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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균 Oct 25. 2022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의학 일러스트레이션의 비밀

처음 해부학 교과서를 펴본 것은 예과 2학년 때였다. 프랭크 네터 선생의 책이었고, 책의 첫 단원에 해부학에 여러 갈래가 있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 때 등장한 예시 중 하나가 바로 '미술해부학'이었다. 예술의 영역에서 다루는 해부학은 의학의 세부 분과로서의 해부학과는 또 다르다는 것이 요지였는데, 온갖 의학용어에 정신없이 치이던 시절이라 그런지 '미술'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었다.


학부 시절 교과서에서 보았던 해부학 그림들은 대체로 느낌이 비슷했다. 부드러운 윤곽 처리에 (카데바와는 달리) 선명한 원색으로 구분되는 해부학적 구조물, 그리고 깨알같이 적힌 해부학적 구조물의 명칭. 오늘날 해부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의학 일러스트레이션의 전형을 만든 사람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막스 브뢰델(Max Brödel, 1870-1941)이라고 한다.


Illustration by Max Brödel that shows his carbon dust technique. Source: Johns Hopkins University

그 당시나 지금이나 의학 일러스트레이터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과제는 '선택과 집중'에 관한 것이었다. 사진에서 보면 목 부위의 해부학적 구조물은 명확하게 구별되어 알아보기 쉬운 반면, 머리카락이나 귀의 디테일에는 그렇게 많은 품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뢰델은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하는지, 또 어떤 부분은 그 대강만 보여주면 되는지 판별하는 데 능숙했는데, 이러한 '선택과 집중'을 가능하게 한 것은 카본 더스트(carbon dust)라는 기법이었다. 연필에서 긁혀나온 흑연 가루를 붓으로 문질러 명암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이 기법은 여전히 의학 일러스트레이션 제작 과정에서 흔하게 사용된다고 한다.

Carbon dust drawing. Source: artwanted.com

그러고 보면 해부학 교과서에는 사진 자료도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학습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브뢰델과 같은 선구자 덕분에 연구자들은 발견한 지식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학습자는 정보를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실제를 그대로 재현해내는 이미징 기술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의학 일러스트레이션이 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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