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서울 영성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현존 수업
재밌으면서 헷갈리는 점들이 있다. 아마 글을 이렇게 적어대다 보면 마음속에서 갈무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요즘 읽고 있는 책 하나는 바로 현존수업이다. 제주에서 생활을 접고 올라온 뒤, 모든 것을 자신의 의지로 부딪히고 또 구르는 내 모습을 딱하게 본 지인 한 명이 나에게 손길을 건넸다.
내가 갖고 있는 고민인 이타심의 결핍, 자연의 몰이해라는 현대 사회를 풀고 싶어서 이리저리 부딪쳐온 모습을 곁에서 요 한두해 지켜봐 온 친구.
본인이 운영하는 영성 커뮤니티에 참여해 보는 게 어떠냐는 그의 물음에 ‘나는 요가는 잘 모르겠고, 명상-내면아이, 부의 확장’ 쪽 커뮤니티는 상당히 끌리는데? 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내가 갖고 있는 여러 능력 중 사진이나 영상으로 일상을 기록할 수 있는 아카이빙(Archiving)으로 그의 커뮤니티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어 함께 시작했던 영성 커뮤니티.
처음에는 어버버 하면서 그들에게 어떻게 녹아들어야 할지 몰라 조심했다. 다만 이타심의 결핍이라는 주제를 그들과 풀어갈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상당히 설레는 마음으로, 혹은 기대하는 마음으로 처음 몇 시간 들을 보냈다.
물론 내가 너무 진중하게 운을 뗐기에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얘는 왜 이리 진지한가, 이타심에 한이 맺힌 친구인가’ 싶어 부담을 느꼈는지도 모를 일. 하지만 이곳에서 이타심이니 뭐니 하는 사회의 영성적, 감정적일 수 있는 부분들, 사회 각 구성원들이 갖고 있는 개개인의 내면에 대한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뜻이 있다는 나의 마음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해주시는 분들이 계셨다. 비슷한 뜻과 마음으로 비슷한 결의 활동을 해주시는 분도 알게 됐으니, 이 커뮤니티를 알게 된 게 참 감사했다.
이 커뮤니티에서 ‘현존수업(The Presence Process)’라는 내면아이 통합과정을 책 한 권과 함께 시작했다. 내면아이란 아동기에 억제되어 우리 내면에 감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퇴행적 존재를 뜻한다. 그 아이가 갖고 있는 감정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내면적 갈등이 천차만별하게 드러나게 되는데, 이 현존 수업이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갖고 있는 억제되어 갈등을 일으켜오던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져 보는 모임이었다.
지금 9주 차 과정의 책을 다 살펴본 나로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의 아픔을 지켜봤던 나로서, 가족 간에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는 문제, 이 같은 개인 내적인 문제가 소시오패스나 사회 내적 갈등을 끊임없이 일으킨다고 조명해 온 나로서 ‘아동기의 트라우마나 정신적으로 그려온 나의 스토리텔링은 말 그대로 참 나가 아닌 나의 스토리로 내가 써온 잘못된 세계관일 뿐이라 이야기한다. 그로서 20대부터 이 문제를 푸는 게 사명이라 여겼던 나로서는 근본부터 흔들리게 해 줬다.
‘난 내 어머니가 겪었던 그 아픔이 더는 나타나지 않게 만들고 싶었는데, 이런 내 마음이 그저 무의식적인 반응일 뿐이라고?’ 이 과정에서는 어떤 상황을 목격한 뒤 의식적인 반응이 아닌 무조건적 반응으로 이어지는 여러 행동을 ‘참 나’(Presence)로 살아가는 데 방해되는 오류행동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어머니의 아픔을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겠어 ‘라며 충격받고, 그 후 이를 문제로 삼아 해결하려 하는 그 태도 자체가 굉장히 무조건적인 반응이라는 것.
현존(Presence)이라는 건 나의 생명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뜻하며(내가 이해한 바로는), 나의 존재가 그 자체로 풍요롭고 잘 될 수밖에 없도록 이끄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존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몸을 빌어 끊임없이 머리로 구상하고, 우리가 풀어내려 했던 인생의 수많은 장애물들이 뜻하는 것과는 달리 꺾이고 안될 때가 있는데 이 모든 건 이 현존에 맡기는 것이 아닌, 몸이 갖고 있는 정신체(인지, 추론 능력 등)로 답을 해결해 나가려는 에고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니 삶이 우리에게 ‘그 방법이 아니야’라는 메시지들을 던진다고 한다.
이렇게 내가 억눌려있던 수많은 감정들과 통합하게 되면 나는 현존으로, 삶이 주는 흐름을 타며 편안하게 우리 삶을 이뤄나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때론 내가 바라지 않던 기회들이 우연히 찾아와서는 삶이 풀려나갈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런 순항을 현존이 이끄는 삶이라고 한다.
책 ‘될 일은 된다(The Surrender Experiment)’의 저자 마이클 싱어 역시 요가와 명상을 따르며, 주어진 상황과 기회에 최선을 다할 뿐 억지로 거스르거나 상황을 온 힘을 다해 자신의 뜻으로 바꿔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사원이 생기고, 영적 구루를 만나며, 소프트웨어와 건축 사업들이 잘 풀리기 시작하더니 타임스에까지 소개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책의 이름처럼, Surrender. 자신의 에고적 의지를 내 던지고 인생과 우주가 주는 질서에 순응해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해 성공을 이뤄내는 모습은 20대 시절부터 해외 워킹홀리데이를 두 차례, 영주권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부딪혔던 노력들, 지속가능한 환경 디자인 방법인 퍼머컬처(Permaculture)를 접목시켜 강원도 영월 일대를 생태지구로 만들려 했던 나의 노력들. 그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던 건 내가 느꼈던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감정들을 제대로 수용하지 않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순간들 때문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배울 수 있게 됐다.
물론 요 며칠을 지켜보니, 아직도 나의 느낌이나 감정에 휘둘려서는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완전히 내 삶에 녹여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듯하다.
우리가 느끼는 ‘불편한 느낌, 감정’이라는 건 어렸을 때 부모님이나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나며 억눌리고 억제되어 있던 여러 감정들이 내적으로 마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가 본래 1만 가지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존재라면 그중 수천 가지의 감정은 우리 스스로 억제하거나 억눌러 비정상적으로 억압된 채 존재하는데, 성인으로서 생활하다 보면 그 모든 감정 중 여러 불편한 감정이 올라가 그 감정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만들려 한다고 한다. 이게 현존의 역할이며, 현존은 우리가 본래 억제하고 있던 감정들과 다시 통합(Integration) 되어 더 현존에 가까워지도록 이끈다고 한다. 일부러 우리 삶에 비슷비슷한 패턴화 된 불편한 사건들이 쳇바퀴 돌 듯 일어나는 이유는 이 현존이 우리가 더 완전해진 존재가 되기 위해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 속 사람들, 우리가 싫어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느낌들을 갖게 만드는 사람들을 ‘메신저(Messenger)’라고 부른다. 이들은 우리가 더 통합되고 온전한 존재가 되도록 삶에 나타나는 선물 같은 존재들이라 한다.
나로서는 20대부터 내 에고적인 생각과 판단대로 모든 것을 해왔지만 그 결과가 썩 이상적이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나로서는 이 Surrender Experiment와 같은 선택지 말고는 다른 선택 안이 없었다. 되려 선택하기 편안한 선택. 물론 조금은 혼란스럽고, 내 삶에 100% 제대로 적용하는 게 맞나 싶은 마음이 들어 두렵기도 하고 이런 나 자신이 괜찮은 게 맞나 확인 중에 있다. 마음 한편에는 ‘과연 이 방법이 맞을까?’라는 의구심이 아주 조금은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또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이 흐름에 나를 맡겨볼 요량이기도 하다.
또 한 가지 이 과정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건 2021년도에 담마코리아를 통해 위파사나 명상법을 익히고 난 뒤부터 쭉 매일같이 명상을 수련해 왔기 때문도 크다. 아무래도 감정이든 생각이든 온몸과 머리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다 알아차려 매 순간 ‘지금’에만 존재하는 연습을 계속해서 해왔던 게 이 현존수업이라는 과정에서 요구하는 ‘지금’의 호흡과 느낌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위파사나를 현장에서 배웠던 것보다 그 이론적인 부분을 더 탄탄히 이해할 수 있게 된 점도 이 현존수업을 통해 내가 얻은 부분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떤 순간들을 내 삶 속에 만나게 될지 은근히 기대하게 되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내 감정과 생각에 휘둘리지 않고 가만히 이 순간에 존재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을 배웠으니.
불편한 감정이 일어나면 어쩔 줄 몰라하던 과거에서 벗어나(위파사나를 배웠지만, 어설프게도) 가만히 그 감정과 오래도록 있어주며 나의 일부로 통합되도록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됐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마치 석가모니가 이야기했던 ‘자유’라는 것이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닐까 내심 짐작해 보게 되기도 하다.
내가 내 삶에서 자유로워졌을까? 어찌 보면 내 삶을 여행하듯 살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어떤 감정들을 만나게 될까’하는 의연하면서도 은근 기대하게 되는 마음들.(라고 며칠전 써놨지만 시간이 지나니 다시 흔들흔들하다. 어떤 불편한 감정이든 이를 알아차리고 마주하기란 말처럼 간단하고 쉽지마는 않다. 훈련, 시간이 필요해보인다.)
돈이 한 푼 두 푼 줄어들면 두려워하던 마음과, 어떻게 해서든 부자가 되어야 한다며 보이지 않는 동아줄을 놓지 못하는 악착같은 마음들이 사라졌다. 그 동아줄을 쥐고 올라가려고 애를 쓰던 에너지와 심적 부담감들을 내려놓아도 된다고 믿게 되었으니 홀가분하다.
마음 한편에 꿈꿔오던 ‘감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목표를 이렇게 이룰 수 있게 된 걸까 싶은 어설픈 설렘도 있다. 이 삶이라는 것을 힘 빼고 수영할 수 있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