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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 Mar 14. 2022

오늘의 환자 2

긴장과 불신

1. 긴장하는 환자분


오후 5시 30분, 오늘의 마지막 예약 환자는 사랑니 발치(이를 빼는 것) 환자였다.

그 환자분의 사랑니는 윗니이고 다른 치아보다 작았기 때문에 보통은 별 어려움 없이 그냥 쏙 빠질 것이다.


환자분이 도착했다.

지난번에도 발치를 권유하며 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기 때문에 오늘 긴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환자분이 접수하자 CC(환자의 내원 이유)가 전자 차트에 찍힌다.
CC: 오른쪽 위에 사랑니가 불편해서 빼고 싶어요.
좋다. 이제 발치를 시작하자!
원장실을 나와 환자분이 앉은 덴탈 체어로 가서 앉는다.

"안녕하세요? 사랑니가 불편해서 오늘 빼시려고요~?"
"네 음식물이 많이 끼여서 불편해요. 근데 사람들이 너 대단하다고, 사랑니 빼는 예약을 왜 이리 늦은 시간에 잡냐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게 이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요."
환자분이 흥분하며 말했다.
"지금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사랑니가 작아서 엄청 무섭게 빠지진 않을 거예요. 금방 빠질 거예요."
"정말요? 저는 진짜 이게 그렇게 무서운 일인지 몰랐거든요. 그런데 정말 빼야 할까요? 지난번에 빼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이게 큰 일인 줄 몰랐어요. 안 빼도 되는 건가요?"


오늘은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거라는 내 예상이 빗나갔다.

그래서 환자분과 티키타카를 하다가 순간적으로 시계를 봤다. 5시 50분.
시간이 6시를 항해 맹렬히 달려가는 듯이 느껴졌다.

퇴근시간(6시 30분)이 가까워진다는 압박감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발치에는 변수가 작용할 때가 있기에 불안했다.

예를 들어 환자 입이 잘 안 벌어진다던지, 발치 도중 치아 뿌리가 부러진다던지, 옆 치아에 손상이 간다던지, 마취 후 환자분이 기절한다던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이제 충분한 시간은 아니었다.


"음.. 환자분."

이런이런 이유로 사랑니는 빼야 될 것이며 시간이 늦어질수록 이런이런 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마취를 하고 설명을 계속해 드리겠다고 했다.

환자분이 내 말에 수긍하여 다행히 마취를 할 수 있었다. 마취를 하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설명을 더 해드리면 될 터였다.

마취를 하고 환자분을 보니 눈을 감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환자분 지금 긴장하셨어요. 저랑 같이 심호흡 몇 번 할게요."

"......"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또 들이마시고~ 내쉬고~"

나도 환자분 옆에서 같이 해야 실제로 환자분도 따라 하기 때문에 나도 같이 심호흡을 한다.

환자분이 이제 조금 진정되신 것 같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 마음은 정말 부담스럽다. 이렇게 걱정이 많고 긴장하는 환자분의 발치를 최대한 빨리, 아프지 않게 끝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이머가 울리고 발치 겸자(발치 도구)가 환자분의 입 속으로 들어가 사랑니를 꽉 움켜 잡는다. 괜히 빨리하려다가 자칫 치아 뿌리가 부러질 수 있기 때문에 뼈와의 균형을 깨지 않으며 부드럽게 흔들흔들 힘을 준다.

"뽕!" (실제로는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다행히 사랑니가 잘 나왔다.  늦은 시간 발치라서 혹시 몰라 지혈에 도움이 되시라고 꼬매드렸다.
"사랑니 잘 나왔어요."
환자분이 저 말을 듣고 안심하신다.


오늘은 쉬울 줄 알았던 발치를 어렵게 했다. 어떤 발치는 어려울 줄 알았는데 운 좋게 쉬운 경우도 있다.
쉬울 줄 알았는데 어려운 일은, 처음부터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던 일보다 더 어렵게 진행된다.
그래서 항상 발치를 할 때는 어려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 불신하는 환자분


40대 중반의 남성 환자분이 늦게 내원하셨다. 오른쪽 아래가 붓고 아프다는 것이 내원 이유였다.

검진을 해보니 치석이 많아 잇몸이 거의 다 부어 있었다. 그리고 아프시다는 오른쪽 아래 부위는 잇몸이 특히 많이 부어 고름이 차 있는 상태였다. 구강 상태를 보니 이 분은 한동안 치과를 오시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뭔가 사연이 있거나 치과에 대한 불신 때문일 것이다.

이런 분들은 사실 상대하기가 어렵다.

역시나 환자분은 초반부터 팔짱을 끼고 나를 의심을 눈초리로 살펴보았다.

'뭐 어떻게 할 건지 한번 해봐.'(환자분의 속마음)


팔짱을 낀 환자분의 눈빛에서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팔짱을 꼈다는 것은 일단 나한테 마음의 문을 닫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음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을 해 드려도 결국 환자분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왜 이렇게 붓고 아픈지, 그래서 어떤 치료가 필요한지, 치료의 한계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환자분을 수긍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최선의 설명을 천천히 한다. 환자분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으며 또 마음의 소리를 나에게 던진다.

'알았으니까 일단 안 아프게 해 줘.'(환자분의 속마음)


이런 분들은 우선 안 아프게 해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를 한답시고 부어 있는 잇몸에 자극을 주면 통증이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오고 그러면 더 대화를 풀어가기가 힘들어진다. 안 아프려고 치과에 왔는데 더 아프게 하는 것 같으니까.

근본적으로는 치석을 제거하고 구강을 깨끗하고 해놓아야 하지만 그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통증 조절을 먼저 해 놓아야 한다.


"이렇게 부으신 것은 치석이 원인이에요. 치석이 오랫동안 제거되지 않고 잇몸에 있으면 잇몸에 염증이 생깁니다. 잇몸에 만성 염증이 항상 있다가 뭔가 자극이 될만한 원인에 의해서 갑자기 이렇게 확 부은 거예요."

"......"(팔짱을 낀 채)
"지금은 매우 아프실 거예요. 이럴 때는 바로 치석 제거를 하면 안 되고 약을 먹어서 급성 염증을 좀 가라앉혀야 합니다. 약 드릴 테니까 좀 가라앉으면 치석 제거를 하시면 돼요."

'왜 아픈데 치료 안 해줘? 염증을 긁어내야 되는 거 아닌가?'(환자분의 속마음)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에 왜 오늘은 약 처방만 나가는지에 대한 설명이 꼭 필요하다.


며칠 뒤에 그 환자분이 내원하셨다.

표정이 전보다 밝아졌고 팔짱을 더 이상 끼지 않았다. 내심 무척 기뻤다.

입안을 살펴보니 오른쪽 아래 부었던 잇몸은 가라앉았고 고름은 없어졌다. 이제 환자분은 치석 제거를 받아들이실 것이다. 혹시나 스케일링 후에도 통증이 있으실까 봐 그날도 약 처방을 해드렸다. 급성 염증은 가라앉았지만 전반적으로 치석이 많고 잇몸이 부어 있으면 스케일링 후 2주 정도는 잇몸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더 나은 구강 상태로 치과에 오실 것이다.


그동안 치과에 대한 불신이 있었다면 조금은 풀지 않았을까 기대를 해본다.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환자분을 대했을지 환자분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냥 내 업이니 사무적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환자분의 팔짱을 보고 많은 생각이 들었고 드디어 팔짱이 풀린 모습을 보고 무척 기뻤다.


다음 내원 때 또 어떤 불편감이 생긴다면 그 환자분은 또 팔짱을 낄지 모른다. 하지만 한 번은 팔짱을 풀어드렸으니 다음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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