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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진 Mar 16. 2020

퇴사를 결심했던 날의 일기

모래 같은 날들 안녕...

수진은 어릴 적 씨름장에서 모래성을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한다.


구릿한 색의 촉촉한 흙이 보일 때까지 손으로 땅을 파고, 단단하게 성을 만들었다고 했다.

방과 후 보습학원을 가기 전까지 어떤 날은 성을 다 쌓았고, 어떤 날은 완성하지 못했다는 수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말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다음날엔 모래성이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어. 있잖아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

잡으면 잡는 대로

쥐어진 주먹을 펴면 사라지는

모래 같은걸 위해서 달려온 기분


항상 그렇게 쥘 때만 안다.

손에 가득 쥐고, 기뻐하지도 않으면서 쥔다.

얼마나 쥐었나 두 손바닥을 편다.


허망하다.

이 위태로운 모래성을 부숴야 한다.


마르면 무너질 뚫려버린 항아리에 물을 붓는 아웅을

왜 계속하고 있을까?

언제쯤 단단하게 잘 쌓아 올릴 수 있을까?

왜 이 고민을 계속하고 있을까?


흔적이 지워지기 쉬운 모래 같으면 좋겠는데,

녹록하게도 모래 같지 않다.




이 짤막한 브런치를 쓰면서 참 많은 생각에 잠겼었다.


처음엔 분노에 가득 차올라서,

그다음엔 나의 분노가 창피해서,

그 그다음엔 이 전의 모습이 귀여워서.


그림과 글씨(캘리그라피)를 보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그 무게가 분명히도 다를 것이다.


구구절절 이 글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퇴사를 결심하던 날의 일기다.


분명 화가 많이 났다. 분이 났고, 더 이상은 싫었다. 이직을 하고, 경력을 쌓았고, 인정을 받았다고, 사회에서 드디어 '사람으로 생각해 준다'라고 생각했다.


어떤 이는 상식이 비상식이 될 수 있고,

어떤 이는 아는 것이 모르는 곳이 돼야 하기도 하고,

뻔하게도 어떤 이는 겉과 속은 다를 수 있다.


아직도 이 굴레에서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언제쯤 타협하고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난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왜 열심히 하면 할수록 기운이 빠질까?,

이렇게 산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버린 날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이 감정을 잘 추스르고 싶었다. 기왕이면 바다가 가고 싶었고, 파도소리가 나는 모래사장이 생각났다.


슬쩍 유년시절 모래를 가지고 놀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땐 정말 열심히 놀았다. 정글짐을 타고, 그네도 타고, 빙글빙글 다 같이 돌리면서 타던 뺑뺑이도 타고, 씨름장에서 흙놀이를 했다.


씨름장 모래를 한소끔 파내면 조금 구릿한 갈색의 촉촉한 모래가 나왔다. 구멍을 파내고 나면 열 손가락은 빨갛게 되었다. 구릿한 흙은 촉촉해서 모래를 섞어 두꺼비 성을 쌓기 좋았다. 가끔은 동글동글 두꺼비 똥을 만들었고, 구멍을 깊게 파면 지하수가 나올 거라고 지하수 탐험대라도 된 것처럼 여럿이 땅 만파는 날도 있었다. 정말 그땐 그 모든 순간은 진지하고 열심히 었다. (베짱이는 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거 같다.)


어김없이 다음날이면 아무 일도 없던 씨름장이 되어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놀았다.


처음 화가 났을 때엔 유년시절을 잊고 있었다.


분노하여 잔뜩 화가 났고, 여행이 가고 싶었고, 바다가 생각났고, 모래사장이 생각났고, 파도가 지나가면 흔적이 사라지는 그 모습이 참 허무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계속 모래성을 쌓고, 글씨를 쓴다. 파도는 어김없이 지나간다. '깔깔', '하하' 아무렇지 않게 웃는 모습이 부러웠다.


글을 이어서 쓰던 날, 유년시절이 생각났다. 그때의 난 경험했던 것이다. 열심히 한 것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경험 말이다.


"그래, 단단하게 쌓아 올리려고 하면 할수록 그렇게 유연하지 않은 사람이 될 것만 같아."

너무 창피해서 더 이상 글을 이어갈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 다시 이 글을 맺어보려고 한다.


분노했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는 것. 뒤돌아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 남이 아닌 자신을 비교했다는 것. 귀엽게도 용기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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