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듯하고 정갈한 도시 속에서 마주한 예술
산과 바다가 90% 이상을 차지하던 노르웨이 항해 중, 수도 오슬로(Oslo) 방문은 일종의 즐거운 일탈이었다.
시원하고 세련되게 정돈된 도시가 반가웠다.
오슬로의 핵심은 뭉크 미술관과 비겔란 조각공원(Vigeland Park)이었다.
그곳에 어떻게 갈 것인가!? 대중교통을 타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 날은 친구 빅터와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우리는 크루즈에서 대여한 자전거를 한 대씩 끌고 나와 오슬로 도심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겁쟁이라 도시에서 자전거 타는 걸 무서워하지만 오슬로에서의 라이딩은 수월했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페달을 밟으며 열심히 달리느라 근사한 오슬로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다는 것.
Cobblestone streets,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고대 건축물이 빼곡했던 이탈리아나 스페인과는 다르게 군더더기 없이 정갈한 선으로 이루어진 도시는 '북유럽의 미'가 무엇인지 제대로 뽐내고 있었다.
빅터를 따라 깔끔한 도로를 한참을 달린 끝에 뭉크 미술관에 도착했다. 그림 그리는 건 좋아하지만 그림에 대한 지식은 별로 없어서 미술관에 가면 그때만이라도 미술 상식을 채우려고 한다.
작가의 삶과 작품 설명도 읽어보는 편인데, 미술관을 나서면 바로 상식이 증발하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미술에 대한 상식 없이 그림을 그리고 보는 게 좋기도 하다.
음악을 배우고 나니 음악이 음'학'이 되어버리면서 들리는 모든 걸 분석하고, 곡을 연주하거나 쓸 때도 이론과 지식을 근거해서 창작을 하려는 게 오히려 한계처럼 느껴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미술을 배우면 내 마음대로 그림 그리는 행위가 지금처럼 즐겁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미술 이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사진으로만 보던 뭉크의 대표작 '절규(The Scream)'와 더불어 다른 작품들도 눈에 담았다.
뭉크의 작품들을 보면서 '이 화가의 어떤 특징을 내 그림에 적용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미술관 한편에는 See through Drawing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아이와 엄마 조각상을 보고 자유롭게 그리고 벽에 붙여놓는 공간이었는데, 사람들의 각양각색 해석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중에서도 어린이들의 그림에 눈길이 갔다. 기교 없이 솔직하고, 순수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어린이들의 그림을 나는 참 좋아한다.
뭉크 미술관 관람을 마친 뒤, 우리는 다시 주 목적지인 조각 공원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햇살과 적당한 온도의 바람. 그야말로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씨였고, 겁쟁이였던 내 불안한 마음은 어느새 평온함으로 채워졌다.
드디어 마주한 조각 공원은 명성대로 규모가 상당했다. 공원 중앙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 당시의 나는 그 멋진 작품들을 눈앞에 두고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나라의 기항지가 눈앞에 펼쳐지고, 세계 곳곳의 절경을 안방 드나들듯 하던 크루즈 피아니스트의 삶.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에 노출된 탓이었을까, 조각 공원에서 '에게, 이게 다야?' 싶은 마음이 앞섰다.
차가운 돌을 깎아 사람의 형상을 만드는 예술 행위가 얼마나 경이롭고 어려운 작업인지, 그때의 나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여행이 삶이 되어버려서 너무 spoiled 되었던 것 같다.
이제야 사진 속 조각상들을 보며 뒤늦은 반성을 한다.
다시 오슬로에 간다면, 각각의 조각상 앞에서 조금 더 머무르며 예술의 깊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조각 공원에서의 짧았던(무지했던) 관람을 뒤로하고, 우리는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아 항구로 향했다.
오슬로 시내의 세련된 건물들 사이를 시원하게 달려 우리의 보금자리 코닝스담으로 귀가했다.
빅터는 크루즈 밖에서 돈을 거의 안 쓰는 친구라 우린 이 날 간식 한 조각, 음료 한잔도 사 먹지 않았다. ㅋㅋ
오슬로는 이번 한 번만 오는 기항지라 언제 또 여기에 올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살짝 남았지만 그보다는 다가오는 기항지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다. 오슬로를 떠나서 맞이하는 다음 크루즈는 노르웨이를 잠시 벗어나 유럽의 다채로운 도시들을 마주하는 루트였기 때문이다. 덴마크, 에스토니아, 러시아 Saint Petersburg까지. 러시아에 가본다니!!
이처럼 아침에 맞는 기항지도, 밤에 연주하는 곡들도 매번 새로운, 설레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기항지에서의 여행을 끝내고 크루즈로 돌아와서는 피아니스트로서의 본분을 다했다.
오피스에 들러 공연 스케줄을 확인하고, 때가 되면 무대에서 연주복을 입고 다양한 선율을 연주했다.