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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입니다 May 07. 2023

어머니의 아픔은  '지키고 싶다'는 마음을 낳고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 강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마음

그 모든 것의 씨앗은

불 꺼진 방 한편에 기대어 흐느끼던

어머니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한 번은 캄캄한 방 안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니가 컴컴한 벽에 기대어서는 흐느끼며 울고 계셨다. 나는 어머니의 손 끝을 잡고 '내가 잘할게요'라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며 입 밖으로 그런 말이 흐느끼듯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서글피 울고 있던 모습이 꽤나 충격이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안전'에 대해 엄청난 고민을 하거나,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어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 생명을 함부로 대하지 않으려는 것들과 같은 생명존중과 같은 가치들이 내면화되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장애학생을 위한 도우미 학생을 자처하기도 했었다. 친했던 고등학교 친구가 경계선급의 부족해 보이던 친구와 교실 안에서 시끄럽게 싸우려는 모습을 보면서 자처하고 하지 말라며 말리기도 했다. 몸이 가녀리고 흰 피부에 방어적인 성격 때문인지 따돌림 비슷하게 당하던 친구와는 일부러 말을 걸고 함께하기도 했다. 남을 쥐어패는 무술보다는 나를 지킬 수 있는 호신술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하물며 게임을 하더라도 내가 선택하는 캐릭터들은 성직자나 온몸으로 남을 지키는 탱커 역할을 더 좋아했으니 우스운 일이다. 강한 힘을 갖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많은 것을 움켜쥐는 존재보다, 힘으로 남을 지켜낸다는 게 더 멋있게 느껴졌던 것 같다. 지금도 풀만 먹고도 강인한 힘을 지닌 코뿔소나, 고릴라, 코끼리와 같은 존재들을 이상적으로 여기어 채식을 지향하는 모습이나, '나와 지구 위 모든 생명과 미래의 자손을 위한 안전한 공간을 만든다'는 퍼머컬처를 하려는 그 모습들 역시도 그러한 것들의 연장선이 아닐까 한다. 그 모든 것은 어머니의 눈물이 작은 씨앗이 되지 않았을까.


엇나갈 마음은 안들었다.


삐뚤어지기 딱 좋은 환경 속에서 자랐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그분은 너를 사랑한단다.’라는 말을 들어오며 ‘사랑이라는 건 무엇이기에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을 붙잡아주는가’와 같은 질문들은 내 안에서 피어났다. 어째서인지, 학교만 가면 맨 앞자리 쪽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선생님들 말씀에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으며 무의식적으로 '모범적인 학생'이 되려고는 했던 것 같다.


교육, 질문없는 선택의 강요, 하지만 사랑


서열에 따라 줄을 세우고,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찰나도 없이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선택과 길. 느지막이 생겨난 내 안의 질문들은 ‘교육’이란 어때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들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고 있었다. 어렸을 때에 수학문제를 틀렸다고 뺨을 맞아야 했던 기억, 가족의 이마에 다른 가족 구성원이 던진 유리 반찬 그릇이 부딪혀 피가 흐르고, 어두운 방안에 흐느껴 우는 모습과 '너는 잘될 녀석이야' 보단 '네가 네 어미의 피가 아니라 내 피를 더 받았더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와 같은 소리들을 들으면서 자라 ‘나는 가족이란 무엇인가’, ‘교육은 어때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만나게 됐던 것 같다.

교육, 사람을 기르는 일, 사랑과 같은 질문들은 대학 진로를 중 ‘교육학도’로서의 길로 이끌기도 했다.

대체 교육이 뭘까. 대체 어떤 이유로 ‘너는 사랑받는 존재야’라는 말을 들으면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는 걸까. 비틀어지고 싶은 마음들이 사라지는 그 이유들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


'이 아픔들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


‘어째서 우리 가족은 서로 고함치고 싸우는 모습들을 저렇게 보이는 걸까’, ‘유리그릇을 던지고 누군가의 이마에 피가 흐르는가’, ‘대화가 아닌 힘과 말싸움이 불 번지듯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와 같은 질문들. ‘왜’라는 질문으로 자라나던 나의 탐구심은 ‘질문이 없는 사회’, ‘까라면 까라’는 문화, 일제와 한국전쟁, 독재정부를 거쳐 인간성과 사랑보다는 폭력과 강압이 많았던 당시의 사회에서 뿌리내려온 문화라고 여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질문을 하는 조선인은 즉결 처분 대상이었고, 한국 전쟁으로 서로 함께 적과 싸우던 독립군들은 서로를 죽이는 적이 되었고, 독재 정부 시절에도 권력자에게 질문이나 의구심을 갖는 것은 처벌 대상이기도 했을 테니까.


내 안의 '질문'을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핏빛의 어두운 세월을 보내온 이 나라의 과거가 내가 자랐던 가정에까지 그 아픔을 물들이지 않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 사회는 질문이 필요했고, 질문이 없는 교육은 아이들을 절망으로 몰아간다고 느껴졌다. 나 역시 정신없이 바쁘게 닭장 속 닭들이 알을 낳아야만 하듯, 어떤 결과물을 내기 위해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10대 시절. 20대가 되어서야 '질문'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름 아닌, 내 존재와 내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했지’, ‘왜 교육학과에서조차 외우기식의 시험을 치는 걸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키워드 암기 방식의 교육이 진짜 교육이 맞을까’, ‘이게 맞다면 왜 수많은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자살률은 내려가질 않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로 지나갔던 대학시절. 나는 일반교사보다 대안학교 교사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20대쯤 들었다.


바뀌어야 할 건 '이 사회'라는 믿음


특수교육학과를 나와 교육 현장에서 장애학생들을 가르쳐보기도 했다. 거기서 느낀 건 어떤 ‘한계’였다. 사회의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행복해지려면 필요한 건 이들을 바꾸는 것보다 이 사회를 바꾸는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 ‘왜 그 불편한 몸을 갖고 이 사회에 나와서 여러 사람 힘들게 만들어!’라고 호통치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 속에, 바뀌어야 할 건 이들보다는 사회 쪽이 바뀌는 게 이들의 근본적인 행복을 만들어내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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