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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꿀꿀 May 25. 2024

아 이제 그만 놀고 싶다

베짱이도 일하고 싶은 때가 온다

-아, 이제 그만 놀고 싶다.

파리에 온 지 몇 주가 흘렀을 무렵, 나는 센강 앞의 잔디밭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이 좋은 센강의 풍경을 놔두고 심각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한국 구인구직사이트를 뒤적거리며 원서를 넣을 만한 회사를 스크랩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평범한 한국 직장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노는 게 제일 좋고 평생 놀고먹고 싶었던 내가 이제 그만 놀고 싶다니...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매일 누워 있던 센강의 어느날 오후 풍경.

나는 퇴사 후 근 2년 간 ‘원하는 걸 다 해보겠다’며 최소한의 짐과 돈만 가지고 보헤미안 정신으로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방랑을 해왔다. 그간 요가강사, 다이빙 자격증, 인스타툰 작가, 소설과 에세이 쓰기, 타투이스트 등등 진짜 별의별 도전들을 다해봤고 전자책도 쓰고 온라인 강의도 하며 1인 사업도 해봤다. 파리에 온 것도 이왕 하는 거 끝까지 해보자며 버킷리스트 끝판왕을 이루기 위해 워킹홀리데이까지 온 것.


나는 내가 진짜 해보고 싶은 거 다 해 보고 나면 뭔가 나만의 길, 엄청 좋아하는 일, 거창한 꿈같은 게 남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 끝에 남은 게.. 그냥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직장인이라니.

가족들 자주보고 친구들 경조사도 다 바로 옆에서 챙기고, 이따금씩 직장 스트레스도 받고 상사 욕도 하고,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드는 일정한 생활리듬을 가지며, 아이스커피로 수혈하고 퇴근하고 소주에 곱창 먹고, 공휴일엔 서촌을 돌아다니거나 등산을 즐기는 그런 생활.

누릴 땐 지루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런 삶이, 벗어나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그 일상이, 이제는 그리웠다.

 

나는 왜인지 모를 울적한 마음을 언니한테 털어놓기로 하고 카톡을 보냈다.

-언니, 보헤미안 정신도 바닥나는 때가 있다. 나 이제 k-직장인 하고 싶어..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차려입고 나가고 싶고 커피타임에 카페도 가고 동료들이랑 수다도 떨고 주말엔 핫플 찾아다니고 싶어. 이제 그만 놀고 싶다..

-야 너 그거 기만이다. 너 지금 k직장인 시뮬레이션 돌려봐..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출근해서 저녁까지 일하고 가끔 야근하고 사람들 스트레스에.. 어휴..

-그렇지 월급날 통장 보면 한 200 얼마 입금돼 있고..

-ㅋㅋ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생활이 그립다니까...? 진짜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카톡을 보내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후련했다. 언니는 이왕 파리에서 노는 거 가보고 싶은데 다 가보고, 쓰고 싶던 소설도 마무리해 오고, 카페에 가서 글도 쓰면서 마지막 여유(?)를 만끽하라고 했다.


한창 일할 때의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걸 다 도전해보고 싶었다. 일하는 건 지루하고, 원하는 걸 도전하는 게 즐거운 삶이며 그렇게 하고 싶은걸 다 하다 보면 관성처럼 계속 놀고 싶을 줄 알았다.

근데 아니었다. 그냥 노는 것조차도 (?) 질리는 때가 오고 보헤미안 정신이니 뭐니 그런 것도 다 바닥나고.. 이제는 성실하게 일하고 적금 들고 사대보험 들고 그런 걸 원하는 순간이 오다니.


이쪽에 서있을 땐 저쪽 삶이 부럽고 저쪽에 가면 이쪽에 있는 게 좋아 보이고 그렇게 오며 가며 가장 최적의 중간지점을 찾으며 평생을 사는 걸까. 이러다가 어느 순간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인이 되면 또 쉬고 싶고 파리에서 놀던 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겠지?

누가 인생은 정반합이라고 했나.. 천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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