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삼류 Mar 02. 2024

고백

고백      

         

       에필로그


가끔 생각해보면. 싫어도 아무 말도 못하는 내 성격이 막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인턴같아 보이는 어린 역무원이 잘못 끊은 티켓, 이미 시간이 지나 어쩔수 없이 빨리 떠나게 된 베니스에서 승주를 만났으니까. 승주는 내가 탐내기엔 참 멋진 남자였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좋은 대학에 다닐만큼 똑똑했다. 내가 사는 굴레에서 볼수 없는 사람이었다. 승주는 내게 친절했다. 승주는 덴마크에서 교환 학생을 하고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왔다고 했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승주처럼 멋진 남자를 이역만리 떨어진 유럽까지 오게 만든 그 여자가 궁금하고 미치게 부러웠을뿐, 근데 그건 승주의 여친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키크고 잘생기고 똑똑하고 성격도 좋은 남자를 남친으로 둔게 부러울 뿐이었다. 저 조건과 대충 비스무리하면 그게 승주가 아니여도 난 부러웠을거니까. 승주와 여행지에서 헤어지고 벌써 10년이 지나간다. 근데 난 가끔,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자주, 승주를 생각한다.      

     1     

 법원에서 이혼하던 날 나는 생각했다.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을거라고, 애초에 결혼이 내게 어울렸던게 아니었다고,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났고 그 여자가 미치게 좋다는 남편, 그는 그건 사랑이라고 말했다. 상간녀와 주고받은 연락들을 보면, 21세기 세익스피어가 따로 없는 명문들이었다. 불륜을 저지르는 주제에 이렇게 절절해도 되는건지, 작가라는 내 직업이 민망할만큼 남편은 로맨틱하게 글을 잘썼다. 하마터면 남편에게 내 밑에 문하생으로 들어와 보지 않겠냐고 제안을 할뻔 했으니 말이다. 남들은 모두 나를 불쌍히 여기고 내 남편을 욕했지만 나는 우진씨를 욕하지 않는다. 그가 바람필만 했으니까. 우진씨도 처음부터 그랬던건 아니었다. 다만 살다보니 그렇게... 불륜을 정당화 할순 없지만 내 남편의 불륜은 그럴수 있다고 나는 말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와 잠을 자지 않았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잠자리가 싫었고 하루 이틀 피하다 보니까 점점 더 멀어졌다. 애가 닳아 보이던 남편도 어느 순간 부턴 보채지 않았다. 그때부터 였던 것 같다. 남편이 밖으로 돌기 시작한게, 나는 남편을 이해한다. 마음도 몸도 주지 않는 여자와 사는건 지옥이었을 테니. 남편도 나도 좋은 사람이다. 다만 우린 결혼하지 말았어야했다. 

 “그래서, 일은 계속 하려고?” 박팀장이 말했다. 박팀장은 날 인간으로서 좋아하는 몇안되는 회사 동료다. 말투에 걱정과 우려 짜증이 한꺼번에 들어있으니까. 전남편과 함께 회사에서 일을 한다는게 도통 이해가 안간다는 말투로 나보고 관두든 그 불륜남이 관두든 양자택일을 하라고 떠들어댔다. 나는 개인의 일을 회사로 끌고 올 이유는 없으니 그냥 다니겠다고 말했다. 박팀장은 내게, 가끔보면 또라이같은 면모가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서는 씩씩해서 보기 좋다며 웃어보였다. 그렇게 며칠 회사에 나와 우진의 이야기가 돌았지만 난 신경쓰지 않았다. 근데 그날은 좀 참기가 힘들었다.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 우진씨의 식판에 이사님이 와서 커피를 부었다. 서이사님은 예전부터 내가 좋아하던 분이었다. 항상 보면 옛날 여자같지않게 배운티가 팍팍나고 세련된 도시적인 느낌이 항상 닮고싶었다. 그녀는 친절하면서도 카리스마있었다. 다만 딱 한가지 그녀에게 없는건 남자 보는 눈이었다. 그런 멋진 여자를 두고 그녀의 남편도 바람을 폈으니까, 서이사는 그 이유 때문에 바람 피는 남자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래서 소문이 돌기 무섭게 서이사의 귀로 들어가자 그녀는 요즘 말로 ‘참교육’을 시전했다. 사실 못본척하고 지나갈까 했다. 괜히 일을 더 키우는 것 같아서. 지루한 회사에 드라마에 나올만한 일이 벌어지니 연예인 만큼의 이목을 끌고있는 우진이 보였다. 상사의 만행에 어떠한 반박도 할수없으니까. 억울하긴 해도 바람을 핀건 사실이니까. 근데 그러지 말았어야했는데, 나는 죄인처럼 식판이나 보고있는 우진, 그리고 마치 자신의 남편에게 해야할 악독한 말을 우진에게 쏟아내고있는 사이로 가서 우진을 끌고 나왔다. 나는 화가났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사람들에게 화를 냈는지도 모른다. 우진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거니까... 나는 사람들이 우진을 욕해주기를 바라지않았다. 우진이 바람폈다고해서 내가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멋대로 나를 불쌍한 여자라고 말했고 우진을 희대의 쓰레기라고 욕했다. 나는 그 어떤 반박도 변명도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연예인 이었으면 기자회견이라도 열고싶은 심정이었으니까, 나는 서이사에게 말했다. “그런 악독한 말은 이사님 남편에게 하세요. 애먼 부하직원 욕하지 마시구요.” 그날로 나도. 우진씨도 모두 일을 그만 뒀다.      

 나는 우진에게, 맘껏 사랑하고 사랑받으라고 말했다. 우진은 듣는둥 마는둥 내 앞에서 국밥이나 퍽퍽 퍼먹으며 내게 승주 이야기를 꺼냈다. 잠시 멈칫했고 나는 꽤 크게 당황했다. 늘 생각하지만 너무 멀리있는 이름이었다. 우진은 계산을 하고 나가면서 내게 말했다. “진짜 끌리는 곳으로 가, 그리고 말해 좋아했다고.” 우진이 떠나고 한참이 지날때까지도 나는 우진의 말을 되뇌었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집에 가는 길에서도... 엘리베이터에서도... 우진과의 이혼으로 인해 큰 마음의 상처는 없었지만 그래도 인생에선 꽤나 큰 이벤트였다. 그래서 승주의 생각을 조금은 멀리 하고있었는데, 7일간 함께 베니스를 여행한 승주는 나에겐 강렬한 인격체였다. 보고싶었다. 승주가. 참 웃긴건, 승주는 나와 여행을 끝 마친 이후로 단 한순간도 내 생각을 안할거라는 확신이 내게 있었다. 또한 단 둘이 마주친대도 승주는 내 이름도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심지어 승주를 만났던 10년전의 시절은 내가 가장 우울했던 시기이기도하다. 굳이 승주가 날 기억해준대도 나에겐 좋을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승주의 머릿속 한켠에 자리를 잡고있고 싶은 욕심이있었다. 승주의 따뜻함이 너무 좋아서, 물론 단정하고 잘생긴 그 얼굴도.      

 새로운 일이 시작되었다. 승주라는 파도가 내 머릿속을 강하게 휩쓸었대도. 그는 그냥 내가 살아온 만일이 넘는 순간중에 고작 일주일정도니까, 가벼운 음주와 쓰러지게 웃긴 예능, 내 오감을 자극할만한 영화한편에 승주는 날아갔다. 나는 라디오 작가일을 시작했다. 제작사에 있으면서 드라마를 썼지만, 이혼 이후로 나는 사랑 얘기를 주로 다루는 로코나 멜로를 쓰기 싫었고, 미드같은 강렬한 장르물을 쓰고싶엇다. 장르를 바꾼다는 건 힘든 일이기에 내겐 시간이 필요했고 나는 돈도 벌면서 천천히 장르물을 공부하고 싶었다. 라디오 일은 내겐 적격이었고 보수도 나쁘지않았다. 발빠르고 입 가벼운 방송판이지만 내가있던 드라마 제작사 판과 라디오 판이 꽤나 멀어, 내가 장르물을 공부하는 동안은 소문이 여기까지 퍼지진 않을것같았다. 공부가 끝날쯤에 도착할 것 같았으니 더 좋았다. 사연들을 읽는 재미도 상당했다. 드라마작가 출신인걸 숨기고 그저 늦깎기에 문창과에 들어간 나이든 중고신인처럼 일했다. 각본을 잘쓴다고 칭찬을 받으니 그것도 그것대로 좋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나는 떠들썩한 일들에서 멀어져갔다. 유명한 미드를 보고 필사하고 분석하고 시간에 맞춰 라디오 대본을 쓰고... 그냥 색다르진 않아도 즐겁게... 관성에 묻어진채 평화롭게, 그러나 그건 오래가지 못했다. 디제이가 바뀌면서 청취율이 크게 떨어졌다. 일부러 바꾼것도 아니고 그저 아침 라디오에 밥먹듯이 지각하는 디제이가 도저히 못일어나겠다며 자진 퇴사 했을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리 지각을 해도 그 디제이가 좋다는 거였다. 아니, 다늙어가지고 한물, 아니 한 다섯물은 간 히트곡 꼴랑 하나 있는 옛날 아저씨 가수를 왜 그리 놓아주지 못해 안달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회식 때마다 왕년의 이야기를 주구장창 늘어 두곤 절대 밥값은 내지않는 쫌팽이같은 인간이 대체 뭐가 좋은지... 그러나 피디는 또 달랐다.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고 그가 전하는 솔루션이 좋다고했다. 나는 비웃었다. 가수면 목소리 좋은건 당연하고, 솔루션이야 작가가 써주는건데 저 인지도에 앉아서 대본만 읽어도 따박따박 꽂히는 출연료를 생각하면 늙은 아저씨 가수는 더 열심히 했어야했다고. 피디는 대답하기 싫은지 그냥 자리를 피했고, 은근 또라이 기질이있는 내 막말에 그 주위가 싸해지고 말았다. 그래도 크게 신경은 안썼던 것 같다. 막내작가 월급정도를 출연료로 획획 가져가면서 시간약속도 못지켜서 놈팽이를 치는 인간이라니, 그러나 세상일이 모두 한 면만 볼순 없는 것처럼 그 사람도 그랬다. 모두가 우진을 욕해도 막상 가장 큰 피해자로 보이는 조강지처인 내가 우진의 편을 들었던 것처럼, 청취율은 날이 갈수록 떨어지기 시작했고 광고나 협찬도 들어오질 않으니 제작비는 날이 갈수록 궁핍해져, 라디오의 꽃인 경품의 수준도 날이갈수록 하잖아졌다. 참다참다 침에 있는 애장품이라도 주고싶은 심정이었으니까. 그와중에 바뀐 디제이는 자기가 아는 작가와 친분을 과시하다가 드라마의 결말을 스포하는 바람에 욕을 바가지로 먹고는 관두고말았다. 그나마 금요일이었다. 이틀후면 우린 또 누굴 섭외해야할지 말같지도 않은 출연료를 누구에게 들이 밀어야할지, 그때 피디는 내게 무조건 ‘손석우’ 아저씨를 데려오라고했다. 아니, 대체 그 옛날 가수는 왜요? 라고 묻기 전에 나는 “어떻게요? 어떤 방법으로요?” 라고 먼저 물었다. 아침에 못일어 나서 못하겠다는 철없는 50대 아저씨를 어르고 달래는 방법이 있냐고 물었다. 피디는 어차피 그 양반은 자기 전화는 안받으니 나보고 섭외를 성공시켜오라고했다. 싫다고 거절하기 전에 일단 집으로 와서 고민했다. 항상 하던 미드 필사를 두곤 손석우가 진행하던 시절의 라디오를 들었다. 그리고 밤을 샜다. 생각외로 너무 재밌어서, 분명 나와 할때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사사건건 내 대본에 테클을 걸기도 했으니까. 그는 그만의 지조가있었다. 그에게 아침에 전화를 걸었지만, 받고나서 내게 바로 말했다. 라디오를 다시 할 생각이 없다고. 그리고 이미 초상집 분위기로 오지도 않는 시청자 게시판의 텅텅빈 사연거리와 광고글을 맥아리 없이 정리하는 막내작가의 뒤통수를 처량하게 봤다. 피디는 내게 손석우의 콘서트 티켓을 건내줬다. 


 소극장에서 진행되는 콘서트였다.예상 외로 이미 만석이었다. 물론 워낙 작은 콘서트였지만. 2명이서 갈 수 있는 티켓이길래 조피디에게도 같이 가는 거냐고 물었으나. 유부남이 처녀랑 콘서트를 왜가냐며, 그냥 친한 친구있으면 데려가고 쏘붙였다. 친구라고 해봐야 다들 결혼해서 애낳고 살고, 그나마 이런거 즐길만한 사람은 전직장 박팀장 뿐이었으나, 그녀도 꽤나 바빠서 처량하기 그지 없게 혼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티켓이 아까웠다. 버리긴 아까워서 그냥 손석우 팬카페에 함께 갈 사람을 구한다고 글을 올렸다. 댓글 중에 가장 열렬한 팬이있으면 같이 가겠다고. 생각보다 그 아저씨는 팬이많았다. 한물간 옛날 가수 치곤, 댓글은 한 30개 정도 달렸고, 가장 눈에 띄는 글을 쓴 사람에게 쪽지를 보냈다. 콘서트장 앞에서 만나기로. 

     2     

 난 언제나 좀 일찍 장소에 도착하는 편이어서 콘서트 시작 2시간 전에 근처 카페에서 글을 쓰고있었다. 카페에서 만나자고한 ‘석우사랑’ 이라는 드럽게 촌스러운 닉네임을 한 사람도 콘서트 시작 30분 전에 여기서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30씬 즈음에서 안넘어가는 글을 보다가 열받던 중에 내 앞으로 한 남자가 왔다. 승주였다. 

 나는 내 앞에 서있는 사람이 손석우의 콘서트를 함께 갈 ‘석우사랑’이 승주라는 걸 믿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날 전혀 모르는 얼굴로 밝게 인사했다. 십년 전 베니스 산타루치아 역에서 처음 만났을 때 같은 밝은 미소로, 승주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해주었다. “반가워요. 한승주입니다.” 너무 잘 아는 이름, 매 순간 내 머릿속을 떠다니던 얼굴, 나도 소개를 했다. “이채경입니다.” 

이름이 예쁘시네요. 하고 말했다. 그때처럼, 승주는 날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나도 승주를 처음 본 사람처럼 대했다. 콘서트장으로 들어가서 노래를 듣는 내내 나는 베니스를 함께 여행했던 승주를 떠올렸다. 꽤나 로멘틱한 재회였다. 그는 몰라도 나에겐, 콘서트가 끝나갈수록 나는 불안해졌다. 섭외 생각은 완전 잊고 그저 어떻게 하면 승주에게 말을 걸수 있을까 고민했다. 그리고 우진의 말도 계속 떠올랐다. 네가 끌리는 곳으로 가라는 그의 말... 하지만 난 바로 옆에 목표물을 두고 뒤돌아섰다. 그때처럼 난 용기가 없었으니까. 승주가 내게 감사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도망치듯 나와선 손석우에게 전화를 걸며 대기실쪽으로 걸어갔다. 대기실에서 만난 손석우는 나를 대충 흘겨보곤 스텝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다. 손석우는 라디오 얘긴 안하고, 내게 왜 그렇게 노래를 듣는 태도가 불량하냐고 물었다. 첫사랑 생각에 잠긴 여고생마냥 맥아리 없는 표정 때문에 노래에 집중할수 없다는 둥, 그러곤 라디오 때문에 온거면 그냥 가라고 했다. 친절하게 출구까지 알려주었다. 그가 알려준 이상한 출구 때문에 길을 헤매다. 승주와 다시 마주쳤다. 승주는 날 보곤 반가운지, 어디갔었냐며 물었다. 너무 감사해서 밥이라도 사거나 콘서트 티켓값을 주겠다고 했다. 나는 필요없다고 말했다. 마침 조피디에게 전화가 왔다. 섭외에 성공했냐는 말에 내가, 손석우가 옛날가수 치곤 도도하다며 섭외는 망했다고 했다. 그러자 피디는 또 작가가 사람 마음을 그리 못움직여서 작가 하겠냐며 쏘길래, 열받아서 전화를 확 끊어버렸다. 여전히 승주는 내 뒤에있었다. 승주는 내게 다가와 뭔 일이 있는데 괜히 말을 걸었다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승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섭외하고 싶어서라기 보단, 그와 한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서. 승주가 손석우의 마음을 움직여준 덕분에 난 손석우를 다시 데려올수 있었다. 내가 대기실 밖에 있던 사이에 승주가 어떻게 그의 마음을 움직였냐고 물었지만, 승주는 아주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내게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라디오가 시작되었다. 손석우가 돌아오고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와의 관계도 꽤나 좋아졌다. 내 대본이 그 사이에 부드러워졌다며 안하던 칭찬을 하길래 약간 놀랐으니까, 그리고 용기를 내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사인사를 전하고싶다는 핑계로. 승주를 홍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불렀다. 프렌치 레스토랑이었고, 구성작가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셰프가하는 곳이었다. 승주에게 베니스 일을 꺼내고 싶다가도 사실 무서웠다. 승주는 전혀 날 모르고있고, 심지어 그렇게 오래전 일을 이렇게 오랜시간 기억하고있었다는 걸 알면 승주도 많이 놀랄테고 불쾌할 것 같아서.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린 서로의 직업을 얘기했다. 승주가 내 직업은 알고있었지만 드라마를 썼다는 것과 꽤 유명한 다큐를 제작했던 것도 얘기했다. 그 앞에서 꽤 괜찮은 여자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승주는 대기업에 다니고있었다. 역시 그럴 것 같았는데 너무 승주스러워서 그것도 좋았다. 승주는 내게 재밌는 일을 많이 해서 부럽다고 말했다. 나는 오히려 승주에게 그런 평안한 삶이 부럽다고 되받아쳤다. 승주가 나를 부러워하는 것도 꽤나 신기했다. 밥을 다 먹고 계산을 먼저하려했는데. 이미 승주가 계산을 마쳤다고 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인사를 전하고 싶었건만, 멋쩍어져서 나는 승주에게 티켓값 받은걸로 칠게요 하곤 말았다. 그러자 승주는, 내게 “티켓값 아닌데? 그건 안줘도 된다고 하셧잖아요.” 그럼 왜...? 라고 묻자 승주는 다음에 밥을 사라고 말했다. 나와 친구로 지내고 싶다는 말도 덧붙여서. 당황스러워 나도 말했다. “나중에 손석우 아저씨랑 같이 밥먹을 수 있는 자리 마련할게요. 친구 덕 보세요 그쪽도.” 집으로 오는 내내 꿈이 아닐까 싶었다. 현실이 아니고 이게 다 꿈이라면 난 다 무너질 만큼 승주에게 설레고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만나도 그는 그때 그대로였으니까. 세월이지나도 승주는 변하지않았다. 그가 내게 주던 그 설렘의 총량도.      

3     

공개 라디오를 하던 날 나는 승주에게 방청권을 선물했다. 승주가 왔고 라디오를 진행했다. 500회 특집으로 아침말고 오후 6시쯤에 진행했다. 큰 공원에서 라디오가 끝나면 불꽃놀이도 하기로, 그리고 그날 손석우아저씨와 승주 나 이렇게 밥도 같이 먹자고. 라디오 진행은 그동안 가장 인기가 많았던 사연을 다시 읽고, 그리고 그 사연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살고있는지를 얘기하기로 했다. 나 또한 그 예전 자료들을 찾느라 애좀 먹었지만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었다. 사연들이 워낙 재밌기도 했고, 초등학교 내내 짝사랑하던 여학생을 15년만에 동창회에서 재회했다는 남자의 사연, 그는 짝사랑녀에게 이제 고백을 하고싶다고말했다. 총 3회에 걸쳐, 두사람이 영화관을 갔던 이야기 그리고 봄에 꽃놀이를 갔던 이야기가 추후에 사연이왔지만 결국 그 이후로 그 사연자는 연락도 되지않았고 사연을 보내지않아서 아픈 손가락으로 남아있던 사연이었다. 청취자들은 그 사연의 주인공을 열렬히 원했다. 하지만 난 그를 찾으려고하다가도 그도 이건 잊고싶은 일일 것 같아서 나는 반대했다. 이왕이면 인기는 좀 없어도 라디오에 다시 소개할만한 열혈 청취자를 섭외하자고, 그러나 그냥 넘어갈 방송국 놈들이아니었다. 무엇보다. 협찬사측에서 가장 원했다. 물주가 원하는데 노비들이 별말을 달수 없었다. 나 또한 반박을 하고 싶다가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까지 유난을 떨어야하나 싶어서 그 사연자를 찾기 시작했다. 사연자는 감사하게도 게스트로 와주었다. 그리고 사연을 보내지 못한 그간의 일들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백을 했지만 대차게 거절당하는 바람에 모두가 실망할 것 같아서 사연을 보내지 못했다고했다. 거짓말을 해볼까 생각했으나 본인 성격과는 맞지 않아서. 그냥 잠수탄거라며 사과아닌 사과를했고 모두의 위로가 전해졌다. 오랜시간 마음에 담아온 설렘을 끝낸 그 사연자가 부러웠다.     

 승주와 함께 로비에서 손석우를 기다리고있었다. 한참을 안내려오길래 전화했더니 이미 집에 갔으니 둘이 먹으란다. 어이가 없어서 뒤집어질 지경인데 승주는 그저 웃고있었다. 승주에게 손석우가 안와서 미안하다고 하자, 승주는 내가 있으니 어차피 재밌을 거라며 술이나 마시자고했다. 시끄러운 이자카야 말고는 갈만한 곳이 근처에 딱히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이자카야로 갔다.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가 불가했다. 승주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조금 아쉬웠달까. 커튼이 쳐진 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술을 한잔, 두잔 나누다가 대화를 했다. 서로의 말이 안들려 자연스레 얼굴이 가까워졌다. 약간 취기가 오를 무렵, 승주는 내게 계속 말이 안들린다고 하더니 내 옆으로 왔다. 그렇게 승주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이어갔다. 서로 취한채로 웃고 떠들었다. 갑자기 음악이 꺼졌다. 스피커 문제인지 한참동안 음악이 안들렸다. 승주는 내 옆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차피 건너편에서 이야기해도 잘 들릴거라는 내 말에도 승주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내 옆에있었다. 따뜻한 사케를 마시는 승주의 옆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설레는 밤이었다.      

 입을 맞췄고, 잠을 잤다. 취한척 모르는척 넘어가기엔 모든게 너무 뚜렸했다. 난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승주는 아무일도 없던 사람처럼 굴었다. 화가났다. 그러나 화가난 이유를 말할수없었다. 우리가 잤다고 말할수없었다. 승주도 다 알고있었으니까. 그러나 승주는 우리가 잔거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베니스에서처럼, 

4     

 베니스에서 우린 잠을 잤다. 취기 라고 핑계를 대기엔 내 정신이 너무나 온전했으니 그건 거짓말이다. 근데 그 더러운 거짓말을 하고있었다. 여자친구가 있는걸 알면서도 나는 승주랑 잤으니까. 전혀 안그럴 것 같은 얼굴로, 우린 잤으니까. 먼저 입을 맞춘건 나였다. 승주가 좋았으니까, 그런 저급한 방법으로 그의 마음을 가지고 싶었으니까. 정말 뚜렷한 정신 속에서 흔들리지않고 정말 승주가 좋아서 입을 맞췄다. 그 후에 승주가 보여준 행동은 나와는 달랐다. 여행지에서 여자친구를 만나러 가기 전에 그냥 술핑계로 욕정에 넘어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떠날때에도 단 한마디도 하지않고 사라졌으니까. 오랜시간 승주를 잊지못했다. 이번에도 역시 승주는 모른척했다. 그 행동이 비겁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화내고 싶었다. 그런 행동이 미워서, 아니 날 사랑해주기를 원해서. 승주에게 전화했다. 아무 일도 없던 것같은 말투와 목소리, 그의 평화를 깨고 싶었다.      

 며칠 전 밤 그의 품에 안겼던게 생각이났다. 그 품안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승주는 날 보고있었다. 잠을 자고서도 이렇게 모른 척 해서 화난다고했다. 그리고 승주는 내게 말했다. 베니스의 일을 기억하고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너 또한 모른척하지 않았냐고. 자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다 알고있었으면서 말하지 않았기에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다고. 착한 얼굴로 꽤나 제 멋대로였다. 승주는 내게 말했다. 베니스에서 잠을 자고 그 다음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냐고, 사실, 그때를 생각하면 무서웠다. 이름모를 승주의 여자친구한테 미안했고, 여자친구를 두고 다른 여자를 품에 안은 승주도 이상하게 미웠고, 승주를 갖고 싶은 마음에 비겁한 행동을 한 스스로도 혐오스러웠다. 그냥 말을 하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될거라고, 그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더 큰 핑계 하나를 대자면, 어렸으니까 그땐. 근데 승주, 넌 지금은 그런 핑계를 대기엔 이제 어른이잖아. 승주는 날 품에안곤 잃어버린 시간들을 이야기해주었다. 덴마크에 가기 전에 승주는 여자친구와 헤어졌다고했다. 사실 그 전부터 여자친구는 승주에게 이별을 고했다고했다. 새롭게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서 헤어지자고, 그러나 승주는 얼굴 보고 그때 이별을 말해달라며 덴마크로 날아갔다고했다. 승주는 여자친구를 사랑했다고 했다. 처음이었고 자신에겐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면서도 꽤나 섭섭했다. 난 왜 승주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자기비하 섞인 한탄을 스스로에게 했다. 승주는 아무렇지 않은 듯 잠들어있었다. 그냥 승주의 품에 안겨 승주의 살냄새를 맡았다. 좋은 냄새가났다. 영영 잊고싶지않은 그런...

 승주에게 날 생각했냐고 물었다. 승주는 그렇다고했다. 그럼 날 왜 찾지 않았냐고 물었다. 승주는 자존심을 부리듯이 답했다. “너 또한 날 찾지 않았으니까” 근데 난 그럴수밖에없었다. 승주는 여자친구가있었고 난 승주를 너무 사랑해서 승주에게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승주는 그런 내게 종종 날 생각했다며 내가 쓴드라마 대본집을 보여줬다. 거기에 써있는 승주의 이야기, 그리고 승주가 지어준 필명까지, 승주는 나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고백했다. 온 순간 너를 생각했다고. 승주는 내게 입맞춰주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해변의 크레이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