들 이상의 것이 아닌 순수 지성개념들은 판단작용을 위한 이러한 계기들과 전적으로 정확하게 병행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객관적으로 타당한 경험적 인식으로서의 모든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 원칙들도 전적으로 정확하게 규정될 것이다.

                          

 애초에 위에서(이 장의 첫 번째 인용에서) ‘선험적인 순수 지성개념’의 정의에 대해 논할 때, 칸트는 “선험적인 순수 지성개념이 직관에 관한 판단 일반의 형식을 규정하고”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칸트는 여태까지 설명한 선험적인 순수지성개념을 논리학에서의 판단형식에서 찾으려 하고, 다음의 표가 칸트가 살던 시대의 논리학에서의 판단형식들이다. 혹자는 왜 하필 ‘논리학’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잠시만 생각을 해보면, 논리학은 인간의 이성을 명증적이고 확실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직관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및 도구로서의 학문으로, 칸트가 판단들의 형식을 논리학에서 찾은 것은 매우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논리학 자체가, 판단 및 인식(이미 머리말에서 우리는 판단과 인식이 매한가지라는 것을 알았다.)이라는 것의 형식과 타당성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도 저 의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판단들의 논리적 표

 위의 ‘판단들의 논리적 표’로부터 선험적인 지성개념들의 범주(이하 ‘범주’), 그러니까 이 절의 목표였던 지각으로서의 경험을 보편타당한 원칙으로 될 수 있게 해주는 선험적인 원칙들이 파생된다.

                                     

지성개념들의 초월(논리)적 표

 ‘판단들의 논리적 표’와 ‘지성개념들의 초월(논리)적 표’를 결합하여 설명하기 위해 "문재인은 대통령이다."라는 판단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판단은 판단들의 논리적 표에서는 정언판단("A는 B다."의 구조이므로 이 판단이 단칭판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문재인은 대통령이다."라는 판단은 문재인 한명만이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이라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정언판단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문재인'이라는 주어와 '~는 대통령이다'라는 술어로 이루어진 정언판단이다. ‘판단들의 논리적 표’에서의 정언판단에 해당하는 것은 ‘지성개념들의 초월(논리)적 표’, 즉 범주에서는 ‘실체성’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정말로 문재인이 대통령인지, 바로 실체성에 대해 문제 삼게 되고, 실제로 그러하다면, 문재인이 대통령이라면 "문재인은 대통령이다."라는 판단에 대해 보편타당하다고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 ‘범주’가 바로 인간이 이 세계를 추상화하는 12가지의 방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12가지의 추상화 방식, 즉 선험적인 원칙들을 통해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지각판단을 보편타당한 경험판단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볼 만한 것은, 과연 인간이 세상을 추상화하는 방식이 과연 이 12개가 다인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칸트가 논리학에서 선험적인 원칙들을 찾아낸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칸트가 살았던 시대의 논리학에서의 판단형식들과 현대논리학에서의 판단형식은 다르고, 또한 저러한 12개의 범주로는 인간이 이 세계에 대해 반성적인 사고를 할 때에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저 ‘선험적인 원칙’들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이 세계를 추상화하고, 이 세계에 대해 반성적 사고의 형식을 밝히려고 한 칸트의 명철함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 절에서의 여태까지의 논의를 칸트의 말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감관들의 일은 직관하는 것이고, 지성의 일은 사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고함은 표상들을 한 의식에서 통일하는 것이다. …(중략) 그래서 판단들은 표상들이 한 주관에서의 의식과만 관계 맺어지고, 그 안에서 통일이 되면 한낱 주관적이고, 혹은 표상들이 의식 일반에서, 다시 말해 거기서 필연적으로 통일이 되면 객관적이다. … 그래서 순수지성 개념들이란 모든 지각들이 그 안에서 그 지각들의 종합적 통일이 필연적이고 보편타당한 것으로 표상되는 경험판단들로 쓰일 수 있기 전에, 먼저 그 아래에 포섭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개념들을 말한다.

                             

 위의 모든 논의가 바로 이 절의 제목이기도 한 "어떻게 순수 자연과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애초에 칸트는 앞서 밝힌 것과 같이 경험에 의해 그 실재성이 확증될 수 있는 자연인식이 의문의 대상이라고 하였고, ‘범주’에 의해 인간은 지각을 통해 얻은 경험을, 즉 자연에 대한 인식을 통해 얻은 경험을 보편타당한 법칙으로, ‘순수 자연과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논리학이 제공하는 모든 규칙들 일반 외에 더 이상의 조건은 있을 수 없고, 이 조건들은 하나의 논리적 체계를 형성하며, 그러나 이 위에 기초하는, 모든 체계적이고 필연적인 판단들을 위한 선험적인 조건들을 함유하는 개념들은 바로 그 때문에 하나의 초월적 체계를 형성하고, 마침내 그것들을 매개로 모든 현상들이 이 개념들 아래에 포섭되는 원칙들은 하나의 자연학적 체계, 다시 말해 하나의 자연체계를 형성하는 바, 이 체계는 모든 경험적 자연인식에 선행하여, 이것을 비로소 가능하게 하며, 그래서 참으로 보편적이고 순수한 자연과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절에서 칸트는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인간은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감관을 통하여 지각하고, 이를 지성을 통하여, 그러니까 반성적 사고를 통해 지각들을 결합하여 판단으로 만들어낸다. 이러한 판단이 객관적 및 보편타당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자연법칙이 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것이 선험적인 원칙이다. 즉, 칸트는 인간이 자신의 이성을 통해서만(오로지 그로서만), 더 구체적으로는 선험적인 원칙 및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통해서만 자연에 관한 일반원칙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에 선험적인 원칙 및 경험 일반을 가능하게 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물들 그 자체의 자연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만유인력의 법칙           

이라는 공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만유인력의 크기가 실제로는(물자체로는), 그러니까 인간이 경험을 통해서는 알 수 없으며 공식에 대입해 얻을 수 있는 값보다 더 정확한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이 크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므로 단지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저 공식을 통해 만유인력의 크기는 F(r) 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더욱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성의 그의 (선험적인) 법칙들을 자연에서 길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법칙들을 자연에게 지정한다.

                           

 여태까지의 4절과 5절에서 칸트는 순수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혔고, 그로 인해 선험적 종합인식이 가능하다는 필연적인 결과가 따라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선험적 종합인식을 대상으로 하는 형이상학을 위한 길은 열렸다고 할 수 있으며 다음 절에서는 형이상학 일반이 가능한지, 즉 이 책이 궁극적으로 목표하는 바가 논의된다.

                   

6.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                        

 4절과 5절에서 한 질문들, 그러니까 수학과 자연과학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들은 경험을 통해서도 그 답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수학과 자연과학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앞서 논의한 모든 내용을 모른다고 해도 3-2=1 이라는 것은 누구나 의심 없이 타당하다고 알고 있고, 무게가 다른 두 공이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절에서, 그리고 앞으로 논의할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은 도무지 그런 것이 허용되지가 않는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제시된 이 셋째 물음은 말하자면 형이상학의 핵심과 특유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곧 이성의 순전히 자기 자신에 종사함에, 그리고 이성이 자기 자신의 개념들에 침잠함으로써 직접적으로 그로부터 잘못 생각하여 생긴, 객관들에 대한 앎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앎을 위해서는 경험의 매개가 필요하지도 않고, 도대체가 경험을 통해서는 그에 이를수도 없다.

                              

 형이상학은 앞서의 두 질문과는 달리 감관을 통한 직관이나 경험에 의존하지도 않고, 의존할 수도 없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는 ‘이념’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도입한다. 이념이란 “어떤 경험에서도 그 대상이 주어질 수 없으되 필연적인 개념들”을 말한다. 이 이념들은 순수이성, 그러니까 어떠한 경험에도 의존하지 않는 이성의 요구주장, 쉽게 말해 이성이 그 자신에게 답하기를 요구하는 질문인 것이다. 바로 이 시점, 이성이 “모든 주어진 경험을 넘어서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상태를 칸트는 이성이 “초험적”이 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칸트는 5절에서 ‘범주’들을 제시한 것과 같이 이념의 근거를 제시하는데, 이번에도 논리학에서 그 근거를 제시한 범주와 비슷하게, 이념의 근거를 ‘이성추리’에서 찾으려 한다.


 이성추리의 형식에는 정언적 추리, 가언적 추리, 선언적 추리가 있다. 그리고 칸트는 이 세 가지의 추리에, 즉 정언적 추리에는 “완벽한 주관(주체, 실체적인 것)의 이념”, 가언적 추리에는 “조건들의 완벽한 계열의 이념”, 선언적 추리에는 “가능한 것의 완벽한 총괄의 이념”이 기반한다고 말한다. 또한 마지막으로 칸트는 이 각각의 이념들이 차례대로 ‘영혼론(심리학)적’, ‘우주론적’, ‘신학적’이라고 한다. 앞서 이성이 초험적이 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이성이 순수수학과 순수자연과학, 즉 감관에 의한 직관과 선험적 지성에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려 하는지, 즉 왜 ‘초험적’이 되려고 하는 것인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다음과 같은 구조의 질문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왜 한국전쟁이 일어났나? 냉전체제 때문이다. 냉정 체제는 왜 생성되었나? 제2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나? 제1차 세계대전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왜 일어났나? …” 이와 같이 “왜?”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질문이 바로 앞서 말한 가언적 추리에 기반한 것이고, 이성이 문제 삼는 모든 “왜”라는 문제에 대한 통일된 답, 즉 ‘제1원인’(이는 영어로는 ‘first cause’인데 이 단어의 뜻에 ‘조물주’라는 뜻이 있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을 묻는 질문이 바로 우주론적 “조건들의 완벽한 계열의 이념”인 것이다(칸트는 이러한 순수이성의 요구주장이 “그 계열의 절대적 완벽성을 얻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와 같은 맥락으로서 나머지의 영혼론적 이념과 신학적 이념도 설명될 수 있고 또한 왜 하필 칸트가 이념들이 이성추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이념은 순수이성의 요구주장, 즉 질문이라고 하였는데, 인간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논리학적으로는 ‘추리’라는 형식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칸트가 각각의 이념들이 이성추리에 기반한다고 한 것은 적절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먼저 영혼론적 이념들에 대해 살펴보자. 영혼론적 이념이 기반하는 이성의 추리는 정언적 추리이다. 정언적 추리는 정언명제로 이루어진 추리를 말한다. 정언명제란 주어와 술어로 이루어진 명제인데, 한 정언명제의 주어는 다시 다른 명제에서는 술어의 자리에 올 수 있다. 예컨대 “동물은 생물이다.”의 정언명제에서 ‘동물’이라는 주어는 “사자는 동물이다.”라는 정언명제에서의 술어의 자리에 오고 있다. 그렇다면 정언명제에서 술어를 지워버리면, 즉 “사자는 동물이다.”에서 ‘~는 동물이다’라는 술어를 지우면 남는 것은 ‘사자’인데 여기서 ‘사자’란 무엇인가? 한번 ‘사자’라는 것을 다른 정언명제에 술어로서 대입하지 말고, 그러니까 “날카로운 이빨과 갈기를 가진 고양잇과의 동물이 사자다.”라는 명제와 같은 형태를 사용하지 말고 대답을 해보라. 아마 거북한 감정이 들 것이다. 이와 같은 질문은 플라톤의 ‘이데아’, 즉 ‘물자체’로서의 ‘사자’가 무엇인지 답하라는 것과 같은 얘기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정언명제의 구조를 취하지 않으면 대답할 수 없다.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바, 모든 주어는 다른 정언명제에서의 술어의 자리에 올 수 있지만, 술어의 자리에 오는 순간 다른 주어를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순수이성은 이와 같이 주어를 찾아가는 끊임없는 과정을 되풀이하다가 술어가 될 수 없는 주어, 즉 모든 술어의 ‘최종적인 주어’를 찾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방금까지 설명한 순수이성의 요구를 ‘영혼론’적 이념이라고 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칸트가 살던 시대에도, 현재 우리의 시대에도) 진지하게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을지라도, 단순히 용어로서 ‘영혼’이라는 실체에 대해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것으로, 즉 모든 술어의 주어로써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읽은 독자들은 “중세시대도 아니고 근대의 칸트가 왜 갑자기 터무니없이 영혼이라는 개념에 대해 논하는가?“라고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질문을 했다면 그 독자는 칸트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우리는 인간은 감관을 통해 얻은 대상만이, 즉 그 대상이 ‘사물 그 자체’가 아닌 인간에게 현전한 대상으로서만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칸트는 인간이 형이상학으로서 영혼론적 이념에 대해 탐구하는 것은 인간 이성의 월권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영혼론적 이념, 즉 순수이성의 물음에는 매우 탁월한 답변이기 때문에 아주 효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앞서 간단히 밝힌 우주론적 이념들에 대해 살펴보자. 우주론적 이념이 기반하는 이성추리는 가언추리이고, 가언추리란 가언명제로 이루어진, 그러니까 ”A이면 B이다.“와 같은 구조의 명제로 이루어진 추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가언명제는 하나의 ”조건과 조건 지어진 것“의 관계를 말한다고 할 수 있고 ”A이면 B이다“는 ”B는 A를 조건으로 한다.“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가언명제는 정언명제와 마찬가지로 전건, 즉 위의 가언명제에서는 ‘A’와 같은 ‘조건’은 다른 가언명제의 후건, 즉 위의 가언명제에서 ‘B’와 같은 ‘조건 지어진 것’의 자리에 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자식은 부모가 있어야 하므로 ”자식은 부모를 조건으로 한다.“고 할 때, 부모는 다시 조부모가 있어야 하므로 ”부모는 조부모를 조건으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과 조건 지어지는 것의 관계를 무한히 확장하다보면, ‘모든’ 조건 지어지는 것의 조건이 있어야 하고, 바로 이 모든 조건 지어지는 것의 조건을 순수이성이 물어보는 것을 우주론적 이념이라고 하는 것이다.


 칸트는 이 무한히 확장하는 조건들을 앞서 범주에서 밝힌 네 개의 계열, 즉 양, 질, 관계, 양태로 나누는데, 이는 범주가 인간이 세계를 추상화하는 12가지의 방식을 나타내고 이 12가지의 방식은 각각 3가지씩 양, 질, 관계, 양태의 개념에 따라 분류될 수 있으므로 매우 적절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각의 계열은 ‘정립’과 ‘반정립’을 갖는데 이를 칸트는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이하 ’이율배반’)’이라고 부른다. 정립과 반정립은 서로 상반되는 주장들이고, 그 중에서도 정립은 순수이성이 최종적인 조건을 생각할 때에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주장을 함유한다고 할 수 있다. 칸트가 분류한 우주론적 이념의 네 가지의 정립과 반정립은 다음과 같다.                    

우주론적 이념의 네 가지 정립과 반정립

 이율배반의 각각 개념들을 살펴보면, 먼저 ‘양’의 경우 시간과 공간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은 어제를 조건으로 하고, 어제는 그저께를 조건으로 한다는 바로 그러한 조건과 조건 지어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무한히 반복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시간은 어떠한 시작, 즉 한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될 것이고, 바로 이것이 ‘양’에서의 정립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으므로 순수이성은 그에 대한 상반되는 주장, 즉 시간이 무한하다는 반정립을 생각하게 된다. 이와 똑같은 맥락으로 공간에 대해서도 이해하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질’의 경우, 그 대상을 사물로 하여 예를 들어 사물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분자는 다시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다시 양성자, 중성자, 전자로 이루어져 있고 양성자, 중성자, 전자는 다시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조건과 조건 지어짐을 말하고 있다. 이를 ‘양’에서와 같이 똑같이 무한히 확장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어떠한 최종적으로 단순한, 즉 그 자체로서는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어떠한 것이 있을 것이라고 순수이성은 생각하게 되고 그것이 바로 ‘질’에서의 정립이다. 이러한 정립과 함께 그에 상반되는 주장으로서 사물은 모두 합성되어 있는 것으로서 그 자체로 다른 무언가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반정립이 바로 ‘질’에서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을 이루고 있다.


 이어서 ‘관계’의 경우, 사물 간의 관계, 즉 인과관계를 그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어떠한 사물, 특히 사물과 관련된 현상을 인식했을 때 인간은 그 현상의 원인에 대해 고찰하게 되고, 그 원인은 또 다시 결과가 되어 다른 원인을 가지는 식으로, 즉 하나의 결과는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는 식으로 인간이 인식하게 된다. 이를 무한히 확장하다보면 최초의 원인이 있다는, 그러니까 바꿔 말하자면 최초의 원인이 있어서 그에 따른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순수이성은 필연적으로 하게 되는데 이 최초의 원인은 그 자신은 원인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최초의 원인 그 자신도 원인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 그것은 최초의 원인이 아닌 것이고, 바로 여기서 그 최초의 원인은 인과관계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것이라는, 즉 세계에는 자유를 따르는 원인들이 존재한다는 정립과, 그에 상반되는 모든 것은 인과관계, 즉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반정립이 ‘관계’에서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양태’의 경우에는 사물의 존재 그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사물(그것이 무엇이든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존재하도록 조건 짓는 다른 어떠한 사물, 즉 조건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고 이를 무한히 확장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은 존재하도록 조건 지어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물이 존재하도록 조건 짓는 사물이 존재할 것이라고 순수이성은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은 ‘양태’에 있어서, 세계(사물)원인들의 계열에는 필연적으로 어떤 존재자가 있다는 정립과, 그러한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고,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우연적이라는 반정립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칸트는 ‘양’과 ‘질’에서의 이율배반이 가감(시간과 공간)하거나 분할(사물의 구성)하는 것과 관련되기 때문에 이 두 이율배반을 수학적 이율배반이라고 부르는데, 칸트에 따르면 이 수학적 이율배반은 정립과 반정립이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 먼저 시간과 공간의 경우, 앞서 논의한 대로(4절) 시간과 공간은 어떠한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감관의 ‘형식’ 및 더 엄밀히 말해 ”표상방식“일 따름이다. 이를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어떠한 것을 직관 및 인식하기 위해서는 감관의 형식인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간과 공간 그 자체를, 시간과 공간에서 떠나서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기 때문에 ‘양’에서의 정립과 반정립은 모두 거짓이 되는 것이다. 사물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앞서 사물은 ‘그 자체’로서 인식될 수 없고 감관을 통해서만, 즉 그 사물의 ‘현상’으로서만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물이 분할되어 어떤 부분을 가진다고 할 때에 인간은 결코 그 어떤 부분이 인간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면 그 부분을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질’에서의 정립과 반정립은 모두 ‘단순한 것’에 대한 존재를 인식 및 경험에 앞서 상정하고 있으므로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 수학적 이율배반에서의 모든 정립과 반정립이 거짓인 이유는 인간이 감관을 통한 인식을 통해서만 인간을 둘러싼 세계를 인식을 통하지 않아도 세계를 알 수 있다는, 일종의 순수이성의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고 또한 더욱 중요한 이유는, 애초에 정립과 반정립에서의 ‘시간과 공간’과 ‘사물’이라는 기초개념을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칸트가 예로 드는 것은 ”사각형이 둥글다.“라는 정립과 ”사각형이 둥글지 않다.“라는 반정립인데, 이 둘은 모두 거짓으로 애초에 ‘사각형’이라는 기초개념에 ‘둥글다’라는 것은 부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양’과 ‘질’에서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과는 달리 칸트는 나머지 ‘관계’와 ‘양태’에 있어서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을, 이들이 사물들의 현상, 운동 및 인과성과 관련 있다고 하여 ‘역학적 이율배반’이라고 부르는데, 칸트에 따르면 이 ‘역학적 이율배반’에서의 두 개의 정립과 두 개의 반정립은 모두 참일 수 있다. 먼저 ‘관계’에 있어서의 이율배반을 살펴보자. 누누이 강조하다시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감관을 통해 얻은 ‘현상’일뿐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필연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이때 인간이 인식하는 ‘현상’이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사물 그 자체 안에 인과관계라는 법칙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인과관계라는 것은 4절과 5절에서의, 감성적 직관과 지성의 형식으로서 이 세계를 이해하는 인간의 ‘방식’일뿐이지, 사물들이 그 안에 인과관계라는 자연의 법칙을 함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물 그 자체 안에 인과관계라는 법칙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이를 감관을 통해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인과관계가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인간 이성 그 자체는, 만약 이성에 의해서 이 세계에 어떠한 행위가 일어나면 "그것들이 현상들인 한" 인과관계에 있는 것이지만 이와는 달리 이성이 단지 어떠한 생각이 나 상상과 같은, 그러니까 이 세계에 현상으로서는 나타나지 않는 행위를 하는 한 이성은 자유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양태’에 있어서의 이율배반도 현상으로서의 원인을 제공하는 어떤 존재자는 항상 있어야 하지만, 현상이 아닌 사물 그 자체로서는 원인을 가지지 않는 존재자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립과 반정립 모두 참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역학적 이율배반에서 두 개의 정립과 두 개의 반정립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를 칸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두 명제가 조화할 수 없음은 오로지, 한낱 현상들에 타당한 것을 사물들 그 자체에까지 연장하여서, 일반적으로 양자를 하나의 개념 안에 뒤섞는 오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위의 두 이념들과는 달리 칸트는 마지막의 신학적 이념에 대해서는 책에서 아주 짧은 분량만을 할당하고 있는데 이는 아쉽게도 칸트 자신이 『비판』에서 매우 이해하기 쉽고 명백하게 설명하였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이념들을 짧게나마 설명하자면, 앞서 신학적 이념은 선언적 추리에 기반한다고 하였고, 선언적 추리는 선언명제에 의해 구성되는 추리를 말하는 것인데, 선언명제는 ‘A는 B이거나 C이거나 … X이다’와 같은 ‘A’라는 주어와 ‘B, C, …, X’의 술어로 이루어진 명제를 말한다. 그런데 이때 순수이성은 이 모든 술어들, 그러니까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술어로 총칭할 수 있는 주어를 찾게 되는 것이며, (앞서 두 이념이 칸트가 표현한 바와 같이 계열들의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이는 “사물 일반의 절대적 완벽성을 형성”할, 모든 사물들이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근거하고 있는 어떠한 최고 존재자를 찾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칸트는 선언적 추리에 근거한 이념을 ‘신학적 이념’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칸트는 『비판』에서 이 신학적 이념 또한 인간은 경험적으로, 그러니까 현상으로서 ‘신’이라는 대상을 마주칠 수 없기 때문에 이 신학적 이념 또한 이성의 월권행위라고 하고 있다.


 이 절에서 칸트는 형이상학이 가능한지에 대해 먼저 ‘이념’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였고, 이 이념을 이성추리들에 근거하여 세 가지로 분류한 뒤 각각의 이념이, 즉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어떠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지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 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이념들이 어떠한 내용을 함축하고 있더라도 공통적으로는 이념들의 이율배반으로서 모든 정립과 반정립이 모두 이성의 월권행위였다는 점이다. 바로 이 이성의 월권행위란, 다시금 밝히자면, 인간은 이 세계를 감관을 통해서 현상으로서만 파악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계를 사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이성의 월권행위가, 더 자세히는 칸트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잘못된” 이념들이 전연 쓸모없는 것은 아닌데, 위에서 밝힌 것처럼 순수이성은 어떠한 통일된 체계 및 최고 존재자를 요구하며 그를 위한 ‘영혼(영혼론적 이념)’, ‘세계(우주론적 이념, 우주론적 이념의 순수이성의 이율배반들에서의 정립과 반정립의 모든 주어가 ’세계‘임을 유의하라)’, ‘신’이라는 개념은 순수이성의 요구주장에 아주 좋은 해답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7. 결론                              

 여태까지의 논의는 모두 “형이상학 일반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순수수학을 통해서는 선험적 직관의, 순수 자연과학을 통해서는 선험적인 순수 지성개념의 가능성을 확인하였고, 그리고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어떻게 가능한지 논의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의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가능한지에 대해 논할 때, 칸트가 제시한 영혼론적, 우주론적, 신학적 형이상학은 모두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학문으로서 자기모순에 빠지거나 미정(알 수 없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렇다면 칸트는 여태까지 제시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단지 모두 거짓이거나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것일까?


 앞서 서론에서 칸트는 철학사적으로 매우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여태까지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겠지만 칸트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이 어쨌든 인간에게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증명하였지만, 여태까지의 형이상학은 모두 순수이성의 자기 자신에 대한 환상이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앞으로의 형이상학에 대해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이성의 월권행위, 즉 형이상학이 더 이상은 나아가지 말아야 할 범위를 영혼론적, 우주론적, 신학적 이념을 통해 설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이로써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자는 칸트가 설정한 범위 안에서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칸트의 크나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업적 말고도 짧게나마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는 칸트의 업적은, 칸트는 인간의 선험적 인식에 대해 최초로 명료하고 논리적으로 탐구한 철학자라는 점이다. 비록 칸트가 이 책에서, 그리고 『비판』에서 제시한 내용들이 틀렸다고 혹은 그 누군가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선험적 인식에 대한 칸트의 업적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인간의 선험적 인식은 현대에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뇌과학에 의해 그 타당성이 밝혀질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을 통해서도 칸트가 이성에 대해 고찰한 바를 간략하게 알 수 있겠지만, 이 책은 서론에서 밝혔다시피 『비판』의 머리말 격에 해당하기 때문에 칸트의 이성에 관한 정확한 사상을 알고 싶다면, 『비판』을 꼭 읽어보라고 추천하는 바다. 다음은 칸트가 앞으로의 형이상학이 나아갈 길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이 글귀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러므로 『비판』은, 그리고 또한 전적으로 『비판』만이, 잘 검사되고 확증된 전체 계획을, 아니 그에 따라 형이상학이 학문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이 계획 수행의 모든 수단을 자신 안에 함유하고 있다. 그러하니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은 다른 방도와 수단에 의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제 문제는 어떻게 이러한 과업이 가능한 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이 과업을 추진할 수 있는지, 어떻게 훌륭한 인사들을 지금까지의 전도된 결실 없는 작업으로부터 기만 없는 작업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규합을 가장 적절하게 공동의 목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지 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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