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
“고투 족은 무리에 스며들지 않는 악인을 절벽에 내다 버린다. 악인은 절대 반성하지 않고 또 다른 악인을 낳아 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4년
아침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집 마당에서 나와 매일 가던 골목으로 들어갔다. 항상 뻥 뚫리게 보이던 길이 흐려졌다.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눈에 익숙한 골목의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여전히 안개에 가려져있었다. 분명 봐왔던 그 길들이 머릿속에서 흩날린 퍼즐 조각처럼 어지러웠다. 나는 밖에 나가려면 이 골목을 꼭 지나야 했다. 다른 길이 없었다. 그 평범한 길이 요즘 내겐 공포가 되었다. 골목의 중간쯤 담벼락에는 금이 가있었다. 내 아들 정민이가 발로차서 생긴 금이었다. 나는 그것을 몹시 보기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이 길을 걸을 때에는 금이 나오는 담벼락 직전부터 눈을 감고 걷는다. 그런데 오늘은 안개 때문에 그것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안개 속을 걷는 것은 새벽부터 높은 산에 올라가 구름 위에 올라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지금 산에 올라갈 정신이 없으니 이곳이 산으로 변했으면 좋겠고 골목의 끝은 절벽으로 변해버렸으면 하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골목 끝으로 발을 내밀었을 때 평평하게 내딛을 땅이 무서워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갈 때까지 집밖을 나가지 않았다.
정민이는 뭇국을 먹을 땐 꼭 소고기를 씹다가 뱉었다. 어릴 때부터 보기 좋지 않으니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해도 정민이는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트에서 아무리 소고기를 싸게 팔고 통통하게 여문 가을무가 보여도 맛있는 뭇국을 끓이지 않았다. 근데 그날은 이상하게 뭇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 정민이 종아리보다 두꺼워 보이는 무는 하나에 200원밖에 안했다. 냉동실엔 어제 저녁에 구워먹다 남은 소고기도 있었다.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방앗간에 들러 들기름과 청양고춧가루도 샀다. 그렇게 양손에 가득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젊음에 잠깐 파묻혀 젊은 날을 회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섯 발자국 쯤 걸었을까 나는 이내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에 고개를 내저었다. 비닐봉투가 무거워 손가락이 아렸다. 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살림하는 여자한텐 면허나 차 같은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반발할 수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엔 못 보던 여자 신발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듯한 메이커 신발이었다. 현관 너머로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실 소파에 정민과 정민의 여자친구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인사해, 우리엄마야!” 정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이 큰 여자아이는 내게 꾸벅 하면서 인사했다. 교복은 곱게 다려져 있었고 머릿결도 좋아보였다. 나이답지 않게 여드름하나 없는 피부까지 애한테서 광채가 났다. 내가 오자 어색했는지 아이들은 공부를 한다며 이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눈치없는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궁금하기도 하고 아이에게 뭐라도 대접해야 겠다는 마음으로 냉장고에서 전날 문화센터에서 만든 케이크와 과일을 꺼내서 방에 가져다주었다. 정민은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여자아이에게 우리엄마는 요리를 잘한다고 자랑을 했다. 케익을 내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자 여자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자신의 엄마도 베이킹을 즐긴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민이 말했다. “연지는 어렸을 때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봐.” 그렇게 몇 마디를 나누더니 정민이 내게 말했다. “엄마 오늘 숙제가 좀 늦게 끝날 것 같은데 연지도 같이 밥 먹고 가도 되지?”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와 사온 재료들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를 깨끗이 씻고 소고기도 물에 담궈 핏물을 뺄 때쯤 나는 정민이의 식습관이 떠올랐다. 먹다 뱉는 그 더러운 식습관을 연지에게 보여줄 순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황급히 연지에게 물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냐고. 연지는 내게 아무거나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자 정민이 연지는 닭볶음탕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연지는 수줍은 듯 웃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다시 장을 보러 마트로 갔다. 닭을 사러.
마트는 걸어서20분이 좀 넘게 걸렸다. 왕복 40분에 물건을 고르고 계산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한 시간 정도는 우습게 걸렸다. 우린 한 시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게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했을까. 나도 모르게 아들을 믿고 있었다. 내 자식이니까 나는 믿고 싶었다.
닭을 사들고 온 집은 고요했다. 침몰한 배처럼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재잘거리지 않았다. 대화를 하지 않을 만큼 공부에 집중을 한 것일까 나는 생각했다. 조용한 것은 대게 평화로운 것이니까 소리 없이 총을 쏠 순 없으니까 나는 모든 게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닭볶음탕에 필요한 재료들을 식탁에 꺼냈다. 고추장통이 냉장고에서 꺼낼 때 부터 너무 가벼웠다. 집엔 간장밖에 없었다. 나는 그냥 묻고 싶었다. 연지에게. 간장으로 만든 닭볶음탕도 괜찮은지 묻고 싶었다. 아이들이 배가 고플거 같아서 초조한 마음에 나는 나도 모르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내가 정민의 방문을 열었을 때 그 누구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내 귓가엔 정민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제발 노크 좀 하라고 씨발” 정민은 그런 험한 말을 나에게만 했다. 이 집에서 내가 서열이 낮은 사람이라는 것을 정민은 아주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듯 했다. 문을 잠궈 놓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남편 때문에 우리집 문은 잠금장치가 없었다. 나는 그걸 잊어버리고야 말았다. 그깟 닭볶음탕 양념 때문에. 문지방 너머의 정민의 세상을 아주 찰나의 순간 훑어보았다. 잘 정리된 책꽂이가 보였다. 아빠를 닮아 뭐든 제자리에 놓여있지 않는 걸 못 견뎌 하는 정민이었다. 3년 전 어린이날에 사준 카세트 플레이어도 있었다. 이어폰은 한여름 낮에 잠을 청하는 사자처럼 늘어져 있었다. 모두가 긴장에 얼어버린 그곳에서 그 사물만이 여유로워 보였다. 연지는 고장 난 스피커처럼 소리를 내지 못했다. 입엔 정민의 그것이 재갈처럼 물려있었다. 눈에 들어온 역겨운 광경 속에서 가장 역겨웠던 것은 정민의 크고 하얀 손이 연지의 머리채를 부여잡고 흔들고 있었다. 비단결 같던 연지의 머리카락들이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죽은 낙엽처럼 보였다.
남편과의 관계가 끝나면 남편의 손아귀에는 나의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있었다. 관계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머리채를 놓아주는 법이 없었다. 주변에 날 구타 할 것이 있으면 피가 나기 전까지 때렸다. 흉이 지지 않게 보이지 않는 곳에만 상처를 냈다. 정민이가 점점 커갈 때에는 내입에 휴지 뭉텅이를 집어넣고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지처럼 머리채를 잡힌 채로 남편의 성기를 애무해야했다. 목뒤로 성기가 넘어갈 듯이 남편은 내 머리통을 잡아 당겼다.
끔찍한 데자뷰 처럼 펼쳐지는 광경 속에서 나는 정신을 차렸다. 연지는 침대 아래로 쓰러져 넋이 나간 듯 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연지를 경찰서와 학교에서 몇 번 봤다. 나는 몇 번이고 연지와 연지의 부모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했다. 정민이는 나이가 어려서 벌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이런 저런 핑계들로 연지의 부모 앞에 나타나려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배운 남자였다. 의사였고 교수였다. 타인의 아래에 서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연지에게 사죄하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잘난 자존심을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다. 연지의 아버지 또한 교수였고 사회에서 힘좀 쓰는 사람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건의 도화선이 그려져 가고 있었다. 연지의 아버지는 결국 방송매체와 언론을 이용하여 정민이의 일을 세상 밖으로 터트렸다. 나는 겨울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풀잎처럼 하루하루 말라가고 있었다. 남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이제 추악한 남편의 부분을 보게 되었다. 존경받던 교수 사람을 살리던 의사에서 성폭행범을 낳고 기른 책임감 없고 도덕적으로 결여된 인간이 되어있었다. 아니 원래 그랬다. 사람들은 남편의 비도덕적인 모습을 알고 있었고 그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가지게 되었다. 다만 남편은 타인이 자신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단지 이 사건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남편은 교수직에서 물러나야했고 병원에서도 온갖 사람들이 찾아와 욕을 하고 위협을 가하는 덕분에 더 이상 의사노릇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교수여야 하는 사람이고 의사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매일 같이 자신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이 복종해야하고 자신에게 눈치를 보고 설설 기어야하고 자신의 말에 기분이 더러워져 모퉁이를 돌아서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 사람이 있으면 그 모퉁이 앞에 서서 그 사람에게 모욕을 줘야했다. 남편은 그것들을 못하니 욕구불만들이 쌓여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남편은 원래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쥐새끼는 쥐를 낳는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난다. 남편의 아버지도 폭력적이었다고 내게 항상 말했다. 남편은 몸에 크고 작은 흉터들이 있었다. 그건 모두 아버지에게 맞아서 생긴 것이라고 늘 슬픈 눈으로 말하곤 했다. 나는 신혼 초에는 그런 남편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남편은 아버지를 미워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이 그런 아버지와 너무나 닮아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입 밖 으로 쏘아지지 않는 총알처럼 장전되어 있었다. 가끔 그것에 대해 고등학교 동창인 경미에게 말을 하면 경미는 내게 말했다. 그냥 확 질러버리라고 입 뒀다 뭐하냐고, 나는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장에서 채소의 가격을 모르면 얼마냐고 물어볼 수 있고 초행길에 길을 모르면 어떻게 가야하냐고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좀 다른 문제였다. 시골집 개가 쇠사슬에 단단히 묶여 밥그릇에 얼굴을 쳐 박을 수 있는 거리까지 밖에 자유를 허락받지 못하는 것처럼 어떠한 물리적인 자물쇠가 내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정민이는 더 이상 동네에서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정민이를 외곽에 있는 학교로 보내야했다. 그것마저도 쉬운일은 아니었다. 너무나 불미스러운 일이었기에 나는 정민이가 다닐 수 있는 학교를 어렵게 찾아냈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정민이의 마음이었다. 정민이는 학교에 다니지 않겠다고 했다. 정민이는 더 이상 입지 않을 교복을 태우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날 마당에서 정민이의 교복을 태웠다. 하늘로 까만 연기가 올라갔다.
침대에 풀이 죽어 잠이든 정민이를 보자 나는 깊은 고민에 잠겼다. 연지의 사건이 있었고 나는 무릎과 손이 닳도록 용서를 빌었고 마음에 무거운 짐 하나를 들여다 놓았다. 그리고 정민의 이야기가 세상밖으로 나갔고 남편이 직장을 잃었다. 그리고 정민이는 학교에 가지 않았다. 폭풍같은 일들을 지나쳐오고 나니 내내 직시하지 못했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 정민이를 품어줄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사람의 모습을 정민이에게서 봤다. 물론 그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언제나 지 애비처럼 자신의 물건을 건드는 걸 극도로 싫어하고 별것도 아닌 일에 쌍욕을 하며 날을 세우고 나를 무시했다. 밥을 먹을 때 김을 두 장씩 싸먹는 것도 겉절이가 아니면 안쳐먹는 것도 꼭 한 숟가락씩 남기는 그 거지 같은 식습관도 남편과 똑 닮아도 감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니 나는 가슴으로 그런 부분들을 묻으려했다. 그러나 흰 바탕에 빨간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은 강렬한 그 기억은 번개가 치듯이 번쩍 번쩍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마늘을 까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고구마를 두 박스를 사서 모두 쪄서 얼렸다. 빨래를 게고 베란다의 타일 틈새를 칫솔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온갖 짓을 해도 내 아들이 남편처럼 보였다.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의 파편들은 내 머릿속에서 지 멋대로 조합되었다. 남편의 성기를 빨고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위를 바라보면 정민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미쳐가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남편 서재에 있는 책을 우연히 본적이 있었다. 드물지만 30대에도 치매가 발생한다고 했다. 그날 티브이를 보다 국을 끓이던 냄비를 태웠을 때 내가 치매가 아닌가 하고 무서워 한 적이 있었다. 안 그래도 남루한 내 삶이 더 남루해질까봐 치매라는 불행이 올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나는 빌고 있었다. 제발 그 불운이 나에게 왔으면. 그러나 내 인생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것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민이와 아침밥을 먹는데 정민이의 턱이 거뭇거뭇했다. 수염이 나고 있었다. 밥을 다 먹은 정민이는 일어나서 방으로 갔다. 그 뒷모습을 보는데 키가 더 자란 것 같다고 느꼈다. 정민이의 시간이 부지런히 흐르고 있었다. 점점 더 나이가 들면 남편과 더 닮을 텐데. 나는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밥상을 치웠다. 정민이가 더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지금의 남편만큼 나이든 모습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 전에 내가 먼저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분명 내가 먼저 사라지기를 빌었고 그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정민이는 죽어있었다. 굳이 내가 사라지지 않아도 나이든 정민이를 마주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주님 이 상황을 축복이라고 봐야할까요?”
살인자매
차가운 데스크 앞에 앉은 앵커는 범죄심리학 교수 최윤석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최윤석씨 요즘 최경란 살인사건이 화두에 올랐죠.” 최경란 살인사건은 평범한 40대 주부인 최경란이 남편 박춘식을 칼로 찔러 살해 한 후 팔과 다리 그리고 목을 토막 내고 입에 칼을 찔러 넣은 잔인한 사건이었다. 최경란은 남편 박춘식이 수년간 폭행해 왔고 결국 가정폭력에 견디지 못해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살해 후 시체를 잔인하게 훼손한 후 자택이 위치한 평창동에서 한참 떨어진 경기도의 한 야산에 유기한 점 그리고 부검 결과 남편의 체내에서 수면제 성분이 발견된 것을 근거로 남편의 재산을 노린 최경란의 치밀한 계획살인 이라는 근거를 내세웠다. 또한 가정 폭력에 시달렸다고 하기엔 둘 사이엔 아이가 없고 유일하게 함께 살던 남편의 친동생은 40살이 넘었지만 심각한 정신지체로 5살 아이의 지능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남편의 폭행 증거가 오직 최경란의 증언 뿐 이라는 것이 최경란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교수는 갑자기 정신과적으로 조현병의 유전 확률이 굉장히 높고 인간의 잔인한 성향도 유전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그럼 최교수님 말대로 라면 어쩌면 살인을 저지르는 디엔에이 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앵커는 교수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물었다.
“최경란의 쌍둥이 언니가 불과 1년 전 남편과 아들을 살해하고 복역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 지요?
가정폭력에 시달렸다는 것도 최경란의 단독적인 증언입니다.“ 오랜 시간 가정폭력에 시달려왔다는 최경란의 주장은 더욱 더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혼
실로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속이 안 좋다던 엄마를 모시고 몇 번 동네 내과에 다녔는데 진료를 봐주시던 손이 고운 의사 선생님이 고등학생이던 나에게 고백을 했다. 고백을 받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나는 성인이 되었고 임신도 하게 되었다. 요즘 것들이야 이해 못 할 수도 있지만 옛날엔 나이 많은 남자랑 결혼 하는 게 크게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 져버린 우리 집 에서 의사 사위를 얻게 되었는데 그 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사람일이 풀리려는지 결혼식장에 온 내 쌍둥이 여동생에게 남편의 둘째 동생이 반했고, 당시 의사고시를 앞두고 있던 도련님은 의사가 되자마자 내 동생 경란이 에게 청혼을 했다. 자신의 전부인 딸 둘을 모두 의사에게 시집보낸 엄마는 우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힘들게 우리를 키워온 시간들을 보상 받은 것 이라고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세상은 동화처럼 힘든 시기가 있으면 행복한 시절이 오는 거라고, 누구에게나 상냥했던 엄마 뜨거운 물을 허벅다리에 쏟아 부어도 실수니 괜찮다고 웃으며 날 더 걱정하던 경란이 우리 모녀는 너무도 닮아있었고, 항상 그 선함은 언젠간 행복의 결실로 돌아올 것 이라고 믿었다.
경란의 결혼 생활
언니의 결혼식장에서 도련님을 처음 보았다. 도련님은 나보다 2살이 많았는데도 너무 아이처럼 보였다. 도련님은 20살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무슨 사고인지는 나는 모른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서 5살 아이의 지능으로 평생을 살게 되었다. 도련님은 남편보다 6살이나 어렸다. 부잣집 늦둥이로 태어나 살아온 것 치고는 얼굴에 짙은 그늘이 깔려있었다. 처음에는 사고 이후로 그렇게 그늘지게 된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부모를 다 잃고 자신도 어린아이가 되어버렸으니 스스로가 바보가 되어버린 현실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도련님 얼굴에 진 까만 그늘은 어느새 내 머리위로 슬슬 덮여오고 있었다.
우리가 결혼 한지 7년쯤 지나자 사람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질문을 던지는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질문이 아주 가볍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것엔 동의한다. 질문은 가볍게 던져졌다. 다만 질문에 가시가 돋쳐 있었다. 밤송이처럼, 그것들은 따끔거렸다. 가슴에 생채기를 냈다. “아이가 없어요?” “아이는 언제 가지시려고?” “혹시 문제 있어요?”
저런 질문들을 듣고 애써 주제를 전환하려 다가 눈물을 흘리는 날보고 사람들은 용서를 구했고 위로를 해줬다. 사람들은 내가 남들은 다 낳는 애를 못 가져서 엄마로서 느끼는 행복을 느끼지 못해서 분하고 슬퍼서 운다고 생각했다. 나는 오히려 아이를 낳은 언니가 불쌍했다. 정민이는 점점 커가면서 형부와 내 남편을 닮아갔다. 커다란 귀와 짧은 목이 특히 닮았다고 느꼈다. 툭하면 언니를 가르치려 들고 못된 말을 할 때엔 남편과 너무 닮아서 언니가 내 남편과 바람을 폈나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형부를 보면 형부의 말버릇이 정민이와 똑 닮아있었다.
나는 자의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으로 만들었다. 신혼 초 임신이 되었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려 했다. 근데 그날 남편은 이상 하리 만치 늦게 들어왔다. 자정이 넘은 시각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은 나를 침대에 눕혀 짐승을 대하듯이 나를 범했다. 싫어하는 기색이 보이면 싸대기를 때리거나 주먹질을 했다.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 전엔 그냥 좀 욱하는 성질이 있겠거니 싶었고 그래도 내게 금방 사과하고 선물을 사줬다. 그래서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남자를 한 번도 만나 본 적도 없고 아버지는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고 엄마는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눈물을 흘려서 나는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몰랐다. 그래서 난 남자들은 원래 좀 욱한다는 남편의 말을 믿었다. 생각해 보면 학교 다닐 때 남자 선생님들은 다 무서웠으니까. 그래서 결혼 전에 언니가 내게 혹시 춘식씨가 너에게 못되게 굴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언니에게 말할 만큼 커다란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그런 일은 없다고 말하며 춘식씨가 사준 선물들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게 최경란은 박춘식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후 남편은 연애 때 보다 더 사소한 것들에 욱하기 시작했고 사과 하지 않기 시작했고 점차 시간이 더 지나자 가끔 나를 때리려는 듯한 손짓을 하기도 했다. 그것들은 서서히 내안에서 무뎌지며 오늘은 때리려는 손짓은 하지 않고 욱하기만 했네, 또는 오늘은 어제보다 좀 더 괜찮은 이유로 화를 냈어, 라고 생각하며 남편을 이해하려했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현명한 아내의 모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어이 남편은 나를 패기 시작했다. 술을 먹고 오면 더 심해졌고 가끔 상사에게 혼이라도 나는 날엔 온 집안의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러던 중 나는 임신을 했고 이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면 남편이 나를 더 이상 때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임신 사실을 말하려던 밤 남편은 나를 사정없이 구타했고 나는 그런 끔찍한 남편의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내 머리통을 발로 찰 때 나는 뱃속의 아기를 떼어버리고 싶어서 남편의 발길질이 닿는 곳에 배 쪽을 들이 밀었다. 얼마나 맞았을까 피가 많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남편이 물을 마시러 간 사이 나는 새벽에 119를 불렀다. 대원들이 들어오자 남편은 술에서 깬듯했다. 자궁은 파열 되어 있었고 아이는 처참하게 죽었을 것이고 나는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그리고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의 말을 들었을 땐 더 이상 남편을 사람으로 볼 수 없었다. “등신 같은 년 요령껏 피하지 경찰에 잡혀갈 뻔 했잖아”
그래서 임신 관련 질문을 받으면 그때 유산된 아이가 불쌍해서 눈물이 나는 게 아니라 죽을 만큼 쳐 맞던 내가 생각이 나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불임 판정을 받자 친정엄마는 이유도 모르고 아들도 못 낳는 나쁜 자궁을 내게 물려줘서 내가 아이도 갖지 못하는 거라며 모두 자기 잘못이라며 남편에게 무릎 꿇고 빌었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남편에게 맞아서 내가 죽을 뻔 했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나는 잘 살고 있다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의사의 아내가 돼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으니 엄마는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의 인생이 더 이상 슬퍼지는 게 싫어서 나는 해야 할 말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했다.
남편은 애를 갖지 못하는 나를 몇 번이고 버리려고 했다. 밖에선 매일 같이 여자를 만나는지 항상 늦었고 립스틱 자국이나 여자 머리카락 향수 냄새 바람을 피는 남자들 이라면 한번 쯤은 들키는 것들을 내게 모두 들켰다. 그러나 나는 그를 탓할수 없었다. 나는 그냥 투명인간 이었다. 그가 집안에 들이고 싶은 여자들은 나이 먹은 어린아이를 돌보고 싶지 않아했다. 그래서 동생인 강식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나를 그냥 집에 뒀다. 남편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강식씨 만큼은 사람 취급을 해줬다. 남편의 폭행은 무서웠지만 이혼을 당해서 엄마한테 가는 건 더 무서웠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내가 이 집에서 쫓겨나면 거리에 나 앉아야 될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나는 남편이 주는 생활비와 강식씨를 돌봐주는 비용을 조금씩 빼내서 엄마를 도왔다. 그 돈에 손을 댈 때마다 심장에 뜨거운 물을 쏟아 붓는 것처럼 가슴 졸였지만 엄마를 찾아갔을 때 의사 사위가 좋다며, 내 딸이 행복해 보여서 좋다고 말하는 엄마 때문에 나는 그 삶을 포기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앞에서 행복한 척 근심 없는 척 좋은 남자와 사는 척을 하는 것은 남편에게 발길질을 당할 때 울음을 참는 것 만큼 힘든 일이었다.
강식씨가 아팠다. 변을 보고 나왔는데 변기가 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남편은 강식씨 몸에 큰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나와 강식씨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강식씨는 장에 종양이 생겼고 그것을 수술하기 위해 피검사를 해야 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의 냄새가 기억난다. 병원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 가끔씩 칼이나 종이에 손을 베서 알코올로 손을 소독할 때엔 그날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강식씨는 뾰족한 주삿바늘이 자신을 찌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면 주사기로 자신의 피를 빼낼 때 강렬하게 저항했다. 강식씨는 어린아이였지만 남편과는 다르게 착한 마음씨가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강식씨를 가까이서 오래 봐서 그것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남편과 같은 핏줄을 공유하는 것이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 그늘진 눈빛 너머엔 감출 수 없는 선함이 있었다. 그런 강식씨가 피를 뽑던 간호사를 밀쳐내고 주사기를 뺐었다. 그러곤 다시 주사기에 빠진 피를 자신의 팔에 주사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런 강식씨를 남편이 저지했고 몸싸움이 번졌다. 그러던 중에 주사기에 남은 피가 흩뿌려져 바닥에 떨어졌다. 강식씨는 울면서 바닥에 떨어진 피를 핥았다. 한 방울의 피도 뺏기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강식씨가 모기를 싫어하고 가끔 다쳐서 피를 흘릴 때에 엉엉 울던 적들이 생각이 났다. 여름에 문을 열어 모기가 한 마리라도 들어와 앵앵 거릴 때엔 내게 짜증을 내던 것도. “강식이 피는 너무 깨끗해서 모기가 맛있어해! 빨리 닫아 무운!”
언니를 교도소에 보내고 엄마는 실신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앓던 지병까지 겹쳐서 돌아가셨다. 내 연극을 보던 유일한 관객이 사라져 버리니 나는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행복한 척을 해야 할 이유도 없는 말들을 지어낼 필요도 없어져 버렸다. 나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처참하게 휩쓸리고 있었다. 남편은 내게 네 년의 언니와 같은 피가 흐른다며 징그럽고 무섭고 더럽다며 나를 때리고 괴롭혔다. 나는 남편에게 맞으면서 뜨겁고 두터운 눈물을 흘렸는데 그것은 엄마를 잃은 슬픔이 가슴을 짓이기는 것 보다 쓰레기 같은 놈에게 얻어터지는 아픔이 더 컸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바보 같아서 눈물을 흘렸다.
남편은 내게 언니를 닮아 자신을 곧 죽일 유전자가 내게도 똑같이 흐르고 있다고 말하며 날 멸시했다. 나는 그것에 크게 분노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사람 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편에게 30만원을 받고 집에서 쫓겨난 후 언니가 있는 교도소 근처 모텔에서 숙식을 제공받는 대가로 일을 했다. 나는 정신적 스트레스로 잠을 청하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해서 모텔 방에서 쓰러져 있었는데 그때 모텔 주인이 나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병원에선 내게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다. 자살위험 수준이 나온 나에게 의사는 우울증약과 강한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다. 약효는 신기했다. 우울증 약은 빌어먹을 약장수가 준 약 마냥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수면제는 달랐다. 내 몸의 영혼이 작은 병 안으로 빨려 들어가 잠기듯 잠에 들어 버렸다.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귀신 같이 나를 찾아왔다. 강식씨가 요양시설에서 적응을 하지 못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집에 와서는 나만 찾았다고 했다. 두 번째 이유는 가정부가 돈과 귀증품을 훔친 이후로 모르는 사람을 집에 들이는 게 무섭다고 했다. 남편은 당연히 내가 집에 다시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어투와 태도로 나를 집으로 끌고 갔다.
강식은 경란을 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거실에 강식의 오줌까지 흘러들어왔다. 경란은 울고 있는 강식을 달래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강식씨 내가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강식은 자신에게 늘 친절했던 경란의 말에 다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아래에 숨어 울었다. 경란은 강식의 울음소리를 뒤로하고 춘식의 심장을 한 번 더 찔렀다.
나는 남편의 심장을 10번 정도 찌른 후에 생긴 구멍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심장이 찢겨 더 이상 뛰지 않는 걸 확인했다. 그럼에도 나는 남편이 무서웠다. 언제든지 벌떡 일어나 나를 때리고 욕설을 퍼부을 것 같았다. 나를 패지 못하게 나는 팔을 잘랐다. 팔을 잘라버리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 졌다. 그래서 나는 이 집에서 도망갈 채비를 했다. 귀증품을 쓸어 담고 망치로 남편의 금고를 때렸다. 그러던 중 인기척이 들리는 듯 했다. 뒤를 돌아보니 창문 틈새로 지나가는 저녁 바람이었다. 혹시나 남편이 살아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오싹해졌다. 창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내 온몸이 얼어버릴 것 같은 추위를 느꼈다. 나는 불안해서 금고를 부술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깨어나도 내게 달려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자르고 나를 찾지 못하도록 눈알을 파내 변기에 버렸다. 화장실에서 돌아와서 처참해진 남편을 보는데도 뭔가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욕을 할 것 같은 남편의 입에서 혀를 꺼내 잘랐다. 나는 시체를 거실로 치우고 마음 편하게 금고를 부쉈다.
강식씨는 다시 나를 찾았다. 강식씨의 순한 얼굴을 보자 대체 내가 무슨일을 저질렀는지 싶어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강식씨를 끌어안고 같이 울었다. 울면서 소리쳤다. “강식씨, 나 아주 어렸을 때 마당에 키우던 강아지가 죽어서 펑펑 울었어, 이런 사람 아니야” 강식씨는 더 크게 울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 너머로 이 잔인한 현실을 도피하려 애썼다. 같은 반 친구가 다리를 다쳤을 때 내가 업어서 양호실까지 올라갔었는데 벌레 한 마리도 무서워서 못 잡던 나였는데 어쩌다 이렇게 잔인한 악마가 되어있는 건지 몰라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뉴스에서 살인범들은 사람들을 죽이고 자살한다는데 나는 엄마를 보러 갈 자신이 없어서 죽는 것도 무서웠다. 울음이 좀 사그라들자 강식씨는 내 손과 몸을 흥건하게 적셨던 피들이 너무 더럽다며 욕실로 가서 내게 마구 물을 뿌렸다. 춘식이 형 피는 더러운 피니까 얼른 씻어내야 한다고.
춘식 그의 형 박한식 그리고 그들의 동생 박강식
저 자식은 뭐가 좋다고 만날 실실 거리는지 나만 보면 웃으면서 ‘형아’ 하고 불렀다. 나랑 형은 개가 시끄럽게 짖으면 돌을 던졌다. 그러고 뒤를 돌아보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식이는 강아지를 안고 쓰다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나는 꼴 보기가 싫었다. 멀대 같이 큰 키에 계집애 마냥 적게 먹어 삐쩍 마른 몸, 쌍커풀 짙은 큰 눈까지 강식이 그 놈은 우리랑 다르게 엄마를 많이 닮아서 그게 싫었다.
형은 나랑 싸우면 항상 형이라는 이유로 아빠한테 맞았다. 그래서 밤이 되면 아무도 몰래 형에게 매일 맞았다. 성적이 떨어져 아빠한테 혼나면 네가 밤에 코를 골아서 내가 성적이 떨어졌다며 나를 때렸고, 밥을 먹을 때 맛있는 반찬을 내가 하나 더 집어 먹는 건 형을 무시하는 행위이니 너는 맞아야 한다고 했다. 형에게 쳐 맞고 울 때 마다 강식이는 내게 사탕 같은 걸 쥐어주곤 했다. 그럴때마다 ‘울지마 형아’ 하면서 걱정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는 강식이의 귀여운 얼굴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사고 후 아이가 되어버린 강식이를 볼 때 마다 나는 그 날이 생각나곤 했다.
아빠는 강식이는 나랑 형이랑 다르게 멍청하다고 지 애미를 닮아 모자라다고 강식이를 싫어했다. 지 자식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며 강식이가 조금 큰 이후로는 골프채로 강식이를 쥐 잡듯이 잡아 팼다. 그걸 말리던 엄마가 몇 번 맞곤 했다. 그럴 때 마다 형은 엄마를 욕했다. 저년은 내가 쳐 맞을 땐 가만있더니 강식이 저 새끼만 예뻐한다고. 엄마는 정말 강식이를 더 예뻐하긴 했다.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강식이 놈은 엄마에게 항상 예쁘게 말하니까.
삼형제의 엄마
광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하루 종일 외줄을 타는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언제 어디서 터져 나올지 모르는 남편의 고함 소리에 맘이 편한 날이 하루도 없었다. 그럴 때 마다 귀엽게 자라나는 두 아들들이 좋았었는데 점점 자라면서 아들놈들 얼굴에서 남편의 얼굴이 보였다. 남편의 귀처럼 두툼하고 큰 귀가 남편의 아들인 걸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해서 더 무서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큰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거리를 뒀던 것 같다. 그게 문제 였는지 커갈수록 두 놈은 남편이 날 대하듯이 막대했고, 그 외의 부분들도 남편을 닮아갔다. 말하는 것도 먹는 식성도 괴팍한 행동도 가끔 내게 보이는 뒷모습에서 보여 지는 걸음걸이도.
큰아들 한식이는 유독 막내 강식이를 구박했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 때마다 한식이는 엄마라는 년이 자식새끼들 차별하는 거 아니라며 나를 나무랐다. 나보다 더 키가 커졌을 때는 나를 때리기도 했다. 내 속으로 낳았지만 난 내 자식이 무섭고 끔찍했다. 더 끔찍했던 것은 그나마 착한 강식이도 저렇게 괴물처럼 변해갈 것 같아서 더 무서웠다. 그러나 강식이 만큼은 달랐다.
여름 하늘은 비가 쏟아질 듯 울먹거렸다. 곧 비는 쏟아졌고 나는 어김없이 남편의 폭력을 견디고 있었다. 주방에선 시아버지 제사에 쓸 수육이 끓고 있었다. 남편에게 맞는 와중에도 나는 그 수육이 신경 쓰였다. 된장 냄새가 점점 진해지고 고기 냄새가 나는 걸 보면 이제 다 익은 건데 이렇게 맞다가 저 수육이 질겨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다. 그럼 또 제사상을 뒤엎고 또 맞을지도 모르는데. 방바닥을 질질 기다가 툇마루에 엎어져서 땅바닥을 바라보니 시집갈 때 엄마가 사준 꽃신이 보였다.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내 쿰쿰한 냄새가 나던 돈을 갓난아기를 안은 것 마냥 꼬옥 껴안고 읍내에 가서 사주신 신이었다. 좋은 곳으로만 걸어가라던 엄마의 말이 떠올라 쏟아지는 비보다 더 크게 울었다.
그날 밤 나는 제사를 끝내고 술에 거하게 취해 잠든 남편 몰래 집을 나왔다. 새벽엔 개구리 우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릴 만큼 고요했다. 반딧불이 하나 날아들지 않는 시커먼 시골의 새벽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고 불안하지만 확신도 있었다. 엄마가 신겨준 꽃신을 신고 도망쳤으니까. 그렇게 나는 집을 멍든 얼굴을 한 채 파주에 사는 고향 친구의 집으로 갔다. 거기서 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 남자와 미래를 약속하기엔 불안 했지만 행복한 상상들로 그런 불안감을 이겨내려 애썼다. 남편이 날 찾지 못하게 제주도로 도망가 살다가 배를 타고 외국으로 도망쳐 구부렁거리는 서양의 말씨을 쓰는 사람이 돼서 이제까지 겪었던 일들은 모두 없던 일인 것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너무 신이 났던 거였을까 내가 너무 방심했던 것이었을까 집을 나온 늦여름에서 해가 지나 다시 초여름이 왔을 때 나는 사랑에 빠진 남자와 노느라 엄마가 준 꽃신을 계곡물에 흘려보내고 말았다. 맨발로 그 사람 등에 업혀 집에 돌아가던 길 우리는 제주도로 떠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때 그 사람이 날 업고 제주도 까지 뛰어갔다면 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꽃신은 떠내려갔고 그 사람을 나를 집 앞에 내려주고는 뒤따라오던 가게 사장의 차를 타고 읍내로 갔다. 그게 그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엔 이미 남편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껏 잘 숨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게 남편에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났을까 나는 떠나기 전보다 더 괴로워 졌다. 동네 곳곳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다시 도망을 갈까봐 나를 감시했다. 나는 그 어느 곳도 갈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육체를 버리더라도 내 영혼만이라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 곁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죽으려 했는데 그때 알았다. 내 뱃속에 생명이 들어섰다는 것을. 나는 그것이 남편의 씨앗으로 길러진 것이라고 생각해 죽여 버리려 했지만 혹여나 그 사람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그 아이를 품기로 결심했다. 아이를 품고서는 하루에도 열두번씩 기분이 바뀌었다. 조금이라도 아이의 움직임이 격하면 남편의 아이인가 싶어서 불결하고 더럽게 느껴져 손이 벌벌 떨렸고 아이가 차분히 나를 안아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엔 그 사람의 아이인 것 같아서 그 사람이 그리워 펑펑 울었다. 그렇게 나는 막내아들 강식이를 낳았고 처음엔 누구의 아이인지 몰라 불안하기도 했지만 강식이는 커갈수록 그 사람을 닮아가고 있었다. 잠이 든 옆모습엔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엄지손가락이 넓적한 것도 손재주 많던 그 사람의 손을 닮아있었다.
박강식으로 살기 싫은 날의 이야기
아버지는 눈에 띄게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더러운 성질은 늙지 않았다. 오히려 더 괴팍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 젊을 땐 체력이라도 따라줬지만 이제는 제 몸이 제 몸 같지 않으니 더 화가 날 수밖에.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날 싫어했다. 자신을 닮지 못해 내가 멍청해서 자기 자식인 게 화가 나고 쪽팔린다고 말했다. 그럴 때 마다 아버지는 내 귀를 부여잡고는 귓불이 얇은 게 가난하고 멍청하게 살 팔자로 태어났다고 했다. 나는 실제로도 형들처럼 똑똑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것이 좋았다. 아버지와 형들처럼 크지 않고 얇은 귀도 좋았고 그 셋과 다르게 목이 길어 학교에서 가끔 기린이라고 불려 지 던 그 별명도 좋았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것이 내겐 아주 작은 행복이었다. 아버지는 밥을 먹고 일어나다가 휘청거렸다. 그때 바로 옆에 앉아있던 내가 잽싸게 일어나 아버지를 부축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재수 없는 새끼라고 욕을 하며 나를 밀쳤다. 나이도 들었지만 당뇨 합병증으로 투석을 받던 아버지는 나를 밀쳐도 밀친 것 같지가 않았다. 나는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패기라는 것이 생겼는지 옅은 욕을 내뱉고야 말았다. 이만하면 싸워 볼만 하다는 것이 내 이유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나를 패려고 손을 올렸고 엄마는 이미 내 옆으로 와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내렸다. 태어나 처음 해본 반항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고 오줌을 쌀 것 만 같았다. 그러나 필사적으로 참아 내야했다. 상대에게 내가 겁을 먹은 모습을 보여선 안 되기에.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엄마를 욕하기 시작했다. 나를 잘 못 키웠다고 그리고 애새끼가 저렇게 아버지한테 대들고 싸가지 없는 게 꼭 너를 닮았다고 그때 아버지는 엄마의 머리채를 낚아채서 엄마를 던져버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진 엄마는 식탁 모서리에 머리를 박은 채 쓰러졌고 피를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를 죽였다. 엄마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구급차에서 엄마는 내게 너의 친아버지는 따로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이후로 엄마는 의식을 찾지 못했고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나는 구급차에서 내리자마자 차도에 몸을 던졌다.
고투족의 족장은 결단을 내려야했다. 더 이상 무리 내에서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싸움은 여러 이유로 발생했지만 싸움을 시작하게 만드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싸움에서 패한 사람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은 귀가 큰 남자는 듣지 않고 제 말만 한다는 말이었다. 족장은 이른 새벽 아직은 잠자리에 든 무리의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사람들을 깨워 광장에 모이게 했다. 그리고 귀가 큰 남자를 찾아가서 그 남자를 나무로 엮은 포대에 싸서 절벽 밑으로 버려버렸다. 고투족 사람들은 무리에 스며들지 않고 늘 분란만 일으키는 남자를 버려버린 기념으로 마을축제를 벌이기로 했고 모든 사람들이 음식준비에 빠져있을 때 절벽아래에 버려진 남자의 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