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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꿀꿀 May 23. 2024

프랑스인과 k-드라마 시청기

오 마이갓 저건 너무 무례해

하루는 친구 L과 함께 한국 드라마를 시청하기로 했다. (참고로 L은 한국드라마와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등 케이팝 광팬으로 거의 모든 한국 드라마를 섭렵했으며 내가 전생에 너는 한국인이었을 거라고 말해주자 매우 행복해한 한국러버.)


드라마는 대학 새내기들의 청춘과 사랑, 뭐 그런 드라마였는데, 보다가 대학에서 선배가 후배들을 집합, 단체기합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본 L은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싼다.

"왓? 오 마이갓. 저건 너무 무례해. 어떻게 저럴 수 있는데?"

L은 쏘루드(So rude, 무례한) 쏘루드를 외치며 내게 묻는다. 저 선배가 대체 뭔데 저럴 '권리'를 가졌냔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선배니까. 쟤넨 1학년이고 선배는 4학년이니까."

"그러니까 그 선배가 뭔데. 그냥 나이차이일 뿐이잖아. 후배들은 또 대체 왜 저렇게 말을 잘 듣는 건데?"


할 말이 없다. 나이랑 학년이 높으니까, 로 설명이 안된다. 유교에선 원래 장유유서라고 높은 사람을 존중해 주는 문화가 있는데 저런 문화는 그게 변질된 나쁜 예로서,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안 좋은 문화에 속하고.... 

근데..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순식간에 그걸 설명할 만큼 영어가 안 따라준다.


고민하던 차에 곧이어 드라마에서 선배가 후배 한 명을 밀치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선배는 남자, 후배는 여자. (하지만 이건 남자주인공이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선배를 물리치고 여자를 구해주고 사랑에 빠지기 위한 장치였다)

난 분노하면서도 이제 잘생긴 남자주인공이 나타나 구해줄 차례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L의 표정은 경악을 넘어 사색이 된다.

"오 마이갓. 말도 안 돼. 여기였잖아? 저 선배라는 앤 이미 저기 옆에 있는 남자 후배들한테 완전히 린치(집단폭행)당했어. 쟤가 선배라는 이유로 저럴 권리는 절대 없어. "

그러면서 고개를 푹 숙인 다른 후배들이 나오는 장면에서 덧붙인다.

"후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너무 쉽게 복종하는 거야. 자기가 생각했을 때 아니면 아닌 건 아니라고 다 같이 맞서야지. 여기에서 저랬잖아? 선배가 집합하라고 했을 때부터 전부 물어봤을걸. 왜 부르냐고, 용건 있냐고. 그냥 싹수가 없다느니 기강 잡는다느니 하는 이유로 집합시켰으면 다들 코웃음 치고 네가 뭔데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사람을 와라 가라 하느냐고 아무도 안 갔을 거야."


흥분하며 말하는 L을 보며 아니, 잘못되고 화나는 일인걸 알긴 알겠는데.. 새삼스레 저 문화가 저렇게까지 기겁과 경악을 할 일이었나 하고 생각해 본다. 단체기합, 집합, 선배들의 후배 기강 잡기.. 뭐 그런 건 1995년에 태어나 살아온 내게는 솔직히 꽤나 익숙한 문화였다. 나는 요즘은 안 저러는데 많이들 저랬었지, 수준으로 보는 장면을 저렇게까지 펄쩍펄쩍 뛰면서 경악스러워하니까 조금 뻘쭘하기까지 했다.


대학교 홍보대사 동아리를 들었던 때가 떠오른다. 선후배 기강 잡기 문화의 최악의 경험을 했던 그 시절.

들어가기 전엔 몰랐는데 들어가 보고 나니 그 동아리는 대학교의 얼굴들을 뽑아 교육시킨다는 목적 하에 나름 굉장히 엄격한 분위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하루는 한여름의 동아리 활동 중 넓은 강당에 앉아 다 같이 도시락을 펴놓고 밥을 먹는 점심시간, 목이 말라 참을 수가 없어 바로 앞 편의점에서 물을 사 왔다. 내 물만 사 오면 안 될 것 같아 쌈짓돈까지 꺼내 선배들의 물까지 사와 물을 다 돌리기까지 했는데.. 뚜껑을 따고 물을 마실 무렵 나는 불려 나갔다. 

선배들 앞에서 함부로 개인행동을 했다는 사유로 그때 나보다 한 살 어린 선배에게 무지하게 혼이 났다. 그때 나는 드라마 속 후배들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속으로는 생각했다.

' 아니 점심시간에 물 좀 사 왔다고 이렇게 화를 낸다고..? 그렇다고 여기가 유치원, 초등학교도 아닌데 물 좀 사 와도 되냐고 물어봤어야 했나?'

그러나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선배가 무서운 걸 떠나서 나는 그때 '수습 홍보대사'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잘못받으면 '정식 홍보대사'가 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뿐이랴, 동아리실 청소는 당연히 후배들 몫이었는데 청소를 할 땐 선배들의 수다를 방해하지 않도록 절대 엄숙을 지키며 조용히 빗질을 해야 했고, 교내 어디서건 선배를 마주치면 각 잡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한 뒤, 안녕하십니까 33기 00과 누구누구로 시작되는 자기소개를 읊어야 했던 기억. 이후에 나를 포함해 결국 절반정도의 동아리원이 버티지 못하고 그 동아리를 탈퇴했다. 

일 년쯤 후였을까, 그 동아리는 교내 커뮤니티에서 '똥군기 동아리'라며 열받은 후배들의 폭로로 한번 난리가 났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 똥군기 폭로 글에 '좋아요'를 누르는 정도로 후배들의 뜨거운 폭로를 지지했고.. 나는 대체 무엇을 겁냈었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수습에서 인정받아 정식의 길로 가고 싶어 그냥 참다가, 참다 참다가, 나중엔 그냥 탈퇴라는 방법으로 도망쳤던 나의 모습. 그 시절의 나에게 '정식 홍보대사'라는 스펙은 꽤나 중요했으니 고개를 숙였겠지만, 탈퇴할 땐 뭐가 그렇게 두려워 말도 못 하고 그냥 빠져나오는 걸로 끝을 냈던 걸까.


그래도 저건 드라마일 뿐, 한국인들도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울 줄도 안다고 얘기하고 싶어 촛불시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도 내가 대학생 때 얘기였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대통령한테도 촛불 들고 반대했으면서 대체 선배들이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말도 못 했을까? (솔직히 말하면 그때의 나는 대통령보다 선배들이 더 무서웠다.)


 L은 사소한 것에도 입버릇처럼 '그게 바로 민주주의니깐'을 말하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나도 끄덕거린다. 맞지. 앞으론 그래야지. 그게 어떤 권력이든 간에 내 생각과 다르면 다르다고 말할 줄 알아야지. 그게 민주주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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